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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92)화 (192/282)

<192화>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그는 드락카의 창공을 날고 있었는데, 따스하고 포근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지금 여기로 이동되었다.

어떠한 이동마법이나 이동포탈도 없이.

달콤하고 아늑한 꽃향기가 나는 침실.

캐노피가 달린 침대 아래에는 그토록 그리워하던 은발의 소녀가 색색 옅은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광경에 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

키제프는 너무 놀라 제 볼을 꼬집어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꿈인가? 아니면 내가 미치기라도 한 건가?’

무언가를 너무 미치도록 원하면 환상이나 환각을 보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지만……그러기엔 자신은 말짱한 상태였다.

그도 아니면 빨리 돌아오고 싶은 그의 소망을 누군가 들어준 것일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돌아왔다.

그리웠던 루시엘의 곁으로.

잠을 깨울까 봐 차마 더는 다가가지 못한 채, 그는 그 자리에서 못 박힌 듯 한참 동안 서서 루시엘의 말간 얼굴만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깨워서 품에 꼭 안고 싶었지만, 이대로 잠든 루시엘의 얼굴을 눈으로 덧그려 보는 것도 좋았다.

그랬다.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과분한 일이었다.

아니, 지금은 당장 아파서 드러눕는다고 해도 미친놈처럼 웃을 수 있을 터였다.

기뻐서 막 웃고 싶다가도 눈물이 차올랐다. 어느새 눈가가 붉어졌다.

“보고 싶었어, 루시엘. 죽을 만큼.”

키제프가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호그누스의 피를 뒤집어썼다는 것도 잊은 채, 손을 뻗었다가 거두었다.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넌 모를걸.’

일분일초가 흐르는 것조차 아쉬울 정도로, 키제프는 어두운 방 안에서도 루시엘을 보고 또 보았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은발에 긴 속눈썹과 윤이 나는 매끄러운 코, 발그레한 뺨, 살짝 벌린 붉은 입술은 뭐라고 웅얼대었다.

“우응…….”

그동안 루시엘이 얼마나 변했을지 자기 전마다 떠올려 보곤 했었는데, 그 상상보다 몇천 배는 더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하, 이러면 반칙이잖아.”

키제프가 투정 섞인 말을 한숨 쉬듯 낮게 내뱉었다.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루시엘을 만나는 순간도, 처음 눈이 마주치면 무슨 말을 할지도 몇 번이나 연습했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질 않았다.

쿵쿵, 두근두근.

그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잠결에 뒤척이던 루시엘이 움찔 움직이는 걸 보고는 키제프는 후다닥 커튼 뒤로 몸을 숨겼다.

자신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왜 갑자기 숨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려서 그랬을까.

‘아니, 더 멋진 모습으로 나타나고 싶었으니까.’

몸을 일으킨 루시엘이 피곤함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멍하니 침대 헤드에 기대앉았다.

“아무리 축복의 힘을 가졌어도, 스피넬이 소원을 이루어 줄 리가 없지이. 핏.”

그렇게 아쉬운 양 중얼거린 루시엘이 다시 풀썩 침대로 쓰러졌다. 그러다가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근데 내 스피넬들이 전부 어디로 갔지?”

잠결이라 그런지 고양이 같은 나른하고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루시엘은 다시 스르륵 눈을 감고 잠들었다.

커튼 뒤에서 숨죽인 채 있던 키제프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스피넬에 소원을 빌어? 그건 무슨 이야기지?’

스피넬이라면 분홍빛의 맑은 보석이었다. 루시엘이 자신과 함께 있을 때 부끄러워하면서 만들어 내던 그것. 키제프가 루시엘을 생각할 때마다 매만지던 거였다.

그러고 보니 과거에 루시엘과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유독 자신과 얽힌 것이 많은 보석이었으니까.

‘나 스피넬의 힘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아. 바로 축복이야.’

‘그 누구보다 키제프가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돼.’

‘그렇지만 너랑 있으면 자꾸 이걸 만들게 돼.’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키제프가 고개를 갸웃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축복의 힘을 가진 스피넬, 그리고 소원.

