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04)화 (204/282)

<204화>

아르제온은 루시엘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잘 찾아왔다, 꼬맹이. 아니, 그사이에 레이디가 되었군.”

성장한 루시엘을 본 것은 아르제온도 처음이었기에 그녀를 감상하듯 쭉 훑어보았다. 반면 아르제온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찾느라고 힘들었잖아. 대체 여기에서 뭘 하고 있었어?”

“오 년 후면 마탑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렸다. 일부러 호수 근처에 자주 출몰하고 있었지. 네 귀에 들어가라고.”

“아니, 그냥. 당신이 먼저 찾아왔으면 편했잖아. 조금 더 직접적으로 알려 주던가.”

루시엘은 약간 짜증이 치솟았다. 그러나 아르제온은 유유자적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거기에서 지냈을 때도 네가 너무 바빠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지.”

그동안 바빠서 아르제온에게 전혀 신경 써 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부분은 내가 할 말이 없지만. 아르제온, 이제 당신이 필요해. 얼음의 제단에 내가 원하는 물건이 숨겨져 있대. 마검 블루 익스큐션. 그걸 구해야 해.”

“……그렇군. 내 목적은 얼음의 제단에 있는 얼음의 심장을 다시 얻는 것이다. 그래야 봉인이 풀린다.”

“얼음의 심장?”

루시엘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내 두 사람을 지켜보는 두 여인의 강한 기세에 아르제온이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건 차차 이야기하자. 근데 저 엄청난 숙녀분들은…… 누구시지?”

“아, 우리 할머니랑 내 권속 피닉스. 인사해. 할머니, 피닉스. 여기 이 사람이 빙결의 마도사 아르제온이에요.”

“할머니가 왜 드래곤 마나를 갖고 계시지?”

아르제온이 떨리는 눈으로 루시엘에게 물었다.

“그야 우리 할머니는 드래곤이니까.”

이벨린이 외투를 여미면서 활짝 웃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아르제온, 당신이 일 제쳐 두고 도망간 전대 마탑주라지요? 우리 그이에게 일과 책임을 전가한…….”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그녀의 웃는 얼굴에 아르제온의 목소리가 다소 기어 들어갔다.

“바, 반갑습니다. 제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루시엘로서는 아르제온이 존대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피닉스가 슥 다가오더니 아르제온의 턱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오, 그대는 제법 아름다운 피조물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피닉스의 금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르제온의 낯이 하얗게 질렸다. 붙잡힌 턱에 느껴지는 열기가 얼음 속성인 그에게는 몹시 버거울 정도로 뜨거웠다.

“손이 뜨거운 분이시군요. 저랑 속성이 안 맞으시는 것 같으니, 접촉은 삼가 주시지요. 흥.”

무미건조하던 아르제온의 얼굴에 그제야 생동감이 생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루시엘이 말했다.

“그럼 아르제온을 찾았으니, 우선 아빠께 통신구로 보고 드리고 귀환할까요?”

“그래, 우선 그 얼음의 제단인지 뭔지에 대해 다 같이 논의를 해야겠구나.”

이벨린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루시엘은 통신구로 공작에게 알렸고, 아르제온의 의견을 토대로 얼음의 제단에 대한 논의들이 이어졌다.

얼음의 힘이 담긴 곳이니, 불의 힘으로 대항해야 한다, 제단에 끝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난번처럼 무력이 아니라, 지혜로 대응해야 한다 등.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결론은 이거였다.

“어쨌든 얼음의 제단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것은 두 가지. 얼음의 심장과 블루 익스큐션. 제단을 샅샅이 탐색하면서 가야 해요.”

잠자코 듣고 있던 길리아트가 아르제온에게 물었다.

“보통 제단은 강력한 존재가 지키고 있을 터인데, 얼음의 제단은 누가 지키고 있는 거지?”

“얼음의 마녀 드라슈엘. 그 무서운 여자가 내 힘을 얼음의 심장에 봉인해 버렸다.”

“아르제온,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루시엘은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 마녀가 길을 지나가던 나에게 반해서 같이 살자길래 거절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르제온이 잘못했네…….”

“그래, 여자 마음에 상처를 줬구만.”

루시엘과 길리아트의 말에 아르제온이 억울한 듯 소리쳤고, 그에 대한 여론은 벨슈타인 내에서 좋지 않았기에 키제프와 공작도 서늘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난 피해자라고! 그런데 루시엘.”

“……?”

아르제온이 눈을 감더니 루시엘의 근처로 다가와 그녀의 마나를 폐부로 들이마셨다.

“마나가 더 맑고 투명해졌군. 과연 요정의 마나. 그래, 루시엘,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은 바로 너다. 계약 결혼 끝나면 나에게 연락……!”

“……으응? 미친 거지?”

아르제온이 루시엘에게 손을 뻗는 순간.

퍽!

도끼눈을 하고 달려온 길리아트가 아르제온의 정강이를 퍽 차서 쓰러뜨렸다.

“아이고, 이놈아. 어딜!”

뒤에 있던 공작과 키제프가 몹시 거슬린다는 듯 살기를 뿜어냈다.

“그냥 저자를 마녀에게 제물로 던지면 일이 쉽겠다.”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해맑게 웃으면서 이벨린이 말했다.

“그때 쓸 그물이나 결박할 구속구를 준비해야겠구나.”

솔리아페가 말없이 스윽 몸을 일으키곤, 옆에 미리 챙겨 놓았던 도구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어머님. 이렇게 삼 초면 됩니다.”

태연자약한 얼굴로 솔리아페가 아르제온을 제압해, 순식간에 결박하고는 말했다.

“으, 으아아악!”

