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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98)화 (198/282)

<198화>

꽉 막힌 프리다 박사보다는 발루크 상단주인 크루거 백작이 자신과 더 잘 맞는 성격인 것 같다고 페넬로페는 생각했다.

그는 화술이 뛰어났고, 또 제법 제 기분을 잘 맞춰 줄 줄 아는 신사였다.

마침 그의 머리 색은 적갈색이었는데 페넬로페가 만난 붉은 머리의 남자 중에 가장 잘생긴 사람이었다. 머저리 같은 막시무스를 제외하고 말이다.

아니, 이미 막시무스 따위의 얼굴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페넬로페는 카빌 후작가의 가족들 얼굴을 지운 지 오래였으니까.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도 그립지 않았다. 자신에게 남겨 준 것이라고는 패배감밖에 없었다.

하지만 발루크 후작 부인, 아니 카일라는 달랐다. 그녀는 페넬로페를새로 태어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진짜 어머니가 될 사람.

일이 잘되기만 한다면 페넬로페에게 자신의 아들인 레이놀드 황자를 짝지어 주겠다고도 했다.

그는 타이라 제국의 황태자가 되고, 자신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다.

‘만인이 우러러보는 제국 제일의 레이디가 되는 거야. 벨슈타인 공작가의 공자비인 루시엘보다도 더 높은 위치가 되는 거지!’

그 순간만 생각하면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페넬로페는 흥분감을 감추지 못한 채, 설레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그러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베아트리체의 상석에 앉아서 향수를 뿌렸다.

열다섯 살이 되니 확실히 모든 것이 달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조급함에 당장 희생자를 찾았을 텐데 지금은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사냥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까지는 차근차근 준비해야 하는 법이었다.

베아트리체의 직원이 골라 준 파란색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오자 밖에서 크루거 백작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페넬로페 양. 드레스는 마음에 드십니까?”

“네, 예쁘죠? 정말 기분이 최고예요.”

페넬로페가 제자리에서 핑그르 돌아 드레스가 펼쳐지게 만들었다. 반지르르한 얼굴의 크루거 백작이 갸름한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아주 예쁘군요. 페넬로페 양에게 잘 어울립니다. 그럼 가실까요?”

“어디로 갈 건데요?”

“시내의 고급 상점에 다 가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원하는 대로 다 들러 보도록 할까요?”

“진짜요? 제가 값비싼 물건을 고르면 어쩌시려고요?”

“페넬로페 양이 원하신다면야 그 정도는 무리도 아니지요. 어서 쇼핑을 마치고, 저는 시칠렌으로 게이트를 타고 넘어갈 예정입니다. 프리다 박사와는 마차에서 만나시면 되겠습니다.”

“박사님은 재미없어요. 크루거 백작님을 따라갈래요.”

자신을 따라오겠다는 페넬로페의 말에 크루거 백작이 일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미소 지었다.

“이런, 이런. 아직 페넬로페 양에게는 그런 위험천만한 곳을 보여 드릴 수 없지요.”

“아뇨. 저 다 컸어요. 보여 줘요. 그게 무엇이든.”

페넬로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초록 눈을 빛냈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다이아몬드 브로치도 반짝 빛이 났다.

* * *

사내가 실토한 장소는 예상외였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블루 익스큐션인지는 확인이 필요했다.

공작은 자르가를 불렀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고 돌아오겠다. 바로 출발한다.”

코트를 챙겨 입던 공작이 엘링턴과 캐서린에게 재차 말했다.

“위험한 곳이니 루시엘에게는 알리지 마.”

그때 공작의 집무실로 길리아트가 들이닥쳤다.

“루이비드. 다이아몬드의 위치가 다시 잡혔다. 보아하니, 카빌 후작의 딸이 웬 남자 놈과 함께 움직이는 모양이구나.”

“……발루크 후작 부인은 없었습니까?”

“없더군.”

“해당 자료 조사해서 남자의 신원 파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리아트가 가져온 영상구를 보여 주자 캐서린이 한 발 나와 고했다.

“발루크 상단주 크루거 백작입니다. 오래전부터 발루크를 이끌고 있는 젊은 상단주로 발루크 상단을 대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렇군. 자네는 몹시 유용해.”

“과연 테일러의 정보력이 대단하군!”

“아직 감탄하기에는 이르십니다.”

공작에 이어 길리아트도 그녀를 칭찬했다.

“에바에게 자네 방을 마련해 두라고 해야겠군.”

“감사합니다, 각하.”

“아버지와 캐서린은 여기 남아서 카빌 후작의 딸과 발루크 상단주의 행적을 계속 주시해 주십시오.”

“그러마. 루이비드, 몸조심해라. 캐서린, 일단은 나 혼자서 추적은 계속하고 있을 테니 루시엘에게 안심하라고 한번 들러 주게.”

“예.”

* * *

‘루시엘, 잊지 말고 남편이랑 하트 보석 다시 만들면서 그 감정을 다시 정확히 느끼고 소감문을 제출하도록 해. 오늘의 과제야.’

에리카의 마지막 말이 불현듯 떠올라서 루시엘은 얼굴에 또 열이 올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무슨, 에리카 언니. 일부러 나 놀리려고 그런 거겠지?’

루시엘은 별궁 테라스에 앉아서 체스판을 펼쳐 놓고 말을 움직여 보고 있었다. 간밤에 키제프가 알려 주었지만, 그녀에겐 아직 영 어려웠다.

체스 말을 이리저리 놓아 보던 루시엘은 헷갈리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아무 곳에나 내려놓았다.

응접실에서 루시엘이 먹을 간식을 챙겨 주던 베시가 말했다.

“아가 마님, 테일러 캐서린이 찾아왔네요.”

“앗, 캐서린이?”