루시엘이 스피넬에 자신을 돌아오게 해 달라고 빌었나?

‘그럼 내가 오게 된 건 루시엘의 보석의 힘 때문일지도 모르겠군. ……고마워, 루시엘.’

키제프는 그제야 진실을 알았다는 듯,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별궁의 욕실로 향한 키제프는 그제야 피와 비로 얼룩진 옷을 벗어 던지고 쏟아지는 물줄기에 몸을 씻었다.

쏴아아.

단단한 근육이 차오른 몸을 타고 물줄기가 흘렀다. 엉망진창이던 얼굴과 몸이 말끔해져 개운했다.

낯빛은 밝아졌지만 그의 얼굴은 왠지 시무룩해졌다.

“봤는데도 또 보고 싶어…….”

그동안 도대체 어떻게 참아 왔을까 싶을 정도로.

설렌다.

도저히 잘 수 없는 밤이었다.

‘내일을 기대해. 루시엘. 날 먼저 불러냈으니까 책임을 져야지.’

키제프의 눈이 붉어졌고, 살짝 깨문 입술은 더욱 붉었다.

* * *

“끄응. 나 씻지도 않고 그냥 자 버렸구나.”

루시엘은 기지개를 켜며 팔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열었다.

지지배배. 창가로 포르르 날아와서 지저귀는 종달새가 귀여웠다. 부엉이 벨은 밤에 자꾸 울어서 온실 정원에 풀어 주었다고 에바에게 전해 들었다.

“봄이구나.”

화창하게 맑은 하늘.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한 꽃나무가 창밖에 보였다. 역시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가지만 빼고 모든 게 완벽한 아침이었다.

루시엘이 멍하니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괜스레 기운이 빠졌다.

간밤에 얼마나 키제프가 무사하길 빌었던지 신전에 가서 기도를 드리는 꿈까지 꾸고 말았다.

‘간절한 기도도, 스피넬도 다 소용없었어.’

눈 뜨자마자 다시 키제프가 걱정되기 시작해서 루시엘은 은빛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혹시 안 좋은 소식을 나에게 알려 줄 수 없어서 일부러 조용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래도 피닉스를 불러내 물어보자.”

루시엘은 혼자서 고개를 붕붕 젓다가 결론 짓고는 지팡이를 소환하려 무심결에 마나를 모았다.

파아아.

“어……?”

마나를 모으자 사라진 줄 알았던 투명 날개가 루시엘의 등에 다시 생겼다.

팔랑, 팔랑.

여전히 그녀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도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날개가 생겨서인지 주변 마나의 흐름을 아주 자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루시엘은 눈을 감고, 날개에 집중해 보았다. 그러자 방 한쪽의 마법 랜턴에 들어 있는 마정석, 별궁에 쳐진 겹겹의 실드까지 느껴졌다.

마치 새로운 감각이 하나 생긴 기분이었다.

‘날개에 이런 힘이 있었다니, 그러면 근처에 강한 마나를 가진 사람이 몸을 숨기고 있어도 알 수 있겠어.’

감탄을 마친 루시엘은 방긋 웃으며 피닉스를 불러냈다.

“피닉스……. 알려 줘요. 키제프는 만났어요?”

침대에 살포시 앉은 피닉스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는 무사해. 네 남편은 정말 강해졌더구나.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았거든. 나에겐 부활의 깃털이 있으니.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다가가서 그녀를 꼭 끌어안은 루시엘이 말했다. 무엇보다 키제프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어 다행이었다.

“고마워요, 피닉스. 보석 얼마든지 줄게요. 키제프에 관련된 일인데, 보석을 흥정하는 건 옳지 않았어요.”

수백 개가 필요하다고 해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었다. 흐려 있던 얼굴이 약간은 밝아졌다.

그런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은 피닉스가 말했다.

“나는 네 권속이 아니냐. 네 소중한 사람의 생사를 두고, 보석을 요구한 건 옳지 않았지. 그는 곧 만날 수 있을 거란다.”

피닉스의 다정한 말에 루시엘은 어느새 가슴이 따스해졌다.

