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97)화 (197/282)

<197화>

키제프가 후계자 수업을 받으러 간 사이, 루시엘은 기사들을 대동한 채 아기 영지로 급히 이동했다.

에리카가 방문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곧장 아기 영지의 과일나무를 배경으로 야외 테이블이 꾸며졌고 달콤한 디저트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햄스터처럼 두 볼 가득히 딸기 타르트를 넣고 오물거리는 두 레이디를 노아가 멀리서 신기한 양 바라보았다.

“역시 시내의 맛집을 다 돌아다녀도 이 집 주방장님 솜씨가 최고야. 루시엘은 좋겠다.”

“맞아. 마탑에서 지낼 때 젤 힘들었던 게 그녀가 만든 요리를 먹을 수 없는 거였어.”

“길들여졌구나, 루시엘. 그나저나 얼굴이 꽃처럼 폈잖아. 벨슈타인 공자께서 귀환해서 그런가?”

에리카의 눈에도 그게 티가 나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부끄럽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런가?”

때마침 루시엘의 통신구가 반짝이며 신호가 왔다. 열어 보니 키제프의 잘생긴 얼굴이 슥 떠서 루시엘은 깜짝 놀라 볼이 붉어졌다.

살짝 넘긴 금발이 이마를 드러내 왠지 더 멋있는 것 같았다.

“키제프, 무슨 일이야?”

“잠깐 쉬는 시간에 해 봤어. 연결이 잘 되나 궁금해서.”

키제프의 반듯하게 그린 듯한 눈매가 곱게 접혔다.

연결이 잘 되는지는 벌써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제대로 안 될 리가 없잖아.

“난 에리카와 티타임 갖는 중이야.”

“그럼 나와는 저녁을 먹으면 되겠다. 수업 끝나고 그리로 데리러 갈게.”

“알겠어, 이따 봐.”

퍽 달콤해진 얼굴로 통신을 마친 루시엘을 보며 에리카가 흐물흐물해진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머…… 통신구 제작자로서 아주 뿌듯한 순간이네. 두 사람 아주 그냥 양봉장 차린 줄 알았어. 봄이다, 봄이야!”

에리카가 쿡쿡 웃으며 놀리듯 하는 말에 루시엘이 말했다.

“그만 놀려, 에리카 언니. 참, 다 먹었으면 우리 보석 연구에 대해 이야기 하자.”

“좋아. 뭔가 알아낸 게 있니?”

“물론이야. 엄청난 가능성이 열려 있어.”

루시엘은 눈에 힘을 주고는 비장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얼른 연구실로 자리를 옮겼다.

루시엘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꺼내 놓았다.

“내 핑크 다이아몬드, 한 번도 파괴해 본 적 없었잖아. 이거 한번 부숴 보자. 황도 무기점에 갔다가 힌트를 얻었어, 다이아몬드는 경도가 아주 높은 보석이라는 걸.”

“……호? 하긴 그동안 별짓을 다 했는데, 보석의 힘을 발동시키는 조건을 찾지 못했지.”

“응, 속는 셈 치고 한 번만 부수어 보는 거야.”

루시엘의 말에 에리카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은 핑크 다이아몬드를 측정 도구 위에 올려놓고, 무거운 기계로 힘을 가해 보았다.

파사사!

단단하던 핑크 다이아몬드가 한순간에 조각조각 깨지며, 파편이 이리저리 튀었다.

화아아앗.

그와 동시에 강렬한 힘이 주변으로 퍼지면서 루시엘과 에리카 두 사람을 감쌌다. 본능적으로 두 사람은 서로를 보호하려고 끌어안았다.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고 살짝 눈을 떴을 때였다.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은 연구소가 아니라 다른 곳에 와 있었다.

철썩, 철썩!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와 새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바다 절벽 위에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에리카가 놀라서 중얼거렸다. 루시엘도 믿기지 않았다.

“핑크 다이아몬드의 발동 조건, 역시 파괴가 맞았어. 그리고 지금 이건 핑크 다이아몬드의 효과인 거고. 여기로 이동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걸까. 근데 너무 아름답다.”

시원한 바다 풍경에 루시엘이 순수한 감탄을 자아냈다. 에리카도 그 말에는 동감했다. 두 사람이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쯤, 주변은 다시 원래 있던 연구소 풍경으로 변했다.

아쉬울 정도로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장소가 이동된 게 아니라 핑크 다이아몬드가 잠시 환상을 보여 준 것 같아.”

루시엘의 말에 에리카가 고백했다.

“헛! 업무에 치여서 바다나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을 읽었나 봐.”

“앗, 그랬구나. 신기해……. 어쨌든 핑크 다이아몬드의 힘을 알아내서 다행이야.”

“루시엘이 보여 주는 보석들, 정말 알면 알수록, 신비로운 보석들이구나. 아주 짜릿해!”

에리카의 감탄에 루시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웃었다.

에리카에게 제 비밀을 밝힌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과거였다면 생각지도 못했을 일이었다.

크리스털 페어리의 능력은 꼭꼭 감추기만 했으니까.

