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93)화 (193/282)

<193화>

두근두근 심장이 높다랗게 울렸다. 루시엘의 눈동자가 몹시 커다래졌다. 분명 키제프의 필체였다.

‘누군가 친 장난이라면, 메테오를 날려 줄 거야.’

그만큼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녀의 마음을 가지고 고약한 장난을 친다고 해도 루시엘은 우선 믿고 싶었다.

입술을 꼭 깨물며 어수선하게 눈동자를 굴린 루시엘은 안고 있던 토끼를 리아에게 맡기며 말했다.

“잠깐 이 아이 좀 봐줘.”

“네, 어디 다녀오시려고요?”

그녀의 물음을 뒤로한 채 루시엘은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 총총총, 키제프가 준 열매를 심은 온실 정원으로 달려갔다.

둥그런 온실 정원의 숨을 몰아쉰 루시엘은 거의 다 도착해서야 중얼거렸다.

“바보같이, 순간이동을 쓰면 되었는데…….”

정신없이 달려와서 흐트러진 앞머리를 넘긴 루시엘이 온실 정원을 올려다보았다.

정작 도착해서 문을 열려고 하니 왠지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가 없으면 자신은 분명 실망하고 말 테니까…….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설렘을 감추고 정원 안으로 발을 옮겼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별개로 온실 정원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너무나 고요했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이 화사하고 싱그럽게 피어 코를 간질였다.

루시엘은 서둘러 그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속상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루시엘이 외쳤다.

“……키제프. 어디 있어? 정말로 여기 온 거야? 대답해 줘!”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너무해. 거짓말쟁이…….”

어느새 눈물이 고이려고 했지만 애써 참았다. 그럼에도 눈가가 자꾸만 흐려져서 울망해진 얼굴이 되고 말았다. 루시엘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았다.

‘그때 레오니와 열매를 심은 곳은 꽤 안쪽이었어.’

마지막 희망의 빛을 찾듯이, 그렇게 열매를 심은 곳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그 앞에 누군가 우뚝 서 있었다.

하얀 정장을 입은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헤어질 때보다도 훨씬 키가 커졌고 등도 널찍하게 벌어졌다. 너무나도 달라져서 낯설기도 했지만, 그리웠던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

루시엘의 기척을 느낀 키제프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히는 순간, 루시엘은 곧장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키제프도 말없이 루시엘의 허리를 붙잡고 가뿐하게 안아 들었다. 키 차이 때문에 루시엘이 매달리듯 안겨 발이 허공에 뜬 채 그대로 핑글 돌았다.

안도한 탓일까.

“……흑. 흐흑.”

참았던 눈물이 루시엘의 볼을 타고 흘렀다. 키제프의 커다란 손이 가늘게 떨리는 루시엘의 등을 토닥였다.

검지로 눈가를 쓸어 주다 재킷 안에 들어 있던 손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또로롱, 또롱.

끝없이 그녀가 만들어 내는 보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토파즈와 에메랄드, 페리도트, 그리고 스피넬 같은 보석들.

감동과 기쁨, 놀라움, 설렘.

다행히도 긍정적인 감정으로 만들어지는 보석들이었다.

뒤늦게 마음을 진정시킨 루시엘을 눈에 새겨 넣으면서 키제프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매 순간.”

루시엘을 애틋하게 내려다보던 키제프가 이마에 입술을 누르듯 맞대고 나서 귓가에 속삭였다.

“널 보면서도 믿기지 않네. 꿈은…… 아니겠지?”

길게 넘긴 금발 아래 드러난 붉은 눈동자가 한층 진하게 빛나며,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그녀에게 달라붙었다. 재회를 자각하고 나니 순간 몹시 낯설었다.

‘불공평해.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어 버린 거지?’

자신이 알던 그 상큼하고 청량하던 소년은 어디 가고…….

선이 굵어진 몸도 그렇고, 훌쩍 커진 키와 덩치, 낮게 울리는 목소리도 모두 너무 낯설어서 당황스러웠다.

“루시엘, 왜 말이 없지?”

키제프가 다가와 루시엘의 손을 덥석 잡았다.

힘줄이 툭툭 불거진 따뜻한 손, 전에는 본 적 없는 성숙한 눈빛의 남자.

왠지 어색해서 얼굴에 열이 다 오르는 듯했다. 루시엘은 뒤늦게 입술을 열었다.

“키제프…… 나도 보고 싶었어. 그런데 너 왜 이렇게 어른이 됐어? 나 조금 당황스러워.”

루시엘이 뺨을 수줍게 물들였다.

“……그래서 어떤데?”

“부, 불공평하잖아. 나는 아직도 요만한데 혼자서 다른 세상을 살다 온 거 같아. 키 몇이야?”

“음…… 안 재서 모르겠지만 178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이제 겨우 루시엘도 키가 조금 커서 154가 되었다. 그의 어깨 이상으로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렇게 되면 평생 따라잡을 수가 없잖아. 그의 어깨에도 못 미칠 것 같았다. 댕그란 눈으로 루시엘이 말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자랄 수 있어? 나무야?”

“……그건 좀 너무한데. 그래서 싫어?”

“뭐? 아, 아니. 내가 싫고 말고 결정할 일은 아닌걸.”

루시엘이 그렇게 말하자, 키제프의 눈이 뾰족해졌다.

“네 의견이 절대적으로 중요해.”

그리 말하는 키제프의 단정한 이목구비를 보며, 루시엘은 잠시 멍해졌다.

어릴 때도 잘생긴 줄은 알았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성숙하고 나른한 분위기까지 더해졌다.

붉은 눈과 마주칠 때면 목덜미를 붙잡힌 것처럼 심장이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꼼짝 못 하겠어.’

루시엘은 자연스럽게 그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루시엘.”

“……응?”