“정말 힘이 됐어요.”

“근데 이 침대, 굉장히 폭신폭신하구나. 여기서 낮잠 자도 될까?”

“응, 물론이에요. 복숭아 주스도 가져다줄게요.”

“그거야 좋지. 근데, 루시엘 그 날개 예쁘구나.”

“아, 여러 일이 있었어요!”

“굳이 설명할 필요 없어. 네 지팡이와 관련된 변화는 나도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아, 그렇구나.”

투명한 날개는 마나를 더 사용하지 않자, 사라졌다.

싱그레 웃는 피닉스를 두고, 루시엘은 응접실에 나가 보았다. 황도에서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인지, 베시 대신에 다른 시녀가 볼을 물들이며 인사했다.

“아가 마님, 모시게 되어 기뻐요. 베시는 오늘 내로 도착할 거예요.”

“반가워. 물 한 잔만 줄래? 아, 복숭아 주스도 부탁해.”

“네.”

루시엘은 자신이 어제 옷차림 그대로 잠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후다닥 욕실로 들어가서 얼른 거울을 봤다.

자느라고 머리는 사자처럼 헝클어져 있었고, 부어서 얼굴도 엉망이었다.

“……이 꼴로는 키제프가 왔다가도 도망갔겠다.”

루시엘은 픽 웃으며, 혼자 샤워를 하고는 새하얀 가운을 입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옷장을 열자 베시가 고생했는지, 잘 다려진 옷들이 주르륵 걸려 있었다.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는 많지만 오늘은 아무 데도 안 가고 집에서 푹 쉴 거니까 편안한 옷이 좋을 것 같았다.

옷을 찾던 손길이 한 드레스에 멈췄다. 그녀의 눈동자처럼 진한 분홍색 원피스였다.

혼자서 낑낑거리면서 원피스를 겨우 입고 있자, 아까 그 시녀가 들어왔다.

“세상에, 아가 마님. 제가 단장을 도와드리겠어요! 미처 살펴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그녀가 적절한 타이밍에 와 주었다.

“아…… 고마워. 등에 단추 좀 채워 줘.”

“네,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오늘은 누굴 만날 것도 아니니까 꾸미지 않아도 되는걸.”

루시엘이 그렇게 생그레 웃고는 대충 하얀색 레이스 리본으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올렸다.

“하지만 아가 마님은 지금도 너무 귀엽고 예쁘신걸요!”

시녀의 말에 루시엘이 볼을 붉혔다.

“고마워,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니?”

“리아라고 해요.”

“그렇구나. 리아도 예뻐.”

“……흑, 감사합니다. 어떤 주인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지 않았어요.”

리아가 감동한 얼굴로 루시엘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랬구나. 그치만 사실인걸.”

루시엘이 방긋 웃고 났을 때였다. 별궁 앞에 있던 호위 기사가 들어와 고했다. 검은 날개 중 한 명이었다.

“아가 마님, 본성에서 이걸 전해드리라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자그만 바구니였다.

“본성에서 누가요?”

“시종이었습니다만, 그도 누군가에게 부탁받았다고 합니다.”

“음, 누구지? 일단 고마워요.”

루시엘은 안에 들어가서 바구니를 얼른 열어 보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바구니 안에는 포실포실 부드러운 털을 가진 토끼가 들어 있었다.

“……토끼?”

길쭉한 새하얀 귀의 끝은 회색 털로 살짝 둘러져 있고, 진홍색 눈망울을 가진 아주 작은 아기 토끼였다.

“눈토끼네요!”

리아가 말했다. 일반 토끼보다도 더 체구가 자그맣고 정말 눈을 뭉쳐놓은 것처럼, 보슬보슬 부드러워 보였다. 루시엘의 진홍빛 눈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너무 예쁘고 귀여워……. 근데 누가 보냈지?”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깜찍한 토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때 바구니 바닥에서 쪽지가 툭 떨어졌다.

「눈토끼 이름은 네가 붙여 줘. 그리고 이 쪽지를 보면, 내가 준 열매를 심은 곳으로 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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