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200)화 (200/282)

<200화>

“텔레포트.”

쏴아아.

꼼짝없이 맞는 줄 알고 눈을 감았는데 루시엘 대신 물벼락을 맞은 건 키제프였다. 세찬 물줄기가 그의 등을 강타했다.

루시엘이 맞기 직전 키제프가 텔레포트를 외우며, 루시엘을 감싸 안은 터였다.

순간 당황한 키제프가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미안. 미안해”

어느새 분수의 물결이 찰랑찰랑 허리 높이를 넘은 상태였다.

손으로 머리와 얼굴에 흐르는 물줄기를 닦아 내며 키제프가 길잃은 강아지처럼, 눈썹을 늘어뜨렸다.

“……미안해. 이렇게 쎌 줄은.”

“키제프, 나 죽일 셈이야……?”

“미안해. 미안해. ……죽여 줘. 아니 살려 줘. 잘못했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그의 중얼거림이 귀를 채웠다. 하지만 물벼락을 대신 맞아 준 그에게 계속 화를 더 낼 수가 없어졌다.

“바보야, 그리고 그걸 다 맞으면 어떡해? 차라리 실드 마법을 외쳤어야…….”

그러나 찰나의 순간 루시엘도 몸이 굳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젖은 몸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키제프의 몸이 너무 뜨거웠다. 그렇지만 그는 떨고 있었다.

분명히 물을 맞아서 추워 죽겠는데 얼굴에는 열이 잔뜩 오르고, 심장은 두근두근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파아아.

분홍빛의 스피넬과 새빨간 가넷, 선홍빛의 하트 보석까지 한 번에 몇 개가 분수 안으로 퐁당퐁당 떨어졌다.

미친 듯이 내달리는 심장 고동만이 전해져 왔다.

어느새 몸이 겹쳐진 걸 알아채고는 루시엘이 어색하게 뒤로 물러났다. 하얀 셔츠가 물에 젖어서 단단한 몸이 다 드러났다. 촉촉하게 젖은 그의 얼굴과 머리카락, 붉은 입술이 너무 매혹적이었다.

악마와 천사가 공존하는 것처럼.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번 꽃 폭죽이 터지면서 뽀뽀했던 상황이 오버랩 되었다.

엄청 부드럽고 따뜻했는데.

‘아냐. 루시엘. 상상하지 마.’

루시엘의 심장이 쿵쿵 울리면서 또다시 손톱처럼 작은 크기의 하트를 만들었다. 애써 심호흡하고는 바닥에 떨어진 하트를 주우려 찰방거리는 물속으로 몸을 숙였다.

하지만 물에 젖은 드레스 자락이 몸에 감겨서 쉽지 않았다. 루시엘이 손을 뻗기도 전에 키제프가 소매를 걷어 올렸다.

“내가 찾을게. 내 하트니까.”

키제프 역시 귀부터 목까지 빨개진 상태였다.

루시엘이 떨어뜨린 하트 보석은 너무 조그마해서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커다란 스피넬과 가넷은 금방 찾았지만 하트는 없었다. 작아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로 갔지?”

루시엘은 셔츠로 다 비치는 그의 몸을 맨눈으로 보기가 민망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분수가 너무 넓어서 차, 찾기는 힘들 것 같은데. 물 빠진 다음 다시 오자. 응?”

“안 돼. 네 보석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키제프는 셔츠의 단추를 풀더니 훌렁 벗었다. 잘 다져진 가슴이 무척 단단해 보였다.

“……미쳤! 잠깐만 뭐 하려고?”

루시엘이 양쪽 눈을 얼른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진홍빛 눈동자에 커다랗게 파문이 일어났다.

키제프가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유려하게 헤엄치더니 물속으로 잠수했다.

깊이 가라앉은 아주 작은 하트 보석 두 개가 나란히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얼른 보석을 건져 올리며 키제프가 외쳤다.

“찾았다.”

“앗, 정말?”

루시엘이 눈을 가리는 것도 잊어버린 채 활짝 웃다가, 다시 민망함에 손바닥을 다시 펼쳤다.

“……다 찾았으면 얼른 뭐라도 입어 봐.”

부끄러워하는 루시엘을 보고 픽 입매를 올린 키제프가 싱그레 웃었다.

“다 젖어서 그냥은 못 입어…….”

한결 촉촉해진 눈을 내리깔며 그가 말했지만 루시엘은 그 요망함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애쓰듯 말했다.

“……그, 그래? 아니, 너 바람 속성이니까 바람 소환해서 말리자.”

“이대로 바람 맞으면 너랑 나 얼어 죽을걸. 네 드레스도 젖었잖아. 둘 다 따뜻해지는 방법을 찾자.”

“어떻게 해, 그럼? 이 꼴로 돌아가면 별궁이 엉망 될 것 같고…… 베시가 기절할지도 몰라. 그리고 또…… 나 너무 창피해.”

“네 아기 영지 별장으로 가서 모닥불 피우자.”

“……그, 래.”

여전히 뻣뻣하게 굳은 채로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엘의 어깨를 감싼 채로, 키제프가 싱그레 웃으며 포탈을 열고는 어기적 움직이는 루시엘을 안아 들었다.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고 순간이동을 마쳤다.

자신은 흠뻑 젖었으면서도 루시엘의 몸부터 닦아 주려던 키제프의 손길이 더 내려오지 못하고 흠칫 굳었다. 조심스레 그가 사과했다.

“……미안.”

목덜미와 어깨만 정성스레 닦아 주더니 그가 담요를 내밀었다.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진 귓불, 진해진 붉은 눈동자,

주춤거리던 키제프도 뻣뻣하게 움직이며 다른 담요를 더 찾아냈다. 그의 너른 등을 힐끔 훔쳐보면서 루시엘은 얼른 담요로 물기를 닦아 냈다.

