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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203)화 (203/282)

<203화>

따끈한 물에 목욕을 하니 피로가 한결 가셨다. 고단해서 별궁에 어떻게 왔는지도 가물거렸다.

“우리 아가 마님, 오늘따라 고단해 보이시네요. 작은 주인님과 분수 구경은 재밌게 다녀오셨어요?”

“앗, 베시는 뭐든지 다 알고 있구나.”

“에바 집사장님께 이야기 전해 들었지요. 물놀이 다녀오시면 잘 돌봐드리라고 전달받았는데 기다려도 안 오셔서 걱정하던 차였어요.”

목욕 시중을 들어 주던 베시가 루시엘의 양 뺨을 소중한 동생 대하듯 감싸더니 홍조가 피어오른 걸 보고는 물었다.

“얼굴에 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아니야. 나 안 아파.”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으며 답했다.

“그렇담 다행이에요. 우리 아가 마님이 아프시면, 제 마음이 더 아프니까요.”

“베시도 아프지 마.”

그녀의 상냥한 말에 루시엘의 마음도 따스하게 녹아내렸다.

“물론이지요. 아, 로즈가 과분하지만 선물 감사히 잘 받았다고 인사 전해 달래요.”

“잘 받았구나. 로즈랑 아기도 보고 싶다.”

“나중에 만나게 되실 거예요.”

베시가 웃으며 루시엘의 피부에 레몬 향기가 나는 화장수를 발라 주고, 광목 재질의 나풀거리는 레이스가 풍성하게 달린 하얀색 잠옷을 입혀 주었다.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으니 기분이 좋았다.

“요즘 두 분이 사이좋게 지내셔서 보는 저희도 너무 흐뭇해요. 아 참, 아까 솔리아페 마님께서 다녀가셨어요.”

“앗, 엄마께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셨던 걸까? 지금이라도 만나 뵈러 가야겠어.”

당장 솔리아페를 찾아가려는 루시엘을 베시가 붙잡아 두었다.

“아니에요. 두 분 침실을 빨리 단장하기 위해, 하인들을 데려오셨었어요. 작은 주인님께서 계속 간이 매트리스나 소파에서 주무실 수 없으니까요.”

“아…….”

“그래서 가장 큰 빈방 하나를 침실로 꾸며 두었으니까, 오늘부턴 거기를 두 분이 함께 이용하시면 될 거예요.”

“……꼭 그럴 필요가 있을까.”

루시엘이 얼굴이 잔뜩 빨개져서는 말했다.

“어머, 두 분은 부부시니까요. 싫으세요? 싫으시다면 그냥 혼자 주무셔도 되지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너무 부끄럽단 말이야.’

특히나 오늘은 그런 일까지 있었는데 같이 누워서 자면, 너무 어색할 것 같았다.

하지만 거절하면 키제프는 서운해할지도 모르겠다.

“아가 마님이 불편하시면야, 그냥 혼자 주무셔요.”

루시엘이 잔뜩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자, 베시는 그녀가 귀여워 쿡쿡 웃음이 났다.

그러나 등 뒤에서 키제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아까 전부터 이미 잘 준비를 마쳐서 편안한 남색의 가운 차림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루시엘, 이리 와.”

“……!”

그 말에 루시엘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어머,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럼 두 분 안녕히 주무세요.”

“앗, 베시이. 나만 두고 가지 마.”

루시엘의 진홍빛 눈동자가 흔들리며 사라지는 베시의 뒤를 쫓았다.

키제프가 자못 굳어진 얼굴로 베시를 따라가려던 루시엘의 앞을 슥 막았다. 그사이 베시는 이미 별궁 밖으로 가 버렸고 이제 둘만이 오롯이 남았다.

루시엘이 눈망울을 댕구르르 굴렸다.

“안 잡아먹어.”

“…….”

“가자.”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목을 잡고는 방문을 열었다. 하얀색으로 꾸며진 침실은 별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별자리가 그려져 있어 어색하면 저걸 구경하는 척해야겠다고 루시엘은 생각했다.

커다랗고 하얀 침대는 몹시 푹신푹신해 보였다.

루시엘은 쭈뼛거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왔다.

“같이 잠든 게 처음도 아닌데 자꾸 어색하게 굴 거야? 그리고 그동안 따로 잔 게 이상했던 건데.”

“……그런 거야?”

“부부는 그런 거야. 자야겠다.”

키제프도 몰려오는 졸음에 하품하고는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갔고, 루시엘의 손을 잡아 주었다.

루시엘도 어기적 그를 따라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어색해하는 루시엘을 위해 키제프가 팔을 뻗어 마법 랜턴을 끄고, 먼저 누워 눈을 감았다.

몽실몽실한 구름 위에 올라온 것처럼 포근해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루시엘은 얌전히 이불을 덮고 등을 돌렸다.

‘얼굴 보고 있으면 더 어색할 거 같아.’

“잘 자란 말도 안 하고 자? 잘 자, 루시엘.”

어둠 속에서 눈을 감은 채로 키제프가 말했다.

“응, 키제프도 잘 자.”

키제프는 곧 실눈을 떴다. 등 돌리고 이불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자는 루시엘이 보였다.

부끄러워하는 루시엘을 위해서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역시 떨리고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가 곧 아쉬움이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침실 처음으로 같이 쓰는데 등 돌리고 자?”

“…….”

그의 말에 루시엘이 힐끔 뒤를 돌았다. 키제프가 말없이 자신의 어깨를 한번 가볍게 들었다.

팔베개를 해 주겠다는 뜻이었지만, 루시엘이 아직도 망설였다. 그가 팔을 옆으로 짚고는 루시엘 쪽을 바라보았다.

