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그러자 살이 에일 듯한 추위가 엄습하며, 눈보라가 몰아쳤다.
휘오오오.
봄에도 이런 날씨를 가진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그동안 수도 없이 오갔던 곳.
북부의 끝 경계선 너머 피네 설원이었다.
“여긴…….”
자르가가 인상을 쓰며, 공작의 어깨에 자신의 망토를 둘러 주고 나서 고했다.
“피네 설원이 아닙니까.”
‘빌어먹을.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감히…… 벨슈타인 공작령 안에 블루 익스큐션을 감춰 놓았다고?’
끝없이 펼쳐진 설원 저 너머 언덕에 자리한 고대 유적이 보였다. 공작이 인상을 쓰며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잠깐 저건 뭐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은 다시 길리아트에게 통신해 상황을 알려 주었다. 그는 듣자마자 바로 소리쳤다.
―허, 거기는! 얼음의 제단이 아닌가 싶구나.
“……얼음의 제단이라니 그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아르제온! 그놈을 찾아야 되겠군. 그놈의 힘이 그곳에 봉인되어 있다고 했었다.
“저는 일단 그놈이 누구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너도 들었지 않느냐. 사라진 전대 마탑주 아르제온. 빙결의 마도사. 네가 구해 온 설원의 눈 사슴 말이다!
“예에?”
길리아트가 흥분해서 하는 말에 루이비드는 당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일단 성으로 귀환해라! 자초지종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루시엘과 키제프에게도 알려 주어야 하니까.
“아닙니다. 온 김에 조금 더 조사를…….”
―얼음의 제단이 맞다면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잘못 건드리면 다칠 수도 있다. 예전에 루시엘과 내가 갔던 불의 제단처럼 자격이 없으면 아예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겠지.
노파심 가득한 목소리로 길리아트가 말했다.
“……일단 조금 더 정찰하고 귀환할 겁니다.”
공작이 통신을 마치고는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얼음의 제단에다 아르제온이라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군.”
* * *
“나는 이미 마음 정했으니까.”
“……마음을 정해?”
“그래. 난 정한지 제법 됐거든. 아주 확실하고 선명하게.”
키제프의 여유로운 모습에 루시엘이 진홍빛 눈망울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정했어?”
루시엘이 묻자 키제프의 얼굴이 한층 가까워졌다.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를 향한 이 감정은 사랑이라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루시엘은 이상한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그의 눈은 계속 루시엘을 향했다.
다정하게 속삭이던 목소리가 영원히 귓가를 맴돌 것 같았다. 키제프의 핏빛 눈동자에 순간 빨려들 것처럼 홀리는 기분.
‘도대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루시엘은 심장이 초콜릿처럼 눅진하게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두근두근. 쿵쿵쿵.
‘사랑이라고? 나는 아직 널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난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해?’
“키제프.”
“응?”
“나 아직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랑 같이 있으면 왜 이렇게 신경 쓰이는 게 많은 걸까. 작은 거 하나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네가 뭘 하면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막 그래.”
“……루시엘?”
“너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었고 누구보다 매력적인 남자로 성장해 버렸는데 난 아직 그대로인걸. 나보다 더 예쁜 여자가 나타나면 어쩜 좋을까. 없는 고민도 한단 말이야. 말해 봐. 이거, 사랑이야?”
자못 심각해진 루시엘의 길게 이어지는 말에 키제프는 놀랐다가 얼굴이 붉어졌다가 이내 마지막에는 미소를 머금고 말았다.
“이 보석의 비밀을 풀면, 정답이 나오지 않을까.”
“바보야. 그걸 모르겠다는 건데. 이거 이름도 몰라.”
두 사람은 하트 보석을 이리저리 불에 비추어 보았다. 키제프가 진지하게 다른 보석과 비교하며 살피더니 결론을 내렸다.
“음. 사랑이야. 사랑 맞아, 이거.”
“어째서?”
“사랑이니까 다른 보석들은 전부 커다란데 이것만 이렇게 조그맣지. 우리 부인은 나에 대한 사랑이 손톱 크기인가 봐.”
“……뭐어?”
키제프가 장난스레 놀렸다. 떠드는 사이에 어느덧 물기가 한결 말라 둘의 옷도 머리도 보송보송해졌다.
오목눈이처럼 머리털이 몽글몽글 부풀고 솟아오른 루시엘에게 키제프가 붉은 입술로 다가와 속삭였다.
“손톱만큼이어도 기분 좋아. 나머지 사랑은 내가 채울게.”
“…….”
루시엘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루시엘이 웃고 나서 하트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나도 해 볼게. 우선 요만큼만.”
심장 가득히 모아진 마나가 일렁이며, 또로롱 보석 비를 뿌렸다.
철썩, 철썩 심장에서 파도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루시엘이 사르르 미소 지으며,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이거 하난 확실해.”
“뭐가?”
“네가…… 사랑을 가르쳐 주고 있어.”
루시엘이 머리를 기울여, 키제프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귀를 기울였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포근한 온기가 퍼지자, 중독될 것처럼 서로의 품이 아늑했다. 둘의 심장이 똑같이 커다랗게 쿵쿵 울렸다.
루시엘은 로맨스 소설을 즐겁게 읽고 있던 피닉스에게 빌려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한 순간을 떠올렸다.
‘루시엘, 첫 키스도 아직인 너에게 이 소설은 무리란다.’
‘키스…… 했어요. 저도. 한 번뿐이지만.’
‘오호? 자세히 말해 보렴.’
