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타닥타닥.
따사로운 모닥불 때문일까.
둘은 어느새 나른해져선 머리를 맞댄 채 잠이 들고 말았다.
키제프의 곁이 너무 포근해서 밖인지도 모르고 잘도 자 버렸다.
루시엘은 분홍색 통신구에 반짝 불빛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키제프의 팔을 살짝 들어서 품을 벗어나 과수원 쪽으로 갔다.
통신구를 펼치자 공작의 얼굴이 화면에 잡혔다.
―루시엘, 아빠다.
“앗, 아빠. 통신구로 보니까 새로워요.”
루시엘이 반갑게 받아 들자 평소 같았으면 주접을 떨었을 그의 목소리가 다소 딱딱했다. 그를 알아챈 루시엘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어디에 계세요?”
―캐서린이 알려 준 정보를 듣고 피네 설원에 갔다 왔다. 근데 우리 새아기는 어디에 있나. 별궁은 비었다던데.
가만 말을 이어 가던 공작이 루시엘의 뒤편을 보고는 경계하듯 목소릴 낮췄다.
―잠깐 웬 놈이 너에게 다가오는데. 뒤에.
“아…….”
루시엘이 뒤를 슬쩍 돌자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키제프가 무슨 일인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작의 목소리를 듣고는 키제프가 통신구에 대고 얼굴을 비추며 답했다.
“아들놈입니다. 아버지. 루시엘은 저랑 아기 영지에 함께 있었어요.”
―좋은 집 놔두고 노숙 중인 건가. 들어와. 아니, 일단 루시엘 바꿔라.
키제프가 받자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공작은 누가 봐도 온도 차가 느껴지는 태도였다.
―오늘 기분이 안 좋다 했더니 우리 딸 얼굴을 못 봐서였나……. 빨리 와라. 루시엘. 통신구가 실물을 못 담으니까.
“네, 바로 들어갈게요. 아빠, 저도 갑자기 근사한 얼굴 보고 싶어요. 아, 산딸기가 많이 열렸는데 조금 따 갈까 봐요.”
―아니다. 그냥 와.
루시엘이 웃으면서 통신을 마치자, 키제프가 다소 무감해진 눈빛으로 말했다.
“누가 보면 네가 딸 같고, 나는 남 같다.”
“키제프가 먼저 밝게 말 걸면 아빠도 반겨 주실 텐데.”
잠시 상상한 그가 몸서리를 쳤다.
“징그럽다 하실 게 분명해. 그냥 거리 두기를 계속하는 게 낫겠군.”
루시엘이 키제프와 함께 공작성에 귀환했을 때는, 길리아트와 이벨린, 캐서린과 엘링턴까지 다들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공작의 집무실 앞에 모여 있었다.
길리아트가 말했다.
“너희들 왔구나.”
“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는 거죠? 캐서린이 알아낸 정보가 피네 설원과 연관이 있나요?”
“그렇단다. 안으로 들어가 보거라. 캐서린 자네도 같이 설명해 주는 게 좋겠군.”
“예…….”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 루시엘도 걱정이 되었다. 키제프가 그런 기색을 눈치채고는 손을 꼭 잡아 주며 캐서린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폐지하도의 이동포탈, 얼음의 제단에 있다는 블루 익스큐션, 움직이기 시작한 페넬로페와 발루크 상단주까지.
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루시엘이 얼굴을 굳히면서 턱을 매만졌다.
“그럼 지금 당장은 얼음의 제단에 가야겠네요. 그곳은 아르제온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는 곳인데 그라면 잘 알 거예요.”
“아버지께 들었다. 그 눈사슴으로 둔갑해 있었다지? 네 곁에 있으려는 수작이었군.”
공작이 으득 이를 갈았고 싸늘해진 눈으로 키제프가 물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마탑 북부 지부의 전대 마탑주 아르제온이 눈사슴로 변신해 내 아기 영지에 머물고 있었거든.”
“……뭐? 감히 네 영지에 마탑주가 있었어? 이건 어떻게 해도 용서가 안 되는데. 그놈 너에게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거 아니야?”
으드득, 키제프도 주먹을 꾹 쥔 채 이를 갈았다. 두 부자가 서슬 퍼런 분노의 기운을 내뿜자 루시엘이 중재하기 위해 말했다.
“자, 잠깐만. 그건 아니었어. 그에게도 사정이…….”
루시엘은 문득 자신이 왜 아르제온의 변명을 해 주고 있나 싶어 말을 돌렸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얼음의 제단에 있는 블루 익스큐션을 찾아내는 거잖아. 그러려면 아르제온이 필요할 거야. 그의 힘이 얼음의 제단에 봉인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그딴 자식의 사정 알 게 뭐야. 아버지, 그냥 우리끼리 가도 상관없을 겁니다.”
“……가능하다면 그게 좋겠다만.”
키제프가 형형한 붉은 눈을 빛내며 살기를 드러냈다. 저렇게 서늘한 기세를 뿜어내니 영락없이 벨슈타인이었다.
아까까지 제게 보여 주었던 그 다정함은 온데간데없는 살벌한 모습이었다.
루시엘이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자, 밖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길리아트가 들어와 문을 달칵 닫으며 말했다.
“나도 아르제온이 괘씸하지만 그놈이 필요하긴 할 거다. 어쨌든 아르제온이 얼음의 제단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으니.”
“할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그렇담 이리하자. 아르제온 그놈을 찾고, 블루 익스큐션을 손에 얻어 볼일이 끝나면…… 그때 묻어 버리자.”
“……좋습니다.”
“예, 할아버지.”
흉흉한 붉은 눈을 빛내는 세 사람의 모습에 루시엘은 걱정이 되었다.
