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꿈 아니었네.”
눈을 떴을 때 루시엘이 보인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키제프는 몇 번이고 확인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제프가 그녀의 침대에서 잠들어 버려서 루시엘은 소파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자그만 몸을 옹송그린 채, 토끼를 품에 안고 자고 있었다.
미안함에 얼른 몸을 일으킨 키제프가 루시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깨웠다.
“루시엘, 미안해. 침대에서 편하게 자.”
부스스 눈을 뜬 루시엘은 잠이 덜 깼는지 다시 스르륵 감았다. 잠에 취한 모습마저도 귀여워서 키제프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품에서 토끼를 빼내 바구니 안으로 놓은 다음, 루시엘을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겨 주었다.
부드럽고 작은 몸이지만, 어린 시절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여리하게 드러난 몸의 실루엣도 쭉 뻗은 팔다리도 이제 더는 아이가 아닌 소녀의 것이었다. 키제프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 숨을 죽였다.
얇은 파자마 차림에 이불도 안 덮고 잔 모양이었다. 감기에 걸린 건 아닐까 걱정이었다.
침대에 옮겨 놓고 자신의 체온이 남은 이불을 목 위까지 꼭꼭 잘 덮어 주었다.
키제프가 인형처럼 긴 은빛 속눈썹 위로 드러난 둥근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간밤에 루시엘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들었던 행복한 기억이 떠올라서 입가에는 자꾸 미소가 머금어졌다.
턱을 괸 채 한참 루시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키제프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루시엘의 머리맡에 못 보던 물건이 하나 있었다. 작은 책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엘링턴이 저걸 사용해 누군가와 대화하는 걸 본 것 같았다.
그제야 그 물건이 뭔지 깨달았다.
통신구. 루시엘의 통신구라니, 남편인 그에게야말로 가장 마나 연결이 필요한 물건이었다.
루시엘이 더 푹 자기를 바라면서, 키제프가 별궁 밖으로 나갔을 때였다.
챈들러와 이네스, 그리고 노아까지 세 명의 기사들이 별궁 앞에 호위를 서고 있었다.
키제프를 본 그들이 인사를 고했다.
“저희 셋이 아가 마님의 호위를 맡고 있습니다.”
“그렇군. 잘 부탁한다.”
기사단의 두 사람과는 안면이 있었지만, 낯선 얼굴 하나가 보였다.
“자네는 처음 보는데.”
“노아 반이라고 합니다. 아직 정식 기사는 아니지만 아가 마님의 호의로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루시엘의 호의라.”
키제프가 그 말에 노아를 다시 한번 살폈다. 자신 또래의 청년이었다. 키도 자신과 엇비슷했고 실력은 모르지만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예사롭지 않았다.
짧게 깎은 머리와 날카로운 인상은 한눈에도 보통의 무던한 검사가 아님을 알게 했다.
‘눈빛이 좋군. 몸도 그렇고…….’
정식 기사도 아닌 자를 루시엘이 호위로 두었다면,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루시엘의 선택을 믿지만 그녀의 호위가 또래의 남자라니 본능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노아라고 했나, 어디 출신이지?”
“고아원 출신입니다.”
노아가 시선을 떨어뜨리며 대답했다. 눈앞의 이 수려하고 아름다운 공자야말로, 그분에게 어울리는 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고귀한 태생의 존재가 제게 약간의 적대감 같은 것을 느낀다는 것도 동시에 알 수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그의 몸에서 은은한 살기 같은 것이 내뿜어지고 있었으므로.
“아가 마님은 상냥한 분이십니다. 기사 자격도 없는 저를 알아보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것뿐입니다. 다른 오해는 하,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노아가 그리 말하며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노아의 이야기를 들은 키제프가 한쪽 입매를 올렸다.
“그렇군.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텐데.”
키제프가 차갑게 돌아섰다. 루시엘은 미래를 알고 있으니, 저자가 필요한 이유가 있겠지.
그럼에도 궁금해졌다. 저자가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한번 겨루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 만큼.
애써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지만, 자꾸만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였다. 기지개를 쭉 켜면서 루시엘이 창문을 활짝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다른 기사들은 잘 듣지 못했지만 노아는 귀를 곤두세우고, 루시엘의 방 창문 쪽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열린 창문으로 루시엘의 모습이 비치자, 순간 키제프는 마음속에서 불길이 확 일어났다.
‘저자가 루시엘을 안 봤으면 좋겠다.’
키제프는 얼른 창문 테라스 쪽으로 달려갔다. 꼭 누구 보란 듯이.
그러고는 루시엘에게 웃음을 베어 물고 인사했다.
“잘 잤어?”
루시엘은 잘 잤는지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혹시 키제프가 나 침대로 옮겨 놨어?”
“편하게 자라고. 어제 나 때문에 제대로 못 잤을 것 아냐. 미안. 불편했지?”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흔들었다.
“아니야. 내 방 소파 제법 푹신하거든. 근데 키제프, 밖에서 뭐 하고 있어?”
“루시엘, 남편 모르게 호위 기사를 셋이나 뒀더라?”
살짝 볼멘 목소리로 키제프가 투덜거렸다.
“아아, 내 기사들 소개시켜 주려고 했는데 시간이 없었네.”
“됐어, 방금 인사했어.”
“편하게 움직이려면 호위 기사가 필요했어.”
“한 명은 정식 기사도 아니던데?”