‘이, 이렇게…….’
‘……? 맙소사. 사과와 사과가 부딪히면 멍이 들지. 그게 무슨. 그건 키스가 아니란다.’
‘그럼 뭔데요?’
‘권속에게 별걸 다 물어보는구나, 루시엘,’
그러고 나서 피닉스는 다른 설명은 해 주지 않고는 가라고만 했다.
‘힝. 키제프는 분명 키스라고 했는데, 피닉스는 아니라고……? 가족들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루시엘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 소매를 물어뜯었었다.
루시엘이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쓸었다. 여전히 따뜻했다. 아니, 뜨거웠다.
루시엘의 눈빛도 한층 진해졌다. 강한 열망이 피어오르는 눈이었다. 핏빛을 띠는 가넷이 또롱, 만들어졌지만 루시엘은 상관하지 않았다.
“다시 해 볼까?”
“응?”
“……키스.”
나른하게 내뱉은 말이 루시엘의 입술에서 터졌을 때, 키제프는 깜짝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까부터 내내 참고 있었는데 루시엘이 먼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으니까.
“그거 키스 아니래.”
“……너 어떻게 알았어?”
루시엘의 연애 지식 수준으로는 알기가 어려웠을 터였다.
“피닉스가 알려 줬어. 근데 너는! 뭐야, 알고 있었어? 해 봤어?”
루시엘이 키제프의 멱살을 쥐고 짤짤 흔들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루시엘이 찡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근데 그게 키스가 아닌지 어떻게 아는 거야?”
키제프가 목을 긁적이며 눈을 깜빡였다.
“그때 말했다시피 동료에게 들었어.”
숨을 꼴깍 넘기듯 키제프가 말했다. 긴장이 역력해진 그에게 루시엘이 다가섰다.
앉아 있으니 까치발 따위 하지 않아도 그에게 마음껏 다가갈 수 있었다.
둘 다 해 본 적 없으니 공평하게 알아 가면 되겠다.
상기된 뺨 때문에 얼굴에 또 열이 올랐다. 아니, 모닥불 때문일지도 몰랐다.
루시엘이 눈을 감고는 그의 입술에 쪽 입술을 맞댄 채로 가만있었다. 새들이 부리를 맞댄 것처럼, 간질간질 부드럽고 기분이 좋았다.
‘이러면 돼?’
입술을 다른 곳에 쓰고 있으니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루시엘이 가만있자, 키제프는 웃음이 터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면서 키스하자고 덤비네. 하지만 용기에는 상을 줘야지.’
키제프가 부드럽게 루시엘의 입술을 살짝 오리처럼 깨물었다가 말캉한 살을 톡 건드리자마자 부드러움에 그만 정신없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촉촉한 과일을 입안에 물고 있는 느낌에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너무 달콤해서 무서움에 그만 입술을 얼른 떼고 멈췄다.
“…….”
루시엘의 놀란 표정이 꼭 키스가 이런 거였어? 하는 것 같아서 키제프가 그녀의 어깨를 조용히 안았다.
“자, 궁금증 해결됐지?”
애써 어색하지 않은 척 키제프가 말했다. 루시엘이 참새처럼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담요 안으로 파묻히듯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으응. 이제 안 궁금해…….”
들어가서 달팽이처럼 사라질 기세로 부끄러워하는 루시엘을 키제프가 담요 위로 와락 안았다.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양 뺨에 뽀뽀했고, 그가 뽀뽀를 할 때마다 루시엘은 점점 담요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까지 들어갈 거야?”
“몰라. 나 열 있는 것 같아.”
루시엘의 이마를 짚어 보던 키제프가 말했다.
“……없는데. 그리고 루시엘, 나도 실은 키스하고 싶었는데 참았어.”
“앗…… 언제부터?”
“아까 막 물벼락 맞고 난리 났을 때부터, 아니 네가 하트 보석을 만들어 내던 그 순간마다.”
“부끄러운 말 잘한다.”
루시엘이 배시시 웃다가 고백했다.
“나도 그래. 너 입술이 예뻐서 보다가 생각났어.”
“……나야말로. 드레스가 물에 젖었을 때, 인어처럼 너무 아름다웠어. 시작은 엉망진창이었지만 그래도 끝은 너무 좋네. 너이기 때문일 거야.”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트 보석의 이름, 내가 정했어.”
“뭘로?”
“페어리 하트. 요정의 심장이라는 뜻이지.”
“마음에 들어. 페어리 하트.”
루시엘은 키제프를 향해, 웃으며 마음에 물결치는 감정들이 보석으로 만들어지는 걸 지켜보았다.
‘비록 내 페어리 하트는 손톱처럼 작지만,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이 감정들을 전부 합치면 다 사랑일지도 모르겠어.’
그만큼 나는 지금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너와 공유하고 있는 기분인걸. 그렇다면 이건 사랑이라고 믿고 싶어.
바람에 하늘하늘 흩날리는 은발이 루시엘의 뺨을 간지럽혔다. 길게 내려온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루시엘의 것과 겹쳐졌다.
루시엘의 턱을 잡고 키제프가 말했다.
“첫 결혼, 첫 키스, 첫 사랑. 전부 너야. 시작도, 끝도 너일 거야. 네가 나의 전부가 될 거니까. 그러니까 너도 날 가져.”
그의 말이 루시엘의 심장을 더욱 높다랗게 울리게 만들었다.
열다섯 살 생일이 두 달도 남지 않은 사월의 봄날.
루시엘도 사랑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