벨슈타인이 왜 악당가로 불리는지 악몽을 몸소 체험 중인 아르제온이었다.

잠시나마 잔뜩 혼쭐이 난 아르제온이 겨우 결박에서 풀려나 은빛 팔찌를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자, 이거 다시 받아라.”

“……응. 도망가면 안 돼.”

아르제온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바로 얼음의 제단으로 떠나는 것으로 정해졌다.

루시엘과 아르제온, 길리아트와 솔리아페가 함께 가기로 했고 제단 밖에서는 길리아트와 검은 날개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대기하기로 했다.

“아버지, 저도 가고 싶습니다.”

“너는 루시엘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이성을 잃기 쉬우니 이번 일은 지켜보고 있어라.”

“그래, 키제프. 루시엘은 내가 반드시 지킬 테니까.”

솔리아페가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힘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루시엘을 지키는 건 누구보다 제 손으로 하게 해 주십시오.”

키제프의 핏빛 눈동자는 강한 의지로 일렁였다. 공작이 말했다.

“……알았다, 다녀와. 대신에 밀린 업무는 철야해서라도 마쳐 놓아야 할 거다.”

무시무시한 말에도 키제프의 낯은 밝게 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위험인물이 루시엘을 호시탐탐 노릴지도 모르는데, 남편으로서 그냥 보낼 수 없습니다.”

키제프가 아르제온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 * *

밤샘 작업을 하던 공방의 마법 랜턴이 깜빡거리더니 이내 훅 꺼지고 말았다.

“이런…… 마정석이 또 떨어졌군.”

제르다가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루시엘이 준 최상급의 마정석 힘을 가진 보석을 고작 마법 랜턴에 사용할 수는 없어서 그건 가게의 마법 벽난로를 유지하거나 인형을 제작할 때만 쓰며 아끼는 중이었다.

요즘 그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밤의 대장간에 있는 난쟁이 류프델을 만나, 그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접하고 있었다. 마법과 기술을 결합한 신기한 마도구들, 무궁무진한 재료들.

루시엘의 의뢰가 쉽지는 않았지만, 계획대로 조금씩 실현은 해 보려 하고 있었다.

인형에 마나를 깃들게 해서 정해진 패턴에 의해, 움직이게 하는 건 가능했지만.

자신의 마나를 깃들게 하는 방법으로는 인형에 지성을 심어 주기 어려웠다. 더욱이 누구라도 인간의 것과 착각할 정도의 수준 높은 지성은 더더욱.

주인과 바로 정신을 연결하는 마력 심장을 만드는 것도 아직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최근 따로 연구한 것이 류프델이 알려 준 대로 라플라이였다.

라플라이라는 마법 식물은 스스로의 분신을 여러 개 만들어 내는 힘이 있다고 해서 그걸로 실험을 해 보는 중이었는데…….

밀짚 인형에 라플라이를 빻아 만든 용액을 붓고 자신의 마나를 연결하자 인형은 움직임을 멈췄다.

파스스.

검은 연기가 펑 하고 피어올랐다. 오늘도 실패인 모양이었다.

“콜록, 아무래도 라플라이로는 안 될 것 같은데. 루시엘 님의 마나가 담긴 무언가가 필요해.”

제르다는 아무래도 루시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 생각하면서 외투를 걸쳤다. 마법 랜턴에 갈아 끼울 마정석을 사러 가야 했다.

자주 가는 마정석 거래소가 심야에도 열어 다행이었다.

제르다는 장난감 가게의 문을 걸어 잠그고 밤길을 나섰다. 마정석 거래소가 있는 상업 지구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서 마차를 잡아타고서야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거래소 문 앞에서 서 있는 시커먼 모자를 눌러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제르다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르다와 똑같은 얼굴. 보라색 꽁지 머리에 투박한 나무 테로 만들어진 안경. 차갑고 싸늘한 인상과 키는 더 작지만 굽은 등을 가진 몸. 그의 쌍둥이 형이 분명했다.

자신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훌륭한 인형사 실력을 가졌지만 욕심은 많았던 프리다였다.

‘역시 지난번에 본 사람이 형이 맞았어. 하지만 형이 왜 황도에…….’

제르다는 마지막 순간 저를 밀치고 가던 형의 얼굴을 기억했다.

‘제르다, 나는 이 제국을 떠나겠다. 널 더 보고 싶지 않거든. 너의 그 알량한 자선 사업을 뛰어넘을 만큼 훌륭한 인형을 만들어 성공할 거다. 너도 곧 알게 되겠지. 돈 앞에 세상은 상냥하지 않다는 걸.’

프리다가 곧 다른 마차를 잡아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본 제르다에게 마부가 재촉했다.

“거, 마차에서 안 내릴 거요?”

“아, 저 마차를 따라가 주세요.”

제르다가 돈을 건네며 말했다.

프리다가 올라탄 마차는 이내 거리의 한 상점으로 들어갔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게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고급 상점이었다. 부유한 귀족들이 드나드는.

이내 프리다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와 중절모를 쓴 젊은 귀족 남자까지 함께 마차에 오르는 걸 확인한 제르다가 의심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누굴까. 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어느 순간, 시내를 빠져나가 버렸다. 왠지 모를 위화감과 초조함에 제르다는 문득 장난감 가게에 두고 온 통신구가 생각났다.

붉은 머리의 소녀가 이상하게도 낯에 익었다. 돌이켜 보니 문학 살롱 참가자 중 한 명으로 제국의 신문 기사에 났었다.

‘어느 후작가의 영애랬나?’

사교계를 잘 모르는지라 제르다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뭔지 모르지만 예감이 안 좋아. 루시엘 님께도 알리는 게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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