키제프가 노아를 흘낏 바라보자 루시엘이 말했다.
“아, 노아는 말이지……. 이유가 있어. 나중에 다 이야기해 줄게.”
“노아는 말이지? 지금 남편 앞에서 다른 남자 이름 부르는 거야?”
“아아잇, 그런 게 아니라. 아니, 그럼 이름 말고 뭘 불러?”
“몰라. 부르지 마.”
키제프가 왜인지 모르게 뾰족해진 눈초리가 되어서 루시엘은 영문을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었다.
“키제프. 왜 그래?”
“나만 불렀으면 좋겠어. 나만 예쁜 널 봤으면 좋겠고. 다른 남자가 널 보는 거 굉장히 불쾌해.”
키제프의 솔직한 말에 루시엘은 당황스러웠다.
“노아는 남자가 아니라 내 기사인걸.”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단은 허락하지……. 네 안전을 위한 거니까.”
‘키제프는 질투가 많구나.’
어린애 같은 키제프의 태도에 당황스러웠지만 그 모습조차도 미워할 수 없었다.
“바보야. 내 남편은 너뿐이니까 걱정하지 마.”
루시엘의 미소 한 방에 어느새 그의 얼어붙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옷 갈아입고 나와. 오늘은 식당 가서 같이 밥 먹자. 기다릴게.”
“앗, 나 빠르면 두 시간 정도 걸리는데…….”
“지금도 예뻐. 그냥 가자.”
“이 꼴로 가면 안 돼.”
결국 실랑이 끝에 그냥 별궁에서 베시가 가져다준 식사를 먹게 되었지만, 별궁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키제프가 돌아온 이후부터 루시엘의 낯이 화사하고 생기로 물든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베시도 마음이 흐뭇하고 즐거웠다.
“두 분 오늘도 즐거워 보이셔서 기쁘네요. 도련님, 앞으로도 매일 우리 아가 마님께 웃음을 선물해 주시면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어요.”
루시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베시의 건넨 애정 어린 말에 키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진 만큼 루시엘을 웃게 해 주고 싶어. 아직도 멀었지.”
“도련님께서 곁에 계시기만 하다면, 아가 마님께선 항상 밝게 웃고 계실 거예요. 도련님이 오시기 전과 비교하면 지금 생기가 가득하시거든요.”
베시의 말에 키제프는 기분이 좋아졌다.
* * *
쿠우우웅.
철커덕.
실드 중앙관리실의 마도사들에게 전달된 루시엘의 옵시디언이 장벽의 마지막 봉인석에 함께 들어가 실드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푸른빛이 퍼져 나가면서 검은 장벽 전체를 감싸 안았다. 그 모습을 마도사와 벨슈타인 가족들, 그리고 장벽을 함께 보강한 갈리우스 백작까지 모두가 지켜보았다.
실드의 완성 후 점검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마도사가 다가와 공작에게 고했다.
“문제없습니다. 각하.”
“이로써 검은 장벽의 보강 작업이 완전히 끝났군. 모두 고생 많았다.”
공작은 한층 더 탄탄하게 공작성을 보호하는 검은 장벽을 둘러보며 말했고, 마도사들은 환호했다.
갈리우스 백작에게 다가온 공작이 말했다.
“갈리우스 백작, 그대 덕분에 걸작이 탄생한 것 같군.”
공작의 칭찬에 갈리우스 백작이 수염을 매만지며 답했다.
“이미 걸작을 건드렸으니 완성품도 걸작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걸작을 뛰어넘어 예술이에요, 백작님.”
루시엘이 맑게 웃으면서 말을 보탰다.
“나도 덕분에 즐거운 경험이었다. 내가 완성시킨 장벽이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장벽이라니 기분이 묘하군.”
“벨슈타인 역사서에 백작님 이름이 나올지도 몰라요.”
“그거 영광이군. 다음에도 써먹을 일이 있으면 불러라.”
갈리우스 백작의 말에 공작과 엘링턴이 서로 슥 눈치를 살폈다.
“안 그래도 새로운 사업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습니다. 몇 년 전 매수해 둔 섬이 있는데…….”
세 사람이 일 이야기로 빠져드는 걸 보며 루시엘이 씩 웃었다. 그녀에게 길리아트가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며 살짝 말했다.
옵시디언이 루시엘이 만든 보석이라는 건 대외적으로는 물론 비밀이었다.
“루시엘, 네 보석이 우리 벨슈타인을 돕는구나. 고맙고 장하다.”
“장벽을 보강하는 건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었어요, 할아버지. 저 정말로 뿌듯하고 기뻐요.”
루시엘이 뒤에 서 있는 키제프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가 다가왔고, 자연스레 둘은 장벽을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검은 장벽은 이제 결코 무너지는 일 따위 없을 것처럼 굳건해 보였다.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루시엘, 네가 전생에 보았고, 내가 미래에 보았던 벨슈타인의 장벽이 무너지는 일은 이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네가 해낸 거야. 네가 미래를 바꿨어, 루시엘.”
루시엘도 그를 올려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나 혼자 그렇게 만든 게 아니야. 모두가 함께 힘을 모아서 미래를 바꾼 거야.”
“그래, 우리가 바꾼 거야. 앞으로도 어떤 일이 닥쳐오더라도 우리가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응. 너와 함께라면 문제없어.”
장벽을 타고 올라오던 세찬 바람도 여기에 닿으면 실바람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