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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89)화 (189/282)

<189화>

요 며칠 마나 영양제를 챙겨 먹지 않아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유난히 마나도 불안정하게 일렁거렸다.

온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아서 루시엘은 잠시 그대로 주저앉으며 검으로 시선을 주었다.

“어서 보내야 하는데. 늦지 않게…….”

루시엘은 지팡이를 사용해, 피닉스를 불렀다. 주변이 금빛으로 환해지며, 불꽃이 타오르는 숄을 두른 피닉스가 인간체 모습으로 나타났다.

“피닉스, 이 검을 키제프에게 전해 주세요. 다녀와서 꼭 그가 무사한지 알려 주시고요.”

“그래, 알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전할 말은?”

“이제 그만 내 앞에 어서 와 달라고 전해 주세요…….”

루시엘의 은빛 속눈썹이 가냘프게 파르르 떨렸다. 힘겨운 감정들을 느껴서일까. 억지로 몸에 힘을 주고 버텨 앉은 그녀를 보며 피닉스가 말했다.

“곧 그렇게 될 거란다.”

피닉스는 이내 핑그르, 돌아서 황금빛 작은 불꽃을 남기고는 사라졌다.

검을 보냈는데도 아직 심장을 가득 채운 감정들이 쉬이 가시지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진하고 커지는 것만 같았다.

슬픔, 그리움, 열망.

주체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이 심장을 두드렸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감정이 가슴을 몇 번이나 헤집어 놓았다.

진홍빛 보석안은 알 수 없는 감정으로 채워진 눈물이 고여 들었다.

그리움은 둘째 치고 이제는 그가 무사한 건지, 그거라도 알고 싶었다.

다른 일을 열심히 분주하게 해 보았지만, 여전히 그녀의 감각은 그를 향해 뻗어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떨어져 있는 날이 길어질수록.

‘키제프, 이렇게 멀리 떨어지게 된 다음에야 난 이제야 깨닫는 걸까?’

그의 마음을 정확히 모르기도 했지만, 살짝 눈치를 챌 것 같으면 루시엘은 애써 모른척했다.

외면하고 도망갔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계약은 이제 상관없어. 루시엘, 너는 이미 내 신부야.’

‘내게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해? 소용없어.’

‘나와 다시 또 결혼해 줘.’

‘네 마음이 나와 같아지길 기다릴게.’

눈을 감으면 그의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빛나는 금발에 붉게 물든 눈도,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예쁜 미소도.

그 다정한 목소리도, 저를 붙잡아 주는 따스한 손의 온기도.

오롯이 자신을 향해 고정되어 있는 진심 어린 눈빛도 너무나 소중했다는 걸.

‘……다시 만나면 나도 너를 같은 눈으로 볼 수 있을까. 그때의 나는 잘 몰랐어. 그런 감정은 처음 느꼈으니까.’

키제프를 마주했을 때처럼, 그녀를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스피넬이 생성되며 툭툭 바닥에 떨어졌다.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보석을 멍하니 보고 있던 루시엘은 심장이 콱 조이며, 뻐근하게 아픈 걸 느꼈다.

“……읏, 갑자기 왜…….”

루시엘은 입술을 꼭 깨물고는 저릿한 고통을 참아 냈다.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루시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느새 수북하게 쌓인 보석들이 아롱져 아름다운 빛무리를 만들어 냈다.

‘키제프에 대한 감정으로 이걸 다 만든 거라고?’

그만큼 커다란 감정일까……?

루시엘이 자각한 그 순간.

파아아앗!

또르르.

그녀의 심장으로 동그랗게 물결치며 마나가 쉼 없이 모여들었다. 그 마나의 바다에 푹 잠긴 것 같았다.

이내 루시엘의 커다란 마나가 파동을 만들어 내며 작디작은 보석을 만들었다.

루시엘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선홍빛을 중심으로 무지개 빛을 흩뿌리는 그 보석은 처음 보는 모양새였다.

“……심장을 닮은 하트.”

모양도, 빛깔도 어떤 보석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양쪽은 둥글게 시작해 만나는 지점은 뾰족한 영롱하고 자그만 보석이었다.

그걸 자세히 살펴볼 겨를도 없이 순간 텅 하고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바닥에 떨어진 이노센트 지팡이가 무지갯빛으로 빛나면서 주변을 감쌌다. 루시엘도 그 빛에 스륵, 스며들었다.

화아아아!

