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도대체 어느 틈에 넣었을까 생각하던 길리아트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아까 인사하며 포옹을 나눌 때였던 모양이었다.
‘녀석, 말도 없이 이런 선물을 다 준비하고.’
루시엘의 펜던트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 듯했다.
길리아트가 루비 펜던트를 목에 걸자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내 뜨거운 불의 기운이 몸을 감쌌다.
얼어서 느려졌던 몸을 움직이기가 한층 수월해졌다.
“솔리아페, 주머니에 혹시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냐?”
“……예?”
“루시엘이 불의 힘을 가진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어 둔 모양이다. 너도 있다면 끼도록 해라!”
솔리아페가 뻣뻣해진 팔을 조금씩 움직여,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정말 있었다. 펜던트를 겨우 목에 걸자 그제야 움직임이 수월해졌다.
“솔리아페, 내 옆으로 와라!”
길리아트는 아까부터 준비한 마법진을 차곡차곡 펼쳤다. 나무와 불의 마법진이었다.
사방은 얼음. 나무 속성의 마법사인 그에게는 불리한 지형이기에 마법진을 깔아 두면 조금 더 유리했다.
챙, 쩌적.
이내 얼어붙은 발의 얼음을 깨뜨리고 움직인 길리아트가 트리 실드의 시동어를 외치자, 굵은 나무줄기가 자라나 간신히 두 사람을 감싸듯 보호했다.
냉기가 직접적으로 차단되니 한결 살 것 같았다.
화르르.
길리아트는 둥그렇게 뻗어 나간 나무줄기에 불을 붙여 드라슈엘이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아르제온이 붙잡혀 있긴 했지만, 블리자드 마법이 계속되고 있어 어쩔 수 없었다.
휘리릭!
길리아트가 나무 채찍을 뻗어 드라슈엘의 몸을 꽁꽁 묶었다.
“자, 이제부터다!”
“……당신들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걸.”
파스스!
채찍을 얼려 버린 후 끊어 낸 드라슈엘이 날카로운 얼음 조각을 날렸다.
콰과과!
십여 개의 얼음 조각이 날아오자 나무줄기가 쉴 새 없이 자라 그 위로 박혔다.
화륵!
슬그머니 생성한 커다란 파이어볼이 날아가 드라슈엘의 옷자락을 그을렸다.
“……아악!”
비명을 지른 드라슈엘이 주춤거리는 틈을 타서 기운을 차린 솔리아페가 달려가 그녀의 몸을 검으로 갈랐다.
스사아!
검을 그대로 맞은 드라슈엘의 몸체가 눈과 얼음 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이내 다시 다른 곳으로 모여 본래의 형체를 갖추었다.
“……어, 어떻게 된 거지?”
“……후, 제법 재밌구나. 하지만 당신들을 상대하는 것은 여기까지야.”
솔리아페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낮게 읊조리자 드라슈엘이 낮게 웃었다. 그러곤 얼음 석상으로 변해 버린 아르제온을 품에 감싸 안은 채, 스스스 거울 안으로 도망가 버렸다.
이내 그들이 들어간 거울은 쩌적 갈라지면서 깨지고 말았다.
낭패감에 길리아트가 이를 단단히 깨물며 거울을 노려보았다.
“이런, 놓쳐 버렸군.”
얼음의 마녀. 대마법사인 그로서도 버거울 정도로 아주 강력한 상대였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벨슈타인의 초대 가주이자, 북부 마탑의 주인.
지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그의 붉은 눈빛이 악마처럼 형형해졌다.
* * *
에리카가 마차의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마탑에 들어간 이후로는 황도에 와 보는 건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일이었다.
색색의 건물들도, 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황도에 사는 레이디들은 한번 입은 옷은 다시는 안 입는대요!’
누군가 그런 말도 해 주었다.
너무 고지식한 마도사처럼 보이지 않도록 옷차림도 말끔하게 신경을 썼다. 목이 늘어지도록 입던 튜닉과 마탑에서 준 망토를 벗고, 넓은 카라가 달린 녹색의 원피스를 입었다.
에레스 녀석이 누나는 여자 옷이 몹시 안 어울린다고 타박했지만 가볍게 밟아 주고 나선 참이었다.
“아가씨, 목적지에 도착했수다. 70틸링이요.”
계산을 치른 후, 마차에서 내린 에리카는 고개를 들어 눈 앞에 펼쳐진 커다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장난감 가게의 문을 쿵쿵 두드리고서 에리카는 발그레하게 뺨을 붉혔다. 입구부터 근사해서 두근거렸다.
“누구십니까.”
이내 달칵 소리가 들리면서 멀끔한 단발머리의 남자가 모습을 비쳤다.
“아! 저는 루시엘의 소개로 방문하기로 했던 마탑 북부 지부의 마도연구팀 소속 에리카 실베인입니다.”
에리카가 제 소개를 하자, 제르다의 눈이 커졌다.
“루시엘 님께서 말씀하신 마도사님이시군요. 저는 인형사 제르다라고 합니다.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시지요.”
에리카는 깜짝 놀랐다. 황도 사람답지 않게 촌스러운 옷차림이었다. 자신도 그렇게 세련된 스타일의 소유자는 아닌데 이 남자는…….
그 와중에 얼굴만은 잘생겨서 봐줄 만했다.
‘그렇다 해도 저 단발머리는 용납이 안 돼…….’
하지만 그의 어깨에 매달린 곰 인형을 보자마자 흐윽,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선생님 어깨에 올라앉은 곰 인형 너, 너무 귀엽잖아요!”
“아, 이 녀석은 위로해 주는 곰 인형, 이름은 윌슨입니다. 초창기에 만든 마법 인형이라서 저와 가족 같은 아이입니다. 위로가 필요하신가요?”