“왜 자꾸 도망가? 더 가까이 와. 내 옆으로…….”

재회의 순간 한번 안긴 이후로는 루시엘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자꾸 일정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자, 잠깐만. 적응이 조금 필요할 거 같아서 그래.”

“그럼 빨리 적응해.”

“알았어.”

조그맣게 대답하면서 웬일로 손을 먼저 내주는 그녀가 귀여워 키제프가 눈을 곱게 휘었다.

여전히 작고 사랑스러워.

작은 손을 제 양손으로 폭 감싸서 덮어 버렸다. 작은 온기에도 심장이 뛰었다.

“나는 너에게 적응 다 끝냈어.”

“그, 그거야 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잖아!”

루시엘이 불만을 표하자, 그의 눈길이 사뭇 더 달콤해졌다.

어릴 때의 루시엘은 소동물처럼 작고 예뻤지만, 지금은 소녀에서 아가씨로 자라는 것처럼 화사하게 봄이 온 것 같았다.

“달라. 원래도 예쁘지만 이젠 정신 못 차리게 예뻐…….”

“…….”

“나 너만 보고 있잖아.”

찐득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루시엘은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여전하구나, 키제프.”

원래도 키제프는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종종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더 강력해졌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키제프, 근데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드락카에서 이렇게나 빨리?”

“나도 그게 궁금해…….”

“으잉?”

그건 사실이었다. 루시엘이 만들어 낸 스피넬을 보기 전까지는 전혀 짐작조차 못 했으니까.

“마지막 시련을 끝내고, 드락카의 사람들과 드래곤을 타고 마을로 이동 중이었는데, 바람이 내 몸을 감싸더니 여기로 이동됐어. 그게 어젯밤이었고.”

“자, 잠깐만…… 어제 왔던 거였어?”

“응.”

“나 깨우지 그랬어. 밤새 꿈에 시달렸단 말이야. 많이 걱정했어. 네가 다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래도 이렇게 무사해서 다행이야. 지금도 꿈같아.”

“나도 꿈같아.”

“그러고 보니 나 어제 스피넬에 네가 내 앞에 와 달라고 빌었는데 다 없어졌거든……. 스피넬이 내 소원을 이루어 준 걸까?”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사실 이번이 처음 빈 게 아니야. 매일 밤 수도 없이 빌었어. 널 눈앞에 나타나게 해 달라고.”

맑고 투명한 딸기 같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동안 자신을 걱정하면서 마음 아파하고 고생했을 루시엘에게 미안했다.

“널 두고 떠나는 일은 이제 없을 거야. 맹세해.”

“응, 이제 어디 가지 마.”

“너야말로 내 곁에 쭉 있어.”

키제프가 루시엘의 자그만 손에 엮듯이, 자신의 손을 끼워 잡았다. 그러곤 목에 걸고 있던 결혼반지를 풀어서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네가 끼워 줘.”

루시엘이 받아서 그의 길쭉한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반지를 매만지던 키제프가 힐긋 루시엘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루시엘도 반지를 빼놓은 걸 보고는, 그가 물었다.

“루시엘도 반지 뺐어?”

“너도 뺐으니까.”

“나는 늘 간직하고 있었어……!”

“나도야.”

루시엘도 목걸이에 매달린 결혼반지를 보여 주었다.

“아…… 난 또.”

“응?”

“아무것도 아니야.”

자신이 없는 동안 예쁘게 자란 루시엘을 다른 놈이 넘볼까 불안했다.

그게 누구든 절대 내주지 않을 거지만.

“나도 끼워 줘.”

그에게 반지를 주며 루시엘이 손을 펼쳤다. 키제프가 반지를 받아 루시엘의 손가락에 다시 끼워 주었다.

“이러니까 꼭 다시 결혼하는 것 같아.”

키제프가 루시엘의 반지 위로 자신의 것을 겹치자 보석끼리 부딪쳐 맑은 소리가 울렸다.

마음을 아늑하게 채우는 서로의 존재에 둘은 한참 동안 바라만 봐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아깐 경계심 가득해선 맹수를 대하는 연약한 동물처럼 굴더니, 이제는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면 루시엘의 처음 그 경계심이 맞았을지도 모른다.

‘널 보기만 해도 더는 바랄 게 없었는데…….’

자꾸만 바라고 욕심나는 게 많아졌다. 그만큼 떨어져 지냈던 그 시간 동안 그의 감정은 더 커다래졌다.

하지만 조급하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루시엘의 대답, 기다리기로 했었으니까.

만나자마자 이제는 날 좋아하냐고 물어볼 수는 없으니까.

가슴에 토독토독 무언가 자꾸 맺히는 것 같았다.

“근데 키제프…….”

“응?”

“저 열매는 뭐가 들었어?”

“아…… 저건.”

키제프의 얼굴에 낭패감이 서렸다. 저 열매는 사실 드락카에 자생하는 꽃 폭죽이라는 마법 식물이었다.

열매를 가르면, 그 안에서 꽃이 폭죽처럼 흩뿌려져서 분위기를 살려 준다고 쿠란티엘이 주었는데.

루시엘에게 홀려서 열매를 가르는 걸 잊어버렸다. 하지만 아직 늦지 않았다.

“신기한 거 보여 줄까.”

“응. 뭔데?”

“대신 너도 내게 뭐든 하나는 줘야 돼.”

“……뭘 줄까?”

“너를 줘.”

“그건 안 돼…….”

“농담이야. 그건 네 마음이 끌리는 대로.”

그렇게 말한 키제프가 야살스럽게 눈을 휘면서 제 뺨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아는구나, 신기해.’

루시엘은 진심으로 뭘 줘야 하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어쩐지 한참 자란 그의 모습에 자꾸만 심장이 뛰어 쉽지 않았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