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91)화 (191/282)

<191화>

자신의 지팡이에 이런 공간이 생겨날 줄이야. 신기한 일이었다.

「이 공간을 탐험하고 새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어요.」

지금 나가면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까 기왕이면 뭐라도 하나 얻고 가는 게 이득일 터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이곳을 천천히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루시엘은 피닉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가져다줄 키제프의 소식 때문이었다.

게다가 류프델의 집 안에서 갑작스레 이동했으니, 할아버지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나가기 전에 우선은 이 성안에 있는 다른 방만 살짝 둘러볼까. 그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루시엘은 그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발걸음을 옮겨 회랑으로 나가 보았다.

투명한 크리스털 바닥 위로 또각거리는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회랑 끝에는 환하게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오르골의 태엽이 저절로 돌아갔고, 그 선율에 맞춰 투명한 날개가 너울대고 있었다.

네 갈래로 나뉜 날개는 나비의 그것과 비슷하면서도 더 얇고, 더 투명하게 빛났다.

‘……무슨 날개일까?’

루시엘이 다가가자 날개는 새처럼 놀란 듯 나폴나폴 날아서 허공 위로 높이 달아나 버렸다.

그때 지팡이가 루시엘을 부르듯, 보석에서 빛이 나며 웅웅거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날개도 내 마나로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루시엘은 물결치던 마나를 이용해 거미줄을 만들었다. 걸려든 날개가 천천히 루시엘의 눈앞으로 내려왔다. 그러곤 루시엘의 주변을 부드럽게 휘돌더니, 뒤쪽에 살짝 자리 잡았다.

루시엘의 등에 달린 날개가 은은하게 빛을 냈다. 신기하지만 루시엘은 뒤를 힐끗 보며, 제 의지대로 날개를 한번 움직여 보았다.

팔랑, 팔랑.

‘그렇담…… 날 수도 있는 거야?’

루시엘은 자못 진지하게 턱을 짚으며 고민하다가 날갯짓을 빠르게 하며 폴짝 뛰어 보았다.

하지만 헛수고였다. 괜히 기운만 빠졌다.

하늘을 나는 용도는 아닌 모양인지, 이내 날개가 사르르 없어져 버렸다. 정확히는 빛이 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신기한 경험이었어.”

루시엘은 침실로 다시 올라갔다. 잠든 일시아의 얼굴을 눈에 담고는 이별을 고했다.

죽은 언니를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구석이 시리고 아팠었다.

‘다음에 다시 올게, 언니. 이렇게라도 만나서 좋았어. 언니를 위해서라도 나는 더 강해질게.’

일시아는 좋은 꿈을 꾸는지 입가에 미소를 띤 채였다. 루시엘은 그녀 곁에 작은 인형 하나를 놓아주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지팡이를 소환해 초록빛의 순간이동 포탈을 열고 나오자, 길리아트와 눈이 마주쳤다.

“루시엘, 얘야. 방금 어디를 다녀온 거냐?”

길리아트가 얼른 다가와 루시엘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할아버지.”

그 역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감쪽같이 사라졌던 루시엘이 세 시간 만에 다시 돌아오긴 했으나, 그 시간이 그에게는 한 달처럼 초조하게 느껴졌다.

루시엘이 사라진 사실을 루이비드를 비롯해 다른 가족들이 알게 되면 난리가 날 것이기에, 조금만 더 기다렸더니 다행히도 돌아와 주었다.

“죄송해요, 할아버지. 하지만 일부러 어딜 간 건 아니었어요.”

“루시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차근차근 말해 보겠니?”

“네…… 저 지팡이가 만들어 낸 차원 공간에 잠시 다녀왔어요. 제 힘이 무기를 성장시켰나 봐요. 류프델은 혹시 알까요?”

루시엘의 이야기를 들은 길리아트도 놀란 얼굴이었다.

“……또다시 지팡이를 성장시켰단 말이냐? 무기를 통해 갈 수 있는 차원 공간이라니, 이런 이야긴 나도 처음 듣는구나. 루시엘. 그에게 물어보자.”

얼마 후, 루시엘이 다시 돌아왔다는 길리아트의 말을 듣고 류프델이 따뜻한 허니티를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왔다.

“제르다는 대장간 앞마당을 구경하러 나갔다. 우리끼리 편하게 이야기해도 된다.”

제르다는 루시엘이 보석을 만드는 요정이라는 걸 모르니, 류프델이 일부러 내보낸 듯했다.

“네, 고마워요.”

“루시엘,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이야기해 보렴.”

“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리곤 처음 키제프를 생각하면서 감정이 깊어져 보석을 만들던 것부터 말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류프델도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힘이 커지면서 마법 지팡이를 또 성장시킨 모양인데, 굉장하군.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야. 제작자로서 아주 뿌듯하구먼!”

“류프델도 잘 몰랐던 거예요?”

“나는 한낱 제작자일 뿐이니까. 무기가 성장하면서 모습이 변형되고, 자아를 가진다는 이야긴 들었다만 무기 안의 차원 공간까지 만들어 내는 건 처음 본다. 게다가 지팡이의 정령이라고? 허허, 요정의 힘은 한계가 없는 것인가.”

류프델은 기가 막히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루시엘이 말했다.