캐서린은 황도의 타운하우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정갈한 옷차림에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가 마님.”

“캐서린, 벨슈타인에 오셨군요.”

“예, 실은 어제 왔어요. 공작 각하께서 당분간 제가 머물 방을 내어주셨답니다.”

캐서린의 말에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이 그 정도로 호의를 베푸는 걸 보니 그녀가 가져온 정보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아빠 마음에 드는 정보를 가지고 오셨나 보네요.”

“눈치가 빠른 분이군요.”

“저도 당신을 줄곧 기다렸으니까요. 그래, 어떤 정보를 가져오신 건가요?”

한쪽으로 곱게 넘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짝 빗질하며 루시엘이 말했다.

“제가 아는 건 공작 각하께 이미 보고를 전부 드렸습니다. 저는 아가 마님의 단장을 도와드리러 온 거예요. 테일러로서.”

루시엘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이미 중요하고 긴밀한 정보는 전부 전달했다는 뜻일 터였다.

루시엘이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는 정보들이라면, 공작이 따로 호출할 것이다.

아직 아니라면, 공작이 알아보러 움직였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하고 쓸 만한 정보가 있다면, 루시엘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좋아요. 아, 저 부탁이 있어요, 캐서린. 그때 입었던 그 진줏빛 드레스 입혀 주세요.”

루시엘이 혀를 쏙 내밀며 수줍게 웃었다. 복숭아처럼 분홍빛 도는 뺨이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마법 매거진에서 입어 보신 그 예쁜 드레스 말씀인가요.”

“네.”

“좋아요. 이리로 오세요.”

캐서린이 루시엘의 손목을 부드럽게 당겨서는 분홍빛 마법진을 소환해 그 위에 올라가게 했다. 마법 매거진을 펼쳐 놓자 루시엘은 어렵지 않게 그때 그 드레스를 찾아냈다.

반짝이는 펄이 보석보다 영롱한 드레스를 우유처럼 흰 피부에 입혀 놓으니, 몹시 사랑스러웠다.

“머리는 어떻게 할까요?”

“시원하게 올려 주세요.”

“탁월한 선택이에요. 화장은 딱히 필요가 없어 보이지만, 키스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 드려야겠는걸요.”

캐서린이 웃으면서 루시엘의 입술을 앵두처럼 연한 붉은색으로 물들여 주었다.

“혹시 오늘 무슨 날인가요?”

루시엘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 날도 아니지만 이따 분수를 구경하기로 했거든요. 오늘 공작성의 커다란 중앙 분수를 일찍 개방한다고 해요. 캐서린도 구경 가시면 재밌으실 거예요!”

루시엘이 알려 주었지만 캐서린에게는 그런 걸 즐길 낭만은 없는 모양인지, 그녀는 열심히 코디할 생각뿐이었다.

“분수 구경이라. 그럼 신발은 조금 편하게 굽 낮은 펌프스로 신는 게 좋겠는걸요.”

캐서린이 단장을 해 주고 돌아가자마자, 정말 거짓말처럼 키제프가 나타났다.

루시엘을 본 키제프가 순간 숨을 멈춘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루시엘?”

“키제프, 나 어때?”

“하, 예쁘다. 심장 떨어질 만큼 너무 예뻐.”

별을 보듯 루시엘을 한참 그윽하게 바라보던 키제프가 말했다.

“너한테 보여 주고 싶었어. 예쁘단 말 듣고 싶어서.”

수줍게 웃으면서도 솔직하게 고백하는 루시엘이 하얀 히아신스처럼 고왔다.

그야말로 딱 봄과 어울렸다.

여리여리하고 하얀 목덜미에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드레스는 루시엘의 몸을 더 예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 사람 아니지? 사람이라면 이렇게 예쁠 수가 없어.”

“뭐야. 얼른 정원 분수 구경하러 가자. 개방…… 했을까?”

“했을걸.”

‘왜냐면 그거 내가 조금 일찍 개방시켜 달라고 했거든.’

루시엘과 더 오래 있고 싶어서 에바에게 해 둔 부탁이었다. 에바는 웃으면서도 군말 없이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진짜? 예전에는 가뭄 때문에 정원 분수 못 보고 별 보러 갔었잖아.”

“그러게, 거기에서 추억을 만들어서 좋았지.”

천문대에서 하늘을 나는 침대 위에서 별구경을 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맞아. 너무 좋았어.”

루시엘도 그때를 기억하며 입가에 잔 미소를 지었다. 밤하늘의 별, 반짝이는 키제프의 눈동자. 따뜻한 목소리와 바람도, 심장의 두근거림도 전부 아름다웠다.

나중에 그곳에서 듣게 되었던 진심 어린 고백마저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나 버렸다.

열세 살 주제에 제법 진지했던 그의 고백이.

반면에 루시엘은 아무런 확답도 줄 수 없었던 어설픈 마음이었다.

그런데도 키제프는 이렇게 오랫동안, 자신을 기다려 주고 있구나. 그의 배려 깊은 마음이 다시금 와닿았다.

루시엘이 좋아한다는 말은 했지만, 여전히 그 말에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두 사람은 계약 결혼 중인 상태였다.

‘8년 뒤, 그때는 이렇게 하면 되겠군.’

‘나와 다시 또 결혼해 줘.’

루시엘은 애써 다시 또 모른 척했다. 키제프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잖아.

‘굳이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낼 필요는 없어.’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젓고 있을 때였다. 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간격이 점차 가까워졌다.

어느새 저만치 앞에서 정원의 커다란 분수가 콸콸콸 솟구치는 모습이 보였다.

“우와!”

아이처럼 환하게 웃음 지으며 루시엘이 분수를 향해 달리려는데, 키제프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같이 가자, 루시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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