<211화>
본성의 집무실로 귀환하긴 했으나, 공작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통신구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몇 번이나 통신을 시도했으나 역시 되지 않았다.
네 시간째, 아직 아무도 통신이 없다……. 얼음의 제단 안에서 예상치 못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제 아버지와 아들은 강한 힘을 타고난 벨슈타인이라지만, 그렇다고 불사는 아니지 않은가.
‘특히나 솔리아페와 루시엘은…….’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다친다면, 얼음의 제단이고 뭐고, 구출한 다음 폭발시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루이비드의 붉은 눈이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블루 익스큐션을 반드시 손에 얻어야 했기에 보내긴 했다만…….’
불안한 마음은 지울 수 없었다.
여섯 시간 동안 내부에서 통신이 없으면, 배치해 둔 검은 날개를 제단으로 투입 시킬 작정이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두 시간이었다.
이내 집무실 문을 두드리며 엘링턴이 들어왔다.
“각하, 여러 번 두드렸는데 못 들으신 겁니까? 회의장에서 가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작의 미간이 좁아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다시 챙겨 입고는 말했다.
“기왕 기다리는 거, 내일까지 기다리라고 해.”
“예?”
“내 가족들의 생사가 달렸는데 회의가 문제인가. 제단으로 돌아가서 대기하겠다.”
공작의 말에 엘링턴도 입이 바짝 마른 채로 초조한 눈동자를 굴렸다.
“……제단에 가신 분들은 아직 아무 소식 없는 거군요. 하지만 다들 강한 분들이 아니십니까. 무사히 돌아오실 거라고 믿습니다.”
“돌아올 거다. 나와 함께.”
“회의는 미루어 두겠습니다. 다녀오십시오.”
엘링턴이 고개를 숙이자, 공작이 집무실을 서둘러 떠나, 얼음의 제단 앞으로 도착했다.
마법 단장인 아나스타샤가 와서 고했다.
“제단 내부에서 통신은 아직 없었고, 날이 저물어 가면서 제단 주변의 마력이 차츰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작의 낯이 굳더니 명했다.
“……빌어먹을. 안 되겠군. 지금 당장 제단 내부로 인원을 투입해. 나도 갈 것이다.”
그때, 그의 검은색 통신구가 반짝였다. 얼른 열어 보자 루시엘의 얼굴이 비쳤다.
“루시엘! 어디에 있는 거냐, 다친 곳은 없고?”
다급한 공작과는 다르게 루시엘은 지쳐 보이긴 했지만, 밝은 낯이었다.
―아빠, 저희는 무사해요! 보세요, 저희가 블루 익스큐션을 구했어요.
루시엘의 뒤로 키제프가 푸른 검을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내내 찌푸려져 있던 공작의 낯도 잠시 밝아졌다.
“우리 새아가와 아들이 해냈군. 장하구나. 할아버지와 네 엄마는?”
―지금 할아버지와 엄마는 아래층에서 올라오고 계세요. 곧 합류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얼음 마녀가 아르제온을 납치해 갔어요.
“……그놈은 지은 죄가 많으니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만. 루시엘 너는 그만 귀환해라. 이제 아빠에게 맡겨.”
―그치만 아르제온과 약속을 했는걸요. 순수한 요정의 마나를 가진 저만이 그의 봉인을 풀어 줄 수 있다고 했어요.
“……그자가 지금껏 한 짓을 보면 신뢰가 가지는 않는다만. 어쨌든 지금 제단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이다.”
―앗, 아빠도 오신다고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다. 아빠가 갈 테니 기다려.”
―네, 아빠.
그의 말에 루시엘도 안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작은 루시엘에게 몇 가지 주의점을 듣고 통신을 마쳤다. 그러곤 검은 날개를 이끌고 함께 제단 내부로 들어섰다.
* * *
“춥지 않아?”
가족들을 기다리며 쉬고 있는 루시엘에게 다가선 키제프가 자신의 외투까지 벗어서 어깨에 걸쳐 주었다.
“괜찮은데…….”
“사실 드래곤의 힘을 받은 후로는 추위에 끄떡없어. 그래도 네가 준 펜던트는 간직할래.”
그의 붉은 눈이 루시엘에게 향하며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매만졌다. 어차피 돌려받을 생각은 없었다.
키제프가 장갑을 벗고는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자 온기를 느낀 루시엘의 진홍빛 눈이 커졌다.
“진짜로 따뜻해.”
“네 손 차갑다. 녹여 줄게.”
키제프가 루시엘의 옆으로 다가와서 앉으며 그녀의 양손을 포개듯 감싸 녹여 주었다.
피닉스를 부르거나, 마법으로 따뜻해지는 방법도 있었지만 어쩐지 키제프의 포근한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루시엘은 말없이 손을 내주었다. 양 볼이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목마르지?”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키제프가 아공간 포켓에서 잔을 꺼내, 워터 마법으로 물을 채워 주었다.
몇 시간째 물 한 모금 먹지 못한 채라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물을 마시며 쉬고 있는 동안, 이내 지팡이를 쿵 내리찧는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엄마!”
“얘들아, 무사했구나.”
약간 지친 기색의 길리아트와 솔리아페가 나타났다. 하지만 길리아트의 오른손이 푸르게 얼어붙어 있었다.
“할아버지, 오른손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마물에게 당하신 겁니까.”
루시엘과 키제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길리아트가 솔리아페의 부축을 받으면서 힘겨운 듯 잠시 바닥에 걸터앉았다.
“나는 괜찮다. 잠깐 쉬면 될 일이야.”
“나를 보호하려고 하시다가 거미에게 물리셨는데, ……독성이 있었던 것 같구나.”
“끅…….”
길리아트가 고통에 찬 신음을 쏟았다.