‘이거 알면 아르제온이 영원히 안 나타날 거예요…….’
그나저나 아르제온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마탑에 가기 전이었다.
루시엘이 팔찌를 돌려주면서 떠난다고 하자, 아르제온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급작스러운 이별이라니 가슴이 아프군.’
‘나랑 헤어지는 게 아쉬운 게 아니라, 내 아기 영지에서 편안히 쉬던 생활이 아쉬운 것 아니야?’
‘눈치 빠른 것. 하필이면 왜 마탑에 가는 거냐. 그 지긋지긋한 곳을……. 그럼 오 년 후에는 나오는 거지?’
‘응, 아마도?’
‘알았다. 나는 잠시 유랑을 시작해야겠군. 기다리마, 루시엘.’
그렇게 아르제온은 훌쩍 떠나 버렸다. 유유자적 떠난 그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할아버지, 아르제온은 오 년 전 훌쩍 떠났는데 어디서 찾죠?”
“우선 류프델에게 물어보도록 하지. 소식을 들었을지 모르니까.”
과거에도 아르제온은 설원에서 발견된 적이 있었으니, 공작은 정찰조를 보내 설원을 샅샅이 조사하겠다고 했다. 그때, 밖에 있던 이벨린이 들어왔다.
“혹시 내가 도울 일이라도 있니?”
그때 루시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벨린은 드래곤이니 하늘을 비행할 수도 있고, 아주 기민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루시엘도 요정의 날개를 사용하면, 강한 마나를 가진 상대가 근처에 있을 시에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네, 할머니. 찾을 사람이 있는데 저 좀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루시엘이 그녀의 손을 잡고 눈을 초롱이며 부탁했다.
“……루시엘, 설마 설원을 비행하자는 거니? 네 부탁은 뭐든 들어주고 싶다만, 할미가 요즘 추위를 많이 타서. 콜록콜록. 오, 그렇지. 네 권속에게 부탁해 같이 가면 되겠구나.”
이벨린이 방긋 웃었다가 루시엘과 키제프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너희들 머리랑 옷차림이 꼭 물에 빠졌다가 마른 강아지들 같구나. 뭘 하고 있었니?”
“분수에서 놀다가…….”
“놀다가 설마 빠진 건가? 키제프가 에바에게 분수 개방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작이 서늘한 눈으로 키제프에게 책임을 묻는 눈빛을 했기에 그가 흠칫 표정을 굳혔다.
“아, 아뇨. 물장구만 치고 아무 일 없었어요, 아빠!”
루시엘이 무마하려고 애써 미소를 지었고, 이벨린이 걱정했다.
“저런, 둘 다 감기 걸리면 큰일이다. 오늘은 가서 뜨끈한 물에 목욕하고 푹 자거라.”
“네, 안녕히 주무세요.”
루시엘과 키제프가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별궁으로 가기 위해 본성을 나갔다.
중정에는 오렌지색 튤립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루시엘이 쪼르르 튤립이 있는 곳으로 가서 꽃내음을 맡았다. 꽃향기를 맡으니 불안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녀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키제프가 말했다.
“루시엘, 아까 감싸 줘서 고마웠어. 나도 레이븐에게 그 아르제온이라는 자를 찾아보라고 부탁해 볼게.”
“응. 빨리 찾아야 할 텐데. 혹시 벌써 소울 이터가 만들어진 건 아니겠지? 레이놀드 황자나 카일라 황비가 벌써 무슨 수를 쓴 거라면.”
루시엘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제 뒤에 있는 키제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그녀를 내려다보며 키제프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 금방 손에 넣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검을 소울 이터로 만들었다면, 오 년이나 제단에 검을 묻어 놨을 리 없어. 직접 가지고 있었겠지.”
키제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루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하나씩 하면 돼. 루시엘. 가족들도, 나도 있어.”
“응. 모두를 믿어. 그리고 나 자신도 믿을 거야.”
루시엘이 자신감으로 웃으며 핑크 다이아몬드를 만들어 냈다.
툭.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걸 잡은 키제프가 보석에 입을 쪽 맞췄다.
“난 보석 안 좋아하지만, 네가 만든 것들은 안 좋아할 수가 없군.”
아까의 그 입맞춤이 다시 생각나서 그만 루시엘은 뺨이 화끈 달아올랐다.
“…….”
키제프가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등에 닿는 단단한 품, 진득하게 날아온 붉은 눈동자에 루시엘은 다시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들었다.
루시엘은 지치고 고단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난리가 있었으니까.
“안 되겠다.”
키제프가 픽 웃으면서 늘어진 루시엘의 등과 다리 사이로 팔을 넣어, 그녀를 안아 올렸다.
“얼른 재워야겠네. 가자, 밤이 늦었어. 공주님.”
귓가를 간지럽히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단단한 품에 갇혀 루시엘은 안도하고 또 힘을 얻었다.
“루시엘, 손.”
“으응…….”
루시엘이 그의 목에 손을 감고 안자, 지치지도 않는지 키제프는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별궁에 다다랐다.
그러곤 노아를 의식하듯 별궁 앞 호위 기사들이 있는 앞을 일부러 지나갔다.
“오늘은 불침번을 서지 않아도 좋다. 다들 그만 물러가.”
“예, 소공작님.”
키제프의 명령에 모두 물러갔다. 베시가 나와 두 사람을 보고 말했다.
“어머, 두 분 많이 늦으셨네요.”
“뜨끈한 목욕물부터 준비해 줘. 루시엘이 감기 걸리지 않게.”
“예? 알겠습니다.”
베시가 부드러이 미소 지으며 준비하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