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달칵.
찻잔을 내려놓은 클로디아는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사람처럼, 흠칫 몸이 굳었다.
가을날 햇빛을 받아 잘 자란 밀밭처럼 금빛이 도는 연갈색 머리카락이 허리에서 굽실거렸다.
열여섯 소녀에서 오 년이 지나 그녀는 이제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기는 어른이 되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어머니?”
“일정이 당겨져 레이놀드가 두 달 내로 돌아올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맞이할 준비는 해야겠지. 황자의 귀환을 비롯해 많은 영식과 영애들의 데뷔탕트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릴 거다.”
그 말을 하는 황후의 표정도 썩 내키지는 않는 얼굴이었다. 클로디아도 마찬가지였다.
“죄를 저지르고 유폐되었다시피 했는데 귀환을 환영하는 자리가 굳이 필요할까요.”
클로디아가 입바른 말을 하자 황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황자의 체면이 곧 황실의 위신 아니더냐. 이건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신 일이야.”
그동안 아주 평화로운 나날이었는데, 레이놀드가 벌써 돌아오다니 시간 한번 빨랐다. 내년에나 오는 줄 알았는데, 두 달이라니 코앞이나 마찬가지였다. 클로디아는 갑자기 조바심을 느꼈다.
“그동안 황위 계승자의 자리가 퍽 오랫동안 비었으니, 레이놀드가 돌아오는 대로 네 아버지께서는 마음을 정하시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구나. 클로디아, 듣고 있니?”
“네, 물론이에요. 그건 기쁜 소식이네요. 저도 황위 계승이 더 미루어지는 걸 원하지 않거든요.”
클로디아가 입매를 굳게 올리며 자신감 있는 어조로 말했다.
레이놀드가 없었던 5년.
클로디아는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
우울증 치료사 양성 사업을 성공리에 마쳤고, 어려운 제국민을 돌보는 자선 행사는 누구보다 발 벗고 나섰다.
제왕학을 비롯해 정치, 지리, 군사, 학문은 두말할 필요 없고 검과 마법도 기본은 익히고 있었다.
그동안 이 나라에 한 번도 존재한 적 없었던 여자 황제를 인정하게 하려면, 남들보다도 제 아버지보다도 더 노력해야 했다.
레이놀드를 지지하는 세력이 절반가량 사라진 지금은 벨슈타인 공작가와 외가를 포함해 슬슬 힘을 보태 주는 세력들이 하나둘 생겼고, 그녀 자체의 능력을 믿고 지지해 주는 대신들도 몇 있었다.
물론 아직도 가르솔 후작이나 데이븐 백작 같은 황자 지지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예전보다 꼬리를 많이 내린 상태였다.
가장 중요한 아버지, 노이슈반 황제의 마음도 제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모든 것이 내게 유리한 상황이긴 하지만 확실하게 쐐기를 박을 만큼 인상적인 무언가가 필요한데……. 좋은 생각이 없을까. 루시엘이라면 영감을 줄 것 같은데.’
루시엘이 지난번 황도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전해 듣기만 해서 무척 아쉬웠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본 것이 삼 년 전 클로디아의 탄신 연회였으니, 정말 오래되긴 했다.
“클로디아, 어미를 두고 그리 혼자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 있느냐?”
“아…… 공자비 생각을 잠시 하느라. 죄송해요, 어머니.”
“공자비라면 나도 보고 싶구나. 문학 살롱을 빛나게 해 주었던 그 아이……. 이제 두 번 다시 그렇게 인상 깊은 문학 살롱은 없겠지.”
“루시엘이 그 소식을 들으면, 아쉬워하겠어요. 자신 때문에 문학 살롱이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니.”
“하지만 어쩔 수 없잖니. 그다음부턴 루시엘보다 잘 해낼 자신이 없는 가문들이 전부 기권을 내 버렸으니 말이다.”
황후는 그리 말하면서도 아쉽지는 않은 지 웃어넘겼다.
“문학 살롱 대신 다른 연회를 여시면 되잖아요.”
클로디아의 말에 황후가 눈을 반짝 빛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구나. 아 참, 루트리히 공국의 대공자가 모레 입궁한다는구나. 네가 환영 좀 해 주렴.”
“……음. 딱히 반갑지 않은데 제 환영이 필요할까요?”
클로디아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공이 돌아가면서 대공자를 몇 번이나 부탁하고 갔으니 기본적인 손님 대우는 해 주어야지. 그게 다 외교란다, 아가. 이 기회에 디트리히 공국과도 좋은 인연을 쌓아 두고.”
공국은 천공 기사단이라는 막강한 군사와 하늘을 나는 배를 만드는 기술 및 하늘 항해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방심할 수 없는 나라였다.
대륙의 날개, 신성 지구 아스트리야보다도 더 높고 자유롭게 하늘을 누비는 천공선이 있으니 그 군사적 가치는 상당했다.
“네, 이미 우호국이지만 조금 더 노력해 보도록 할게요. 대공자가 그렇게나 바람둥이라고 하던데 여자라도 소개시켜 주어야 할까요?”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구나.”
황후가 소리 내어 웃었다.
* * *
“오, 소공작님과 아가 마님 아니십니까. 어디 가시는 길이십니까?”
“잠시 산책을 가는 길입니다. 베르가 자작.”
나란히 뛰어가던 두 사람을 보며 문득 베르가 자작이 반갑게 인사했다.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나날이 성장해 가는 모습에 미래가 기대됩니다. 아 참, 다음 정무 회의의 안건은 서기관을 통해 전달해 놓겠습니다. 소공작님.”
“예, 면밀히 살펴보고 준비해 들어가겠습니다.”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시지요.”
