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그날 저녁 키제프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로 가족들이 모두 모여 화려한 만찬을 가졌다.
키제프의 시련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벨린이 재차 칭찬하면서 그에게 고기를 덜어 주었다.
“이번 키제프의 시련은 역대 가장 어려운 시련이라고 이야길 들었단다. 정말 잘 해내고 돌아왔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키제프.”
“루시엘이 저에게 힘을 주어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키제프는 옆에 앉은 루시엘을 힐끔 보면서 미소 지었다.
“그래, 네가 돌아와서 둘이 함께 있는 걸 보니 이제야 이 할미 마음이 놓이는구나. 솔리아페. 그렇지?”
그간 티는 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마음 졸였을 솔리아페였다. 그녀는 조용히 가슴을 내리누르더니 말했다.
“키제프, 이제는 어디 가지 말고 반드시 루시엘과 이 어미 곁을 지켜 주렴.”
“명심할게요, 어머니.”
만찬 자리에서 키제프는 루시엘이 보내 준 마법 검 이터널로 호그누스를 무찌르고, 마지막 시련을 이긴 이야기를 했고 다들 귀 기울여 집중했다.
만찬이 끝난 후 공작은 두 아이를 따로 불렀다.
오 년 만에 만난 아들을 구석구석 눈에 담아 내리는 그의 시선이 짙은 애정을 담았다.
성장해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아이를 보자니 흐뭇한 마음이 차올랐다.
키제프는 이제 어리고 유약한 소년이 아닌 남자의 눈을 하고 있었다.
“반드시 강해져 돌아오리라고 믿었다. 다름 아닌 내 아들이 아니냐.”
“믿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래, 어디 얼마나 강해졌는지 당장 시험이라도 해 보고 싶다만 할 일이 아주 많을 거다.”
공작의 말에 키제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후계자 수업을 재개해야겠군. 가주 대리 업무도 슬슬 배우고 말이다.”
“예, 각오하겠습니다.”
어른스럽고 믿음직해진 키제프를 보면서 루시엘도 그를 응원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있을 때였다.
“루시엘, 너도 같이 배우는 건 어떠냐.”
“저도요?”
루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주의 대리 업무를 배우고, 관여를 허락한다는 건 키제프만큼이나, 루시엘을 믿고 인정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 이미 벨슈타인 내부의 일에 여러 가지 도움도 주고 있으니.”
“그러기엔 저는 많이 부족한 걸요, 아빠.”
루시엘은 기쁘긴 했지만 자신의 자리는 아니란 생각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긴, 너에게 무거운 업무를 지우기도 그렇군. 아니면 공작성의 안살림을 관리하는 법을 배워도 좋고. 예술이든 교양이든 다른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요청해. 너희들을 가르치고 싶어 하는 인재들이 줄을 섰다.”
“네, 고민해 볼게요. 그리고 아빠, 저 옵시디언은 다 모아서 이제 장벽의 실드를 보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잠깐만, 네 보석을 장벽에 사용하는 건가? 그건 네가 고통으로 만드는 보석인데.”
키제프가 걱정스럽게 묻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키제프,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랑 똑같은 포인트에서 화를 내는군. 루시엘이 방법을 찾았다고 하니 가서 쉬거라.”
루시엘이 공작의 뺨에 뽀뽀하고는 키제프와 함께 서재를 나갔다.
뒷짐 지면서 복도를 앞장서서 걸어가던 루시엘이 빙글 뒤를 돌았다.
“그러고 보니 키제프, 네 방도 에바에게 재단장을 해 달라고 요청해야겠어. 예전 침대에서 자려면 완전히 구겨져서 자야 할 거야, 그렇지?”
쉼 없이 재잘대는 루시엘을 내려다보던 키제프가 웃으며 말했다.
“잠은 어떻게 자든 상관없어. 이미 어제 그렇게 잤거든.”
“아! 맞다. 어제 왔었지. 밤새 너무 불편했겠다.”
“괜찮아. 더한 곳에서도 잤으니까.”
키제프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드락카에서 여정을 떠나는 동안 노숙은 기본이고, 돌 위나 나무 위에서 잔 적도 있었다.
그런 키제프에게는 공작성에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최고의 호화를 다시 누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앞에서 움직이고, 말하고 있는 루시엘을 보고 있으니까 그거 하나면 됐다.
키제프는 또다시 루시엘에게 빠져들 것 같아서 머리를 흔들며 아까의 대화를 상기했다.
“그보다 아까 아버지가 방법을 찾았다고 하신 건 무슨 말씀이셔?”
“아아, 그거. 나 꼭 고통을 겪지 않아도 옵시디언을 만드는 방법 알아냈어. 책이나 오페라를 봐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거든.”
“그건 잘됐다.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거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키제프의 붉은 눈이 사뭇 진해졌다.
레이븐이 보여 준 루시엘의 과거 속에서 고통받으면서 힘겹게 보석을 쏟아 내던 루시엘만 생각하면, 온몸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고마워, 키제프. 오니까 좋다.”
“나도 좋다.”
루시엘이 배시시 웃으면서 그의 손을 붙잡은 채 회랑을 춤추듯이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녀의 손에 끌려가던 키제프도 행복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아가 마님. 두 분이 함께 주무실 침대를 준비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습니다. 마님께서 특별히 주문하신 물건이라 며칠 더 걸린다고 하네요.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에바가 바닥에 넓은 매트리스를 설치해 주고 돌아가자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응? 두 분이 함께 주무실, 이라고 했지?”
“어, 분명해.”
키제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엘은 자못 민망함에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때 에바의 이야기를 다 들은 베시가 두 사람을 보며 귀엽다는 듯 말했다.
