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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90)화 (190/282)

<190화>

“……여기 숨어 있었나, 쿡쿡.”

동굴처럼 울려 퍼진 낮은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호그누스는 키제프의 공격으로 바싹 열이 오른 상태였다.

감히 제 살갗을 꿰뚫고 상처가 나게 만든 자는 처음이었다.

암석처럼 단단한 검은 비늘로 뒤덮인 호그누스의 몸체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활화산에 가까웠다.

쿵, 쿵.

둔탁하게 앞발을 내디디며 호그누스가 몸을 움직였다.

수십 개의 뿔이 달린 머리가 스윽 다가오며, 제 발톱보다 가느다란 인간을 향해 화염 브레스를 길게 뿜어냈다.

화아아악!

온통 뜨거운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사방이 불바다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공격을 하기도 전에 불에 타 죽을 것만 같았다.

키제프는 실드를 여러 겹 두른 후, 한 가지 주문을 더 외웠다.

“아이스 아머(ice armor).”

이터널이 빛나면서 그의 몸 주변으로 푸른색이 둘러졌다. 사실 큰 기대를 가진 방어 주문은 아니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화상을 입을 듯한 미친 열기에 숨통이 조여 올 것이 분명한데, 아이스 아머를 두른 순간부터 아까와는 달랐다.

키제프는 용기를 갖고 타오르는 불길을 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뜨겁지 않았다.

덕분에 이제는 자신에게 유리한 환경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키제프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자욱한 냉기가 도는 안개부터 깔았다.

“좋아. 이제 제대로 해 볼 수 있을 것 같군.”

이터널을 바투 쥔 채로 키제프가 호그누스를 노려보았다. 다시금 검과 공명하자, 그의 몸속 마나가 반응해 기포가 터지듯 했다.

두근, 두근.

불길을 아랑곳하지 않게 되니,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타다다!

키제프는 빠르게 호그누스에게 접근했다.

“하아!”

스칵!

냉기를 두른 드래곤 오러가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대로 돌진한 키제프가 반원을 그리듯 검을 휘두르자 일격이 그대로 몸통을 베어 내고, 앞발을 갈랐다.

쑤컹!

―크흐으어어!

뒤늦게 긴 울음을 토하는 호그누스에게 키제프는 재차 얼음 공격을 퍼부었다.

자신이 외우고 있는 얼음 주문은 총동원했다. 얼음 가시가 놈을 가두었고, 두꺼운 드래곤의 발은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발버둥 치던 날갯짓에 폭풍 같은 바람이 밀려들었지만, 텔레포트로 바람을 피한 다음 놈의 몸 위로 올라갔다.

지이잉!

마침내, 차가운 얼음이 광선처럼 길게 뻗어 나가자 맞닿은 호그누스의 몸이 점차 얼어붙기 시작했다.

“……거, 건방진!”

호그누스가 화염 브레스를 뿜으려 입을 벌린 순간.

거대한 머리까지 접근해 올라간 키제프는 아이스 블레이드를 나머지 빈손에 소환했다.

파앗!

빙결의 힘을 지닌 두 개의 검을 동시에 쥔 채 덤벼들었다.

길길이 날뛰며 호그누스가 호령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커윽……!”

찰나의 순간이었다.

번뜩이는 냉기가 실린 검이 거대한 악룡 호그누스의 산 같던 몸을 가르기 시작했다.

“죽어서도 네 놈을 저주할 것이다, 크어어억!”

죽어 가면서도 포효와도 가까운 목소리가 폐성에 메아리처럼 번졌다.

차가운 검은 호그누스의 단단한 살을 가르고, 쿵쿵 뛰는 돌덩이 같은 심장까지도 위력이 끼쳤다.

쿠구구궁!

키제프는 숨을 몰아쉰 채, 아직도 쉼 없이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주저앉았다.

사악한 힘에 사로잡혀 움직이던 호그누스의 몸체가 잿가루처럼 휘날렸다. 이내 허공에서 둥그런 구슬 하나가 천천히 내려왔다.

검은 연기가 일렁이는 구슬에는 사악한 힘이 키제프를 유혹하듯, 붉게 빛났다.

키제프는 본능적으로 저것에 닿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위화감이 들었다.

“타락한 힘에 지배될 거야.”

키제프는 망설임 없이 구슬을 향해 검을 들어 깨 버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불어온 알 수 없는 바람과 함께 천둥과 폭우가 몰아치더니, 검은 화산을 뜨겁게 달구던 용암과 불길을 모조리 꺼 버렸다.

쿠르르릉, 쾅!

쏴아아아.

시원스레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키제프가 중얼거렸다.

“다 끝났어. 이제야 겨우.”

오 년의 시간 동안, 시련을 끝내기 위해서 얼마나 고된 노력을 했던가.

꿈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해서 키제프는 가만 떨어지는 폭우에도 한참 비를 맞은 채 섰다.

벌려진 입안으로 비가 들이치는데도, 키제프는 도리어 시원했다.

이 승리야말로 루시엘이 준 그 무엇보다 커다란 선물이었다.

키제프는 이터널의 검 손잡이에 부착된 드래곤 장식을 쓰다듬었다.

차르륵.

마법이 발동되면서 새하얀 검집이 검 위로 씌워졌다.

이 검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구했다.

폭우에 씻겨 나간 듯, 지난 고난들이 사라지고 이제는 오로지 한 방향만을 생각할 수 있었다.

루시엘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키제프는 어느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쿠란티엘과 사람들을 태운 드래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샤르륵.