“키스 안 할 테니까 이리 와.”

“뭐? 아니, 그 생각 이제 안 하는데.”

아득하게 잠긴 키제프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렸다.

훅 다가온 그가 낮게 속살거리며 루시엘의 이마에 뽀뽀했다. 그러자 루시엘이 눈을 찡그리며 제 이마를 매만졌다.

“안 한다며.”

“굿나잇 뽀뽀는 해야지.”

미소를 베어 문 그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루시엘이 조심스레 다가가서 그의 어깨에 머리를 푹 기댔다. 레몬 향기와 달콤한 숨결이 코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안온한 무게감이 어깨에 내려앉자 더없이 포근해진 기분이 들었다.

달빛을 머금은 스테인드글라스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냈다.

“잘 자.”

토닥토닥. 키제프가 다독여 주는 손길을 느끼면서 루시엘은 잠들었다. 비록 그는 조금 더 밤을 헤매다가 잘 것 같았지만 행복했다.

* * *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아르제온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류프델도, 캐서린도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아르제온 하나를 찾겠다고 이렇게 다들 시간 낭비하며 매달릴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찾아볼 테니, 캐서린은 할아버지를 도와 페넬로페와 가까이 지내는 크루거 백작의 행적이나 정보를 계속 조사해 주세요.”

루시엘은 캐서린에게 따로 부탁하고는 오늘도 피닉스, 이벨린과 함께 비행을 나가기 위해 준비했다. 이른 시간 준비해 홀로 나오자 때마침 우편 마차가 도착하더니 에바가 서신을 전달해 주었다. 황가의 인장이었다.

“아가 마님, 클로디아 황녀님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에바. 클로디아 황녀님, 뵌 지가 정말 오래되었어.”

홀로 티 룸으로 들어가서 서신을 펼쳐 보던 루시엘의 얼굴이 굳고 말았다.

레이놀드 황자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다는 내용이 적혀 있던 터였다.

‘이럴 수가. 내년쯤이나 올 줄 알았는데……. 블루 익스큐션을 더 빨리 찾아야겠어.’

입술을 짓씹으며 티룸을 나온 루시엘은 마음이 급해졌다. 응접실로 내려오는 이벨린을 보고 말했다.

“할머니, 아무래도 더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루시엘이 서신을 보여 주었다.

서신을 읽은 이벨린이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그래, 어서 출발하자꾸나!”

그때였다. 응접실로 내려온 길리아트와 바깥 중정의 회랑을 달려온 키제프가 동시에 두 사람을 불러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잠깐만 여보!”

“루시엘!”

두 남자 모두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하얀 담비 털로 만든 두꺼운 외투였다.

길리아트가 이벨린에게 외투를 입혀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추운 걸 싫어하면서. 이걸 꼭 입고 가야 한다니까요.”

“아니, 여보. 난 괜찮은데요.”

괜찮다면서도 이벨린은 길리아트가 챙겨 주니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커다란 풍채와 카리스마를 가진 길리아트가 부인에게 저리 다정한 모습을 보이니 왠지 더 보기 좋아서 루시엘은 활짝 웃었다.

이에 질세라 키제프도 방울 달린 담비 외투를 루시엘에게 입혀 주고 단단히 여며 주었다.

“자, 루시엘도 입자.”

“고마워.”

그 모습을 멀리서 구경하던 시녀들이 양 뺨을 감싸 쥐더니 어쩜 저리 로맨틱하시냐면서 싱글벙글 미소가 번졌다. 그 무리에는 에바와 베시, 리아도 섞여 있었다.

“아, 그리고 눈사슴을 설원의 거울 호수 근처에서 본 사람이 있대. 레이븐이 알려 줬어. 거기부터 가 봐.”

“앗, 정말? 고마워. 초콜릿 잔뜩 줘야겠다.”

기뻐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서 키제프가 말했다.

“잘 다녀오고. 너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아니다, 세 시간 이상 연락 안 되면 내가 갈 거야.”

키제프가 결혼반지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는 정무를 보다가 급히 나온 것인지, 금테 안경을 쓴 채였다.

길리아트와 키제프, 사용인들의 배웅을 뒤로한 채 이벨린이 먼저 나섰다.

“그만 가자, 루시엘.”

“네, 할머니.”

이벨린이 부르자 쪼르르 달려간 루시엘이 그녀의 팔짱을 끼고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녀와의 세 번째 비행이었다.

첫날도 그랬지만 이벨린의 탄탄하고 커다란 몸체는 웅대하고 근사해서 넋을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비행 실력은 또 얼마나 유려한지, 루시엘은 이벨린에게 반할 것 같았다.

피닉스의 히팅 마법 덕분에 이벨린과 루시엘도 추위를 타지 않고 무사히 비행할 수 있었다.

슈우우.

피닉스와 루시엘을 등에 태운 채, 창공을 날던 이벨린이 우아하게 거울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착지하고 나서 말했다.

“거울 호수에도 없으면 어찌할지 걱정이구나.”

“제발 있었으면 좋겠어요.”

루시엘이 간절한 마음으로 얼어붙은 거울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요정의 날개를 펼치자, 주변의 마나 흐름이 느껴졌다.

첫 비행을 시작할 때 가족들에게도 날개를 보여 주어서 이벨린은 놀라지 않았다.

그렇게 탐지하듯 얼어붙은 호수를 따라서 두 시간째 쭉 돌고 있을 때였다.

유독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했더니, 물빛 머리카락을 흩날린 채 호숫가에 앉아 있는 미청년의 뒷모습이 보였다.

루시엘은 반갑게 외쳤다.

“드디어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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