“두 분이 부부니까 자연스러운 일인 거예요. 푸훗.”
“그, 그런가. 아참, 눈토끼는 어디 갔지? 리아에게 맡겼는데.”
루시엘이 얼른 말을 돌렸다. 베시는 리아에게 아기 눈토끼를 받아 와서는 루시엘의 품에 안겨 주었다.
“자요, 아가 마님이랑 꼭 닮은 토끼예요.”
“고마워, 베시도 그만 잘 자.”
“안녕히 주무세요, 아가 마님. 키제프 도련님.”
루시엘을 꼭 안아 주고 나서 베시가 돌아갔다. 루시엘이 키제프가 데려온 아기 눈토끼를 보드랍게 쓰다듬자, 키제프가 다가왔다.
“잘 길러 줘야 해. 루시엘이 엄마니까.”
“그럼 키제프는 아빠고?”
“당연하지.”
소꿉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토끼의 엄마 아빠라니. 루시엘은 그만 살풋 웃고 말았다.
둘은 그날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 년의 시간 동안 쌓인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려면 고작 하룻밤으로는 부족했다.
도란도란.
루시엘의 목소리가 그에게는 마치 감미로운 음악처럼 들렸다. 고단함에 눈이 감겨 오면서도 키제프가 눈을 비비고는 억지로 정신을 다잡았다.
그러곤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비볐다.
“자야 하는데 자고 싶지가 않네.”
“왜?”
“눈을 감으면 네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서 무서워.”
그동안의 떨어진 시간이 너무도 길었던 탓일까. 그 농담이 지금은 루시엘에게도 무섭게 들렸다.
루시엘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당겼다.
“그럼 내가 자장가 불러서 재워 줄게. 이리 와.”
그러자 키제프가 얌전히 루시엘의 무릎 위로 머리를 누였다. 푹신하고 말랑말랑한 이 기분.
“자장자장 우리 아기.”
가슴팍을 토닥이는 보드라운 손길이 닿으니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키제프가 슬그머니 눈을 뜨자 루시엘이 말했다.
“눈 뜨지 말고 자.”
그러나 키제프는 루시엘의 말을 듣지 않고 그녀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몽글몽글한 따뜻한 기분에 둥실둥실 어디론가 떠내려갈 것 같았다.
어느새 키제프는 행복하게 평온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었다.
루시엘은 곱게 잠든 그를 내려다보면서 결심했다.
‘키제프, 너무 고생 많았어. 이제는 위기가 와도 나 안 무서울 거 같아. 강한 네가 함께 있으니까. 무엇도 우릴 막을 수 없을 거야. 같이 이겨 내자.’
* * *
붉은 마차가 커다란 건물 앞에 멈췄다. 황도에서 제법 떨어진 한산한 곳에 자리한 건물은 스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간밤에 찾아온 손님은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소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당신인가요, 어둠의 인형사 프리다 박사님?”
“……반갑습니다. 당신은 페넬로페 아가씨?”
“네, 맞아요.”
페넬로페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라색의 꽁지머리를 한 남자가 투박한 안경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발루크 후작 부인께 이야기 전해 들었습니다. 곧 아가씨를 돌봐 줄 이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시녀는 몇이나 필요하십니까?”
“두 명이면 되겠어요. 아니다, 세 명이요.”
“알겠습니다.”
페넬로페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서 내부를 살폈다. 복도에는 완성되지 않은 인형의 몸뚱이들이 주르르 석상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이게 다 인형들이구나. 완성된 인형은 어디 있어요?”
페넬로페가 밝게 웃으며 물었지만,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응접실은 여느 집과 다름없이 평범했다.
페넬로페가 소파에 앉아 기다리자, 곧 프리다 박사의 뒤를 따라서 모자를 푹 뒤집어쓴 시녀 둘이 나타났다.
그녀들은 페넬로페 앞으로 와서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
“아가씨를 모시게 되어 기뻐요.”
페넬로페는 시녀들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웃으며 박사를 바라보았다.
“박사님이 만든 인형이에요?”
“예. 마정석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주의하십시오. 필요한 건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가끔 발루크 상단주가 올 거니 그에게 말씀하셔도 좋습니다. 저는 지하 작업실에 주로 있으니, 용건이 있을 때는 제가 올 때까지 기다려 주시죠.”
페넬로페가 시녀들을 빙빙 돌면서 살폈다. 모자를 들어 올리고 자세히 보니, 목각 인형이었다.
“반갑구나. 난 페넬로페야. 너희들은 완벽하네.”
“페넬로페 아가씨.”
“우선 방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인형들이 앞다투어 페넬로페를 모시고 방으로 안내했다. 보라색 벨벳으로 휘감아진 넓고 화려한 방이었다.
옷장에는 옷들이 즐비했고 보석도 가득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이랑은 조금 안 맞는 것 같았다.
‘제물을 꼬시려면 요즘 유행에 맞는 물건들이 필요해. 쇼핑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마침 옷장 안에 금고에는 금화도 쌓여 있었다. 페넬로페는 그제야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친 김에 그를 찾아서 지하까지 내려가 보았다.
인형의 눈을 새기고 있던 박사가 페넬로페를 보자 작업에 방해를 받았다 생각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저기요, 박사님. 저 쇼핑하러 가야 하는데, 목각 인형들이랑 갈 수는 없잖아요.”
“뭐가 필요하십니까.”
“옷들이 다 구닥다리예요. 요즘 애들은 저런 거 안 입는다고요.”
“…….”
잠시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같이 시내에 가시죠. 저도 마정석을 거래하러 가야 합니다.”
그제야 페넬로페가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