베르가 자작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흐뭇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를 올리고 사라졌다.
연푸른 하늘은 해가 지면서 점점 분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뺨에 달라붙는 공기마저 달콤한 저녁. 산들거리는 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금발은 주홍빛을 군데군데 머금어 더욱 찬란했다.
곧고 가지런한 이목구비, 깊게 팬 붉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발목에 찰랑거리는 분숫가의 물처럼 마음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분수대에 나란히 걸터앉아서 노을을 보고 있었다.
실컷 물장난을 치려고 왔는데 어쩐지 자꾸 어색하고 쑥스러운 기분에 되레 평소보다 얌전해졌다.
어쩌면 지금 입고 있는 이 화려한 드레스 때문일지도 몰랐다. 고작 분수를 구경하러 가는데 혼자 신나서 무도회에 갈 법한 드레스를 입었다는 게 갑자기 조금 창피해져서 뺨에 열이 올랐다.
힐끗 바라본 키제프는 그저 하얗고 단정한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었다.
‘나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걸까?’
루시엘은 왠지 자신이 조금 작아지는 기분에 그저 쏟아지는 분수만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시원스레 떨어지는 물줄기에 기분은 여전히 신나고 두근거렸지만 오늘따라 키제프도 유난히 말이 없어서 어색함은 극에 달했다.
“루시엘.”
키제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갸웃하며 그녀를 불렀다.
“응?”
“분수 보고 기분 좋아서 신나게 놀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얌전해. 너답지 않게.”
그리 말하면서 휘어지는 그의 눈매에 루시엘은 다시 또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 오늘 왜 이러지. 이게 다 에리카 언니가 놀려서 그런 걸 거야.’
루시엘은 왠지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 글쎄 목이 말라서 그런가?”
“목말라?”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키제프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초록빛 이동 포탈을 만들고는 슥 말도 없이 사라졌다.
“어, 어디 가?”
곧 이동 반지에서 빛이 나더니 키제프가 시원한 오렌지 에이드를 두 잔 가지고 환하게 웃으며 나타났다.
“엇, 내가 목마르다고 해서 다녀온 거야? 고마워.”
“응. 얼른 마셔.”
키제프가 루시엘에게 에이드 잔 속에 담긴 빨대를 내밀었다. 그가 가져다주어서 그런가.
“시원하다.”
루시엘이 보조개가 폭 패도록 웃었다. 지켜보던 키제프가 루시엘의 말랑한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이 복숭아 어쩔 거야.”
“……?”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을 마구 보내도 루시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댕구르르 굴리고 있었다.
“귀여워서 한 입 깨물고 싶다고, 네 볼.”
“뭐야, 나 이제 아기 아니거든?”
루시엘은 아직도 자기를 귀엽게만 보는 것 같아서 발끈해졌다.
“그래, 혼자만 어른이 되었다 이거지?”
지난번에 키제프에게 체스를 배우면서도 단 한 수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똑똑한 그에게 반하는 한편 왠지 모를 질투도 났다.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았으니까 어른 아니야. 그리고 빠르면 이번 주부터는 가주 대리 업무를 바로 시작하게 될 것 같아. 정무 회의도 참석하고, 영지 시찰도 나 혼자 다녀올 거고. 당분간 좀 바쁠지도 몰라.”
“멋지다. 키제프 생일은 겨울이라 아직 한참 남았지만 지나면 진짜 성인이겠구나.”
그러고 보니 아까 베르가 자작이 키제프에게 소공작이라고 지칭하며 전보다 더 존중하는 말투를 쓰고 있었다.
‘키제프는 진짜 어른이 되어서 저만치 성큼 앞서나가고 있어. 나도 따라가고 싶어.’
나중에 정말로 키제프와 결혼하려면, 나도 그의 옆자리에 걸맞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도 모르게 그만, 그와의 결혼을 단정 지어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한 루시엘의 눈이 깊어졌다.
덕분에 심장도 쿵쿵 뛰었다.
“루시엘, 오늘따라 생각이 많아 보이네?”
키제프가 루시엘의 코를 장난치듯 톡 건드렸다. 계속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그에게 왠지 심술이 나서 루시엘이 말했다.
“분수를 즐기는 방법에는 그냥 조용히 구경하는 것도 있는 거야. 그게 조금 더 어른스러우니까.”
“아까 물 보자마자 강아지처럼 달려갈 땐 언제고?”
“그…… 그건. 설레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지.”
루시엘이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지금도 뺨에 와 닿는 물방울 덕분에 기분이 상쾌했다. 루시엘의 머리 위로 키제프의 손길이 쓰다듬었다.
“그래, 난 네가 그러길 바랐어. 같이 신나게 놀려고 왔는데 너무 얌전해.”
“그러면 너부터 신나게 놀면 되잖아.”
루시엘이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키제프가 씩 웃었다.
“너무 예쁘게 입어서 물장난도 막 못 치겠다. 옷 버릴까 봐서.”
“아, 아냐. 세탁 마법도 있는걸.”
“진짜?”
키제프가 입꼬릴 올리더니 짓궂게 웃으며, 루시엘에게 분수의 물을 튀겼다.
덕분에 루시엘의 얼굴과 옷에 후두둑 물이 떨어져 젖어 들었다.
“꺅, 아니, 너무 제대로 공격이잖아? 가만 안 둬.”
루시엘도 키제프를 올려다보면서 질 수 없다는 듯이, 물을 커다랗게 튀겼다.
그러나 물줄기를 피한 키제프가 더 큰 복수를 했다.
사아아.
콸콸콸!
바람 마법으로 물줄기를 조종해서, 루시엘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물벼락이 떨어졌다.
“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