“네, 완전!”
제르다가 곰 인형 윌슨을 에리카의 어깨에 올려 주자, 윌슨이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에리카는 행복한 얼굴로 흐물거리는 얼굴이 되고 말았다.
“하…… 너무 귀여워서 어지러워. 윌슨 이 아이를 제르다 당신이 만드셨다고요?”
“예. 안에 다른 마법 장난감도 많이 있습니다. 우선 둘러보신 다음 일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좋아요!”
* * *
루시엘이 손가락을 들어 커다란 방을 가리켰다.
“키제프, 저기 저 큰 방 안에서 아주 강한 마나가 느껴져.”
키제프 역시 드래곤 마나로 주변을 탐색하는 도중 강한 마나를 느끼고 있었다. 기분이 나쁠 만치 예리하고 차가운 감각.
“루시엘, 저 방은 일단 나중에 조사하는게 좋겠어. 위험할 것 같아.”
중앙의 큰 방을 제외한 두 개의 작은 방도 있었다.
그 방에는 마물이 몇 마리 있었다.
“저건 내가 퇴치하고 올게. 넌 쉬고 있어.”
“그래도 조심해. 아 참, 키제프, 잠깐만.”
루시엘은 아공간 마법이 걸린 가방을 한참 동안 뒤적거려 펜던트를 꺼냈다.
어제는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는데, 오늘 출발하고 나서 겨우 찾아냈다. 아무래도 마법이 잘못된 건지 가방을 수리해야 할 것 같았다.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펜던트를 건네주었다. 클로버 모양의 펜던트에는 루비가 콕 박혀 있었다.
“여기 이거.”
“할아버지랑 어머님 주머니에는 몰래 넣어 두었는데. 너는 아직 못 줬네.”
“이건 너의 보석?”
“응. 마탑에 있을 때 에리카 언니와 함께 만든 거야. 지금은 루비 펜던트지만, 클로버의 꼭지를 누르면 보석이 사파이어로 바뀌게 해 놨고. 일단 여기는 추운 곳이니까 루비로 해 두었어. 이게 있음 그래도 얼어 죽지 않을 거야.”
“고마워.”
키제프가 펜던트를 바로 착용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스켈레톤이 세 마리 있었고, 단숨에 해치웠다. 그러나 스켈레톤을 죽여도 이동포탈이 생성되지는 않았다.
방에서 나와 루시엘에게 돌아온 키제프가 말했다.
“이동포탈이 생기지 않았어. 아무래도 저 큰 방이 남은 길인 것 같은데.”
키제프가 중앙의 큰 방이 있는 곳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때마침 레이븐이 돌아 얼음의 마녀와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알려 주었고, 루시엘이 길리아트에게 통신을 걸었다.
“할아버지!”
―오, 루시엘. 우리 손주 며늘아가. 무사했구나.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걱정했다.
“네, 다행히 키제프가 와 주어서 큰 위기는 없었어요. 두 분은요?”
루시엘을 보자 안도하는 길리아트와 솔리아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행이군. 우리도 보다시피 무사하단다. 얼음의 마녀가 나타났는데 네가 준 펜던트 덕분에 살았다. 고맙구나.
“……할아버지, 얼음의 마녀가 벌써 나타났어요?”
레이븐에게 전해 들었지만, 두 사람은 그걸 모르니 루시엘은 놀란 척 물었다.
―그래, 보통 강한 것이 아니더구나. 아르제온을 얼려서 납치해 갔다. 그놈의 힘을 알고 있으니 죽지는 않을 거다. 하마터면 우리도 당할 뻔했지. 그런데 너희들은 어디냐?
길리아트의 물음에 루시엘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잘 모르겠지만, 중간 정도 되는 것 같아요.”
―허, 제법 높이 올라간 모양이군.
“네, 지하에서 여기로 방 전체가 올라와서 이동되었어요. 아, 할아버지 혹시 젤리 같은 마물을 만나면, 얼린 다음 검으로 베면 될 거예요.”
―고맙구나. 우선 우리도 바지런히 올라가 보마.
“지금 강한 마나가 느껴지는 방을 발견했어요. 다른 길은 없는 것 같아요.”
―잠깐…… 우리가 갈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떠냐?
잠자코 키제프의 뒤에서 듣고 있던 레이븐이 펄쩍 뛰면서 손으로 엑스자를 그렸다.
“그건 안 돼! 해가 지면, 이 제단에 흐르는 마력이 더 강해지고 말걸.”
“앗…….”
놀란 루시엘의 눈이 댕그래졌다. 레이븐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큰일이었다.
오전에 이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이미 들어온 후로 시간이 꽤 흐른 터였다. 체감으로는 세 시간 정도는 훌쩍 흐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얻어 낸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생각보다 이 제단은 규모가 컸다.
슥 다가온 키제프가 루시엘의 통신구를 대신 가져갔다.
―할아버지, 우선 해가 지기 전에 빨리 길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루시엘의 피닉스도 있으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키제프의 말을 들은 길리아트는 두 아이의 안위가 걱정되는지 굳은 얼굴이었다. 정적이 수 초 흘렀다.
―흠…… 알겠다. 허락하마. 둘을 믿는다. 몸조심하고, 검을 찾으면 다시 통신하자. 루시엘을 부탁한다, 키제프.
“목숨을 다해 지킬 겁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어머니도 부탁드립니다.”
더 이상의 말은 오가지 않았지만 키제프와 길리아트 모두 결연한 눈빛이었다.
그들을 지켜보던 루시엘도 간절해졌다. 루시엘은 긴 외투 주머니에서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스피넬을 꺼냈다.
맑고 투명한 분홍으로 빛나는 스피넬을 쥐고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제발 모두가 무사히 원하는 걸 얻고 여기에서 나갈 수 있게 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