희미해진 의식이 또렷해지며 루시엘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햇살이 눈부시게 화창했다.

분홍빛의 꽃나무가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이따금 꽃잎을 떨어뜨렸다.

커다란 꽃나무, 그저 흔한 듯한 나무였지만 루시엘은 왠지 눈에 익었다.

과거 그녀가 처형장에 오르던 그 순간, 꽃잎을 떨구던 그 나무와 닮았다.

‘이상하네. 여긴 어디고, 그 나무는 왜 갑자기…….’

포근한 바람결이 루시엘의 은발을 잔뜩 흔들었고. 덕분에 나뭇가지에서도 꽃잎이 흔들리더니 머리 위로 떨어졌다.

루시엘이 고운 꽃잎 하나를 집어 들며 커다란 나무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나무 뒤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 은발의 소녀였다.

루시엘은 그 얼굴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언니?!”

자신과 똑같은 진홍색의 빛나는 보석안과 은발, 맑고 투명한 피부. 지금의 루시엘과 비슷한 또래의 언니였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루시엘은 가슴이 저며 오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그러나 꿈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게 일시아 언니는, 루시엘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구세요?”

“언니? 날 모르겠어?”

“모르겠어요.”

“나 루시엘이야. 언니의 하나뿐인 동생.”

“루시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멍한 눈빛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이름은 일시아 맞지요?”

“그건 어떻게…….”

일시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그러나 기억을 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꿈속이라도, 환상이라도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좋았으니까.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을 했나 봐요. 우리 언니랑 너무 닮아서요……”

아까보다는 경계하던 기색이 누그러진 듯했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루시엘의 가방 안에 쿠키가 들어 있었다.

“저, 이거 먹어 볼래요?”

루시엘은 일시아에게 조심스레 가방에 든 쿠키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가 쿠키를 받아 들고는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요.”

그렇게 말한 일시아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루시엘도 마주 보며 웃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아요?”

절레절레,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시아는 생전에는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던 아름다운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가 예뻐요. 혹시, 어디에 살아요?”

일시아는 고개를 돌려 저 위쪽을 가리켰다. 그녀가 손짓으로 알려 준 곳에는 놀랍게도 투명하게 빛나는 궁전이 있었다.

무엇으로 만든 것일까 궁금해질 만큼, 투명했다.

“와…… 멋진 성이네요.”

“이노센트 캐슬이라고 해요.”

“이노센트 캐슬?”

루시엘은 어쩐지 그 이름이 친숙했다. 제 지팡이의 이름이 바로 이노센트였으니까.

“나랑 같이 갈래요?”

일시아의 제안에 루시엘은 그녀를 따라나섰다. 가까이에서 보니 왜 그렇게 투명하게 반짝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성은 크리스털, 투명한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성벽도, 지붕도, 바닥도. 심지어 내부에 있는 테이블이나 가구들도 전부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루비로 만들어진 지붕, 사파이어 창문, 옵시디언으로 만들어진 벽난로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토파즈로 이루어진 문을 통과하자, 디잉 하고 지팡이와 마나 페어링을 했을 때처럼 루시엘의 마나와 연결되었다.

그 순간 이노센트 지팡이가 루시엘의 손에 스르륵 생성되었다.

이내 일시아가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당신이 이 성의 진짜 주인이었군요. 누구일까 항상 궁금했어요. 이 성은 저에게 너무나 상냥했으니까요. 공주님처럼 살았어요. 음식도, 드레스도, 장난감도, 전부 마법처럼 다 나타났거든요.”

“……아, 그래서 즐거웠나요?”

“네, 아주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동물들도 가끔 놀러 오고요. 눈토끼도 와요.”

정말 그래 보였다. 일시아는 생전과는 다르게 부족함 없이 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언제나 루시엘은 혼자서 많은 것을 누리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루시엘은 그날 일시아와 함께 보석으로 이루어진 성에서 시간을 더 보냈다.

어느새 밤이 되자, 핑크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 포근한 솜이불을 깔았다. 일시아는 금세 색색거리며 잠들었고, 루시엘은 그녀를 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어떻게 된 것일까? 환상일까? 아니면 꿈? 원래 류프델의 집에 있었는데…… 거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루시엘은 잠든 일시아가 깨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키고는 응접실로 나왔다.

달콤한 분홍색 스피넬 의자에 앉자, 가넷 테이블 위에 하얀 두루마리가 접혀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이걸 왜 아깐 못 봤지?’

루시엘은 서둘러 하얀색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러자 푸른색의 글씨가 한 자 한 자 종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루시엘 님.

저는 지팡이에 깃든 정령이에요.

스스로의 힘을 성장시켜 이노센트 지팡이에 특별한 차원 공간이 생성되었답니다.

지팡이는 루시엘 님의 마나와 공명해, 무의식 속에 잠재된 공간을 제공합니다. 만나는 풍경, 물건, 사람, 동물은 모두 루시엘 님의 무의식에 따르게 될 거예요. 이 공간을 탐험하고 새로운 힘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이 공간에서 나가기를 원한다면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세요.

이 공간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추가 성장이 필요합니다.

언젠가는 저와도 만나게 될 거예요. 기다릴게요.」

루시엘이 손가락을 잘근 깨물면서 오기 전의 상황을 회상했다.

키제프를 그리워하면서 심장이 아프도록 보석을 쏟아 냈고, 처음 보는 보석을 만들어 냈다.

하트 모양의 선홍빛 보석.

‘그래서 보석의 힘이 더 성장했던 거고, 나와 연결된 이노센트까지 강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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