“류프델이라면 무언가 아실 줄 알았는데, 그러면 앞으로 직접 알아내는 수밖에 없나 봐요.”

“한 가지 짐작 가는 것은, 이건 지팡이만의 일이 아니다. 네가 가진 그 특별한 힘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건 확실하다.”

류프델의 진지한 말에 길리아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류프델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마법사라 칭송받는 나조차도, 지팡이를 이만큼 성장시킨 적은 없단다. 루시엘, 이건 너만이 가능한 일인 것 같구나.”

길리아트의 붉은 눈이 따스함을 품으며,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네…… 그러면 더더욱, 알아낼게요. 이 힘이 무엇인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어요.”

호기심과 자신감으로 빛나는 두 눈을 초롱이며 루시엘이 말했다.

“그래, 나도 네가 얼마나 더 성장할지 궁금하구나.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지. 아주 특별한 아이라는 걸 말이다. 내 감이 틀리지 않았어.”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만약 마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팡이가 없었더라면 전혀 몰랐을 거예요. 두 분 감사해요. 그치만 이게 끝이 아니니까, 계속 지켜봐 주세요.”

“나야 보수만 주면 얼마든지 돕지.”

“네 놈은 이 순간까지 보수 타령이로군. 우리 손주 며늘아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렴.”

“네!”

루시엘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지만, 여전히 피닉스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자 속으로는 살짝 불안해졌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길리아트가 루시엘에게 말했다.

“루시엘, 그럼 우리는 그만 돌아가도록 할까.”

“좋아요. 아, 그 전에 류프델에게 한 가지 더 물어볼 것이 있어요.”

루시엘은 문득 발루크와 페넬로페의 행방이 묘연해진 데에 대해서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류프델. 다이아몬드 브로치로도 추적이 불가능한 건, 어떤 경우들이 있을까요?”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크흠. 그건 두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지. 브로치가 파괴되었거나. 이 마계 어딘가에 있거나.”

길리아트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말했다.

“브로치가 파괴된 것은 아니다. 한번 기록이 잡혔으니까. 희한하게 황도의 시내 거리에서 잡혔고 그게 끝이었지.”

“그럼 마계에서 황도의 시내로 단숨에 이동했던 걸까요?”

루시엘의 추측에 류프델이 말했다.

“하지만 곧장 이동하기엔 어려울 걸. 나만큼이나 뛰어난 제작자가 만든 포탈석을 이용하면 몰라도.”

류프델이 말하자, 루시엘이 과거 길리아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할아버지, 벨슈타인에는 마계와 차원이 일부 겹쳐지는 곳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응, 기억하고 있구나. 루시엘.”

“그럼 제국 곳곳에도 마계와 겹쳐지는 곳이 있을까요?”

“……허, 대부분은 황실에서 봉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아! 한 군데 봉인되지 않은 곳이 있군.”

“어디요?”

“오래전 사용했던 폐 지하도가 있을 거다. 과거 전쟁 시에 피난을 위해 만든 것이지.”

“그럼 거기를 조사해 보는 게 좋겠어요.”

“정확한 위치는 모르니 테일러에게 그것도 추가로 의뢰를 해야겠군. 일단 그 문제는 나와 루이비드가 알아보고 있으마. 그리고 루시엘.”

길리아트가 루시엘의 어깨를 짚으며, 걱정 어린 눈길로 말했다.

“갑작스러운 성장도 있었고 푹 쉬는 게 좋겠다. 황도로 가지 말고 곧장 공작성으로 귀환하는 게 좋겠구나. 알았지?”

“네, 그럴게요. 류프델, 제르다를 황도에 데려다주는 건 부탁드려요.”

“건 염려 마라. 꼬맹아, 아프지 말고.”

루시엘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길리아트를 따라서 공작성으로 귀환하는 이동포탈에 올랐다.

“루시엘,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렴.”

친절하게도 길리아트는 루시엘의 별궁까지 직접 데려다주었다.

루시엘은 푹신한 침대로 바로 쓰러졌다.

“너무 긴 하루였어.”

피곤함에 졸음이 몰려온 탓일까. 루시엘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하지만 잠들면서도 걱정스러웠다.

‘피닉스는 왜 오지 않는 것일까?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키제프의 안부를 가져다줄 거야.’

뒤적뒤적.

루시엘은 침대 옆에 던져 놓은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아까 만든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곤 스피넬을 한 움큼 꺼내 만지작거리면서 웅얼웅얼 축복을 빌었다.

“키제프가 무사히…… 제 곁으로 돌아오게 해 주세요. 내일 아침 눈뜨면…… 만나게 해 주세요.”

쉽게 이루어질 리 없는 말들이지만, 마음만은 간절했다.

“으응……. 꼭이요.”

루시엘은 못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금세 색색거리며 잠이 들었다.

루시엘이 모아 놓은 스피넬들이 스르르 분홍색 빛무리를 만들어 내더니, 이내 바람이 되어 창문 틈새로 빠져나갔다.

저 멀리 밤하늘을 건너서.

드래곤의 등에 탄 채 드락카의 창공을 날고 있는 소년이 있는 곳까지 닿은 분홍빛 바람이 그를 어루만지듯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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