늘 강하기만 했던 할아버지가 다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루시엘은 마음이 아팠다.
“할아버지, 괜찮을 거예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루시엘은 얼른 다이아몬드를 꺼내서 성수를 부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마음으로는 그가 낫기를 바라면서.
화아아.
다이아몬드의 투명한 빛이 길리아트의 몸을 감쌌다. 그러자 얼어서 파랗게 변해 있던 손의 혈색이 점차 돌아왔다.
“할아버지! 좀 어떠세요?”
루시엘이 그의 손을 조심스레 살피며 물었다.
“이제 아프지 않구나, 고맙다.”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서 걱정이 가셨다.
“참, 마검을 찾았다고?”
키제프가 고개를 주억이며, 블루 익스큐션을 꺼내 보여 주었다.
길리아트가 감지하기에도 푸르고 검은 기운이 넘실대는 마검은 위험한 물건이었다.
“키제프, 그 검을 계속 들고 있다가는 안 좋은 기운을 온전히 다 받게 될 거다.”
“저는 어둠의 속성이니까 괜찮습니다.”
“그래도 사람을 악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야. 잠깐 임시로 봉인이라도 해 두어 힘을 덮어 놓자꾸나.”
“네.”
길리아트가 주문을 외우자, 이내 블루 익스큐션 위로 투명한 마법진이 덮어 씌워졌다. 넘실거리던 기운도, 강한 힘도 잠잠해졌다.
“아, 그리고 아빠께서 이 안으로 들어오시겠다고…….”
“루이비드가?”
“그이가?”
놀란 가족들 뒤로 누군가 층계를 올라왔다. 검은 갑주와 망토를 두른 공작이었다. 검은 날개를 대동한 채였다.
“……벌써 온 모양이구나.”
저벅저벅, 붉은 눈이 한참 구르더니 가족들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던 건가?”
“아버님이 마물에게 손을 다치셔서 루시엘이 치료 중이었어. 그런데 당신까지 오다니…….”
오자마자 솔리아페에게 자신의 외투를 둘러준 공작은 길리아트에게 조소를 날려 주었다.
“고작 마물 따위에게…… 약해 빠지셨습니다. 아버지.”
“고얀 놈. 왜 왔냐, 루이비드. 네 녀석이 오지 않아도 다 해결되고 있는데.”
길리아트도 탐탁지 않은 눈으로 공작을 보며 말했다.
“……시간이 이렇게 흐르기까지 아버지가 해결하신 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뭐라고, 이놈아? 내가 한 게 왜 없냐!”
“저였으면 이미 처리하고 가족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돌아왔을 겁니다.”
“저, 저 무정하고 되먹지 않은 놈.”
“핏줄이 어디 가겠습니까.”
붉은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앞을 루시엘이 가로막았다.
“그만하세요, 아빠, 할아버지. 두 분 싸우시면 제 마음이 아파요.”
루시엘의 말에 공작과 길리아트 모두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맞습니다, 지금 이러실 시간 없습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마녀를 찾으러 빨리 가야 합니다.”
“다 같이 흩어져서 길을 탐색하도록 하지.”
“위층으로 상승하는 통로가 어딘가 있을 거예요. 아까 우리가 지하에서 올라왔던 것처럼. 그렇지, 키제프?”
“맞아. 가서 다시 확인해 보자.”
루시엘과 키제프가 다시금 아까 벽이 열렸던 곳으로 가 보았다.
“여기…… 벽에 작은 이동 포탈이 생겼어. 아깐 없었는데 집행자를 만나고 나서 생긴 것 같아.”
정말이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이동 포탈은 이번에도 위쪽으로 향하는 화살표가 조그맣게 깜빡이고 있었다.
키제프가 가족들을 향해 외쳤다.
“길을 찾았습니다. 여기입니다!”
“오, 이런 게 있었군.”
“네, 할아버지. 아까 제가 추락했을 때 발견했어요.”
“우리 루시엘, 놀랐겠구나. 그때 얼마나 심장이 내려앉았는지.”
솔리아페와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키제프가 이동 포탈에 손바닥을 대자, 벽이 쿠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만에 하나, 제단이 무너져 내리거든 전원 퇴각해.”
“예? 하지만 저희가 구출하러…….”
“필요하다면 부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알아서 한다.”
그사이에 공작은 검은 날개 부단장인 아나스타샤와 마도사들에게 대기 명령을 내리고는, 가족들과 합류했다.
방처럼 생긴 공간에 모두가 들어가자, 푸른 벽의 돌문이 닫혔다.
슈우우.
방이 끝없이 상승해 아찔하고 어지러웠다. 이내 벽이 무겁게 열렸다.
키제프가 내리기 전 공작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다려. 내가 먼저 내린다.”
발을 뗀 그의 손에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잔뜩 돋아난 지팡이가 소환되었다.
그는 평소에 지팡이를 꺼내 쓰지 않아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공작이 옷자락이 펄럭이며 주변을 탐색하는 마법을 펼쳤다. 이내 붉은 눈이 가늘어졌다.
인상을 찌푸린 공작이 입을 열었다.
“1시 방향에 마녀가 있습니다. 일단 아버지와 저, 키제프가 선발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오냐. 준비됐다.”
“저도 준비됐습니다.”
세 명의 남자가 살기를 채우면서 함께 이동을 시작했다.
솔리아페가 루시엘을 감싸 안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잠깐 대기했다가 이동하자.”
“하지만 우리도 도와야 하지 않나요?”
“지금 같이 가면 그이의 마법에 같이 휘말려들 수가 있어.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리자.”
“……앗, 네.”
‘아빠의 마법은 얼마나 강하신 걸까?’
생각하면서 루시엘은 솔리아페와 함께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