키제프가 담요를 몸에 두르자, 루시엘은 이제 눈도, 마음도 편해져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혼자서 부지런히 움직이더니 별장 밖에 장작더미를 찾아와 금세 모닥불을 뚝딱뚝딱 만들고 마법으로 불도 붙였다.

화르륵.

키제프가 루시엘의 어깨를 안고는 모닥불 앞에 있는 나무 의자로 데려갔다.

“앉아서 몸 좀 녹이자.”

“……고마워.”

타닥타닥. 노랗게 일렁이는 모닥불에 차가웠던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키제프도 루시엘 옆에 앉았다.

“네 앞에서 자꾸 실수만 하네. 온실 정원에서도 그렇고. 미안해. 장난이 너무 심했어.”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의 얼굴에 루시엘도 화가 풀린 지 오래였다.

“키제프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잖아. 잘못해도 남편인걸. 어쩌겠어. 마음 넓은 내가 용서해 주어야지.”

루시엘이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종알종알 말했다.

“근데 이거…….”

키제프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루시엘의 하트 보석을 꺼냈다.

“이제 계속 만드네?”

“어? 으응. 그러게.”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대답하는 루시엘을 보고, 키제프가 살짝 서운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먼저 물어보지 않으면 너는 영원히 답 안 줄 것 같아.”

어지럽게 일렁이는 저 불처럼, 그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리고 재촉하지 않을 거야. 그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쭉 기다릴 거야.”

다음 순간 들려온 대답에 가장 흔들리는 건 루시엘의 마음이었다.

* * *

사내의 증언에 따라 공작은 자르가, 검은 날개 기사들과 함께 움직였다. 시칠렌으로 향하는 게이트 북쪽에 위치한 폐지하도로 향하는 중이었다.

폐지하도 곳곳에는 수로와 함께 나룻배와 와인 통들이 이리저리 떠다녔다.

“……수상하군.”

“와인 통이 온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뭔가 나올 것 같습니다.”

자르가가 고했지만, 엘링턴이 고개를 저었다.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것 같습니다. 와인 통이 너무 한 방향으로 반듯하게 띄워져 있는 것이 수상합니다.”

“한쪽은 덫인가? 위쪽 먼저 조사하고 아래로 가지.”

“예.”

마도사가 물체에 부유 마법을 걸어, 안쪽으로 보냈다.

차캉! 그러자 천장에 있던 날카로운 창들이 일제히 내려왔다.

엘링턴의 말이 맞았다.

와인통의 반대로 다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자, 어두침침하고 널따란 공간이 나왔다.

더 깊은 지하로 가는 수로가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자, 커다랗고 넓은 터가 나왔다.

그리고 층층마다 이동포탈이 바닥에 여러 개 자리하고 있었다.

전부 합치면 수십 개도 넘을 듯한 어마어마한 양의 이동포탈이었다. 웬만한 일에도 놀라지 않는 그지만,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공작이 낮게 명령했다.

“우선 위험하니, 들어가는 건 자제하고 조사부터 하도록.”

마도사들이 마력을 탐지하는 마법과 마도구로 조사를 시작했다.

“마력 수치는 평범합니다.”

공작은 길리아트에게 통신해, 화면으로 비춰 주었다.

“아버지, 이걸 보십시오. 폐지하도에서 이걸 발견했습니다. 희한한 건 마력 수치가 평범합니다.”

―허…… 믿을 수 없군. 저렇게 어마어마한 이동포탈이 그곳에 무더기로 있었다고?

“그동안 어떻게 이렇게 감춰졌던 건지……. 이 정도의 이동포탈을 생성할 정도의 마력을 가진 마도사가 현존합니까?”

―잠깐. 이벨린과 캐서린을 데려와 함께 봐야겠군.

잠시 잠잠하던 통신구에서 이벨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비드, 저건 마도사가 만든 이동포탈이 아닌 것 같구나.

“캐서린은 뭐라고 합니까.”

공작의 물음에 곧 캐서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그 포탈들은 열쇠로 이동할 수 없고 함정일 가능성이 있어서 저희도 다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각 층마다 첫 번째 포탈은 황도를 비롯해 여러 도시의 시내로 통하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발루크 상단이 그곳을 통해, 물자를 나른다는 정보가 있었습니다. 다른 포탈은 절대 이용하지 말라는 방침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군. 어쨌든 무척이나 유용한 시설임은 확실하군.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게 분명하지만 그럴 만한 힘을 가진 자가 누군지는 도통 모르겠고.”

―예. 우선은 사내가 말한 포탈만 이용하시는 게 안전하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선은 저 포탈을 확인하고 돌아가서 의논하도록 하지.”

이 많은 포탈 중에 사내가 말했던 위치는, 가장 안쪽의 3-4였다. 그자의 머릿속 기억에서 뽑아낸 정보에서도 그것 외에 그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일단은 3-4 포탈을 이용해 보도록 하지.”

그러자 자르가가 먼저 나섰다.

“각하, 위험합니다. 제가 먼저 가서 보고 통신을 하겠습니다.”

“……괜찮다. 대비는 충분히 되어있다. 무엇보다 자네가 위험해질 정도라면, 이것들은 파괴해야 마땅해.”

붉은 눈이 서늘하게 빛나며 말하자 자르가도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예.”

“나와 자르가가 먼저 이동하고 나머지는 절반만 따라온다.”

공작이 그리 명하고 자르가와 함께 스스럼없이 삼 층으로 내려가 네 번째 포탈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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