‘누구도 믿지 못했어. 하지만 지금은 달라.’

“하긴 우리 루시엘은 살아 있는 전설의 존재, 요정이니까. 마법보다 더 신기하고 소중한 능력이야. 앞으로도 새로운 보석 만들어 줄 거지? 언니는 아직 연구를 멈추고 싶지 않거든!”

“으응? 아, 나 만들었어! 이 가넷이랑 그리고 이 하트 모양 보석도……. 핑크 다이아몬드의 마력 수치랑 우선 가넷부터 연구해 줘.”

“핑크 다이아몬드의 발동 조건은 파괴라서 보석을 몇 개 더 만들어 주면 고맙겠어, 루시엘. 오, 새로운 보석이라 좋아. 다시 연구에 박차를 가해야겠는걸.”

루시엘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가넷과 하트 모양 보석을 꺼내 보여 주었고, 에리카는 진지한 눈으로 보석들을 살피면서 물었다.

“가넷은 어떤 감정으로 만든 거야?”

예전에 밝혔을 때도 루시엘의 비밀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남다른 에리카였다. 그런 점이 오히려 루시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같았다.

에리카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과거였다면 악연으로 만났을 그녀가 지금은 이렇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니 인생은 참으로 신기했다.

‘이렇게 바꿀 수 있었던 것도 에리카와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너무 신기해. 키제프의 말대로 나는 내 운명을 바꾸고 있어.’

“가넷은 무언가를 강렬히 원할 때였던 것 같아. 이를테면 욕심이랄까?”

“욕심이라……. 루시엘에게는 잘 없는 감정이긴 하구나. 무얼 그렇게 원하면서 만들었어?”

에리카가 눈을 빛내며 추궁했고, 루시엘이 그녀를 슬슬 피했다.

“그거까지 자세히 말해야 돼?”

“당연하지, 루시엘. 연구니까 기록에 남겨야 한다구!”

“……키제프가 없을 때 그가 내 곁에 있기를 강렬하게 원했어.”

“그래서 이렇게 시뻘건 욕망을 만든 거구나.”

에리카가 문서에 기록을 남기면서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에리카 언니, 아무리 연구라지만 나 약간 창피한데……!”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나밖에 모르잖니. 자, 그럼 그다음 이 하트 모양 보석은 언제 만든 거야? 자세히 알려 줘. 이게 다 연구 과정이란다.”

하트 모양 보석을 만든 순간을 떠올린 루시엘이 화르륵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를 붕붕 저었다.

분명 키제프를 그리워하던 강한 마음으로 만들어 낸 보석이었다. 그 힘 때문에 지팡이까지 성장시켰던 아주 커다랗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던 감정.

모양부터 대놓고 하트 모양이었다. 보석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아주 특별한 보석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그건 진짜 말 못 해.”

부끄러움은 오로지 루시엘의 몫이었다.

* * *

황금빛의 열쇠를 문 구멍에 넣고 돌린 캐서린은 조금 전까지는 황도였으나 금세 공작성의 정원사 휴게실 문을 열고 나왔다.

테일러만의 특별한 이동 마법은 바로 마법의 키였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이기도 했다. 문과 열쇠 구멍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바로 통할 수 있었다.

“각하, 테일러 캐서린이 공작성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느른하게 기대앉아 있던 공작이 엘링턴의 보고에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안으로 안내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캐서린이 단정한 차림으로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원하시는 답을 가져왔습니다.”

“그건 답을 듣고 결정해야겠지.”

“분명 결과에 만족하시리라 자부합니다.”

자신감 넘치는 캐서린의 태도에 공작이 금빛 눈썹을 까딱 치켜올렸다.

“발루크 후작 부인이 물건을 숨겨 놓은 위치를 아는 자가 있습니다.”

“사실 확인은?”

“직접 하시는 게 좋을 거라 판단해 확보해 놓았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캐서린이 공작에게 황금 열쇠를 들어서 보여 주었다. 그러곤, 집무실의 문손잡이를 바라보며 싱그레 웃었다.

그녀를 따라서 몇 번이나 황금 열쇠로 문을 열고 나가기를 반복했을까.

한 어둑한 지하 창고 같은 방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지저분한 차림의 수염이 난 사내가 의자에 묶여 앉아 있었다.

캐서린이 가느다란 지팡이로 사내의 턱을 치켜들었다.

“알고 있는 것을 순순히 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보다 더 자비가 없는 분이 오셨으니까.”

캐서린의 협박에도 사내는 입을 꾹 다문 채 모르쇠로 일관했다. 공작은 사내에게 슬며시 다가가 물었다.

“말할 기운이 있을 때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나중에는 말하고 싶어서 울게 될지도 모르니까.”

공작의 붉은 눈이 구르며 그의 뒤로 마도사와 엘링턴이 따라 들어왔다. 이내 어두운 방 안에는 드래곤 마나로 피운 향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묻겠다. 헨드릭 황실의 마검, 블루 익스큐션은 지금 어디 있나?”

불안한 눈동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내를 보며 공작이 신호를 주자, 마도사가 다가갔다.

이내 숨이 끊어질 듯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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