빛이 점점 환해져 몸을 뒤덮을 때쯤, 보석과 함께 루시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 *

호그누스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였다. 검은 산의 꼭대기에 있는 폐성은 지난 전투로 인해 여기저기 벽이 허물어지고, 화염이 튀어 불타오르고 있었다.

키제프는 가쁜 호흡을 몰아쉬며, 무너진 성벽 뒤에 잠시 숨어 숨을 골랐다.

재를 뒤집어쓴 터라 얼굴도, 옷도 엉망이었다.

영리하고 사악한 마룡 호그누스는 화염 속성을 가진 드래곤이었다. 놈의 브레스를 피해 뒹굴다가 찢겨진 상처가 아려 왔다.

우선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필요했다. 키제프는 아공간 포켓을 열어 물약을 찾다가 다 써 버렸다는 걸 기억하곤 머뭇거리다 다른 걸 꺼냈다.

아껴 두었던 루시엘의 다이아몬드. 소량으로 담아 놓은 성수 병도 함께였다.

아깝긴 하지만 루시엘이 곁에 있었다면, 다치는 게 더 싫다고 잔소리를 했을 것 같았다.

키제프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렸다가도 미소를 지으며 다이아몬드에 성수를 부었다.

화아아,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상처에 대자 금세 아물면서 회복되기 시작했다.

‘진작 쓸 걸 그랬군.’

“무기로 쓸 만한 걸 찾아봐야겠어.”

종전 습격에서 호그누스의 날갯죽지에 검을 찔러 넣다가 그만 검이 부러지고 말았다. 챙겨 온 다른 무기도 놈의 이빨에 씹혀 버렸고, 창도 아까 던져서 복부를 스쳤다.

분명 어딘가에서 나뒹굴고 있을 듯한데.

키제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때였다. 포켓 안쪽에서 금빛이 살짝 돌기 시작했다.

“뭐지?”

루시엘이 준 붉은색 장미였다.

피닉스의 장미.

이걸 만지고 있으면 피곤함이 가시고 기운이 솟아났다. 그러나 즉각적인 상처를 낫게 하는 데에는 다이아몬드의 힘이 더 강한 듯했다.

스르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피닉스의 장미에서 금가루가 쏟아지더니, 순간 주변이 환해졌다.

사아아.

붉게 타오르는 주홍빛 머리, 금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나타나 말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 꽤 사나워 보였다.

“……너는, 콜록. 너도 드래곤의 마나를 가진 모양이구나.”

“……누구냐.”

키제프가 곧장 드래곤 마나를 끌어모아 마법을 날리려하자 그녀가 제지했다.

“멈춰. 나는 루시엘의 부탁으로 온 것이다.”

키제프는 그 이름을 듣자 순간 멍해졌다. 잘못 들은 건가 싶어서.

“루시엘이라고?”

“그래, 나는 그 애가 부활시킨 피닉스고 말이지.”

“피닉스! 그…… 불의 제단에 있었던?”

키제프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 역시 불의 제단에 갔었고, 루시엘이 피닉스의 장미를 키우는 것을 지켜봤었다.

그 전설의 존재가 눈앞에 있다니, 그것도 루시엘의 부탁으로? 믿기지 않는 눈으로 키제프가 피닉스를 보았다.

“그래, 나는 그녀의 권속이 되었거든. 루시엘이 이것을 너에게 전해 주러 온 거다.”

“루시엘도 끝없이 성장하고 있구나. 해낼 줄 알았어……. 그런데 루시엘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키는 얼마나 컸고? 머리는 얼만큼 자랐어? 지금은 얼마나 더 예뻐졌을까…….”

루시엘을 상상하며 입가에 자그만 미소를 그려 낸 키제프가 간절히 물었다.

“그런 자세한 건 돌아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지. 이제 그만 자신 앞에 나타나 달라고 전해 달라더구나. 그런데 너…… 버틸 수는 있겠어?”

강한 기운을 가진 피닉스에게조차 이곳에 도사리고 있는 악룡 호그누스의 사악한 기운이 위협적으로 느껴진 터였다.

키제프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힘주어 말했다.

“무기만 있다면 가능해.”

“아주 적절한 시기에 선물이 도착했구나.”

피닉스의 말에 키제프는 빛나는 물건을 받아 내려다보았다.

쿠구구궁!

쩌저적.

그러자 어딘가에서 성벽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뜨거운 용암이 솟구치며 폭발하는 소리까지 들렸다.

“시간이 없다. 어서.”

주위를 살피는 피닉스의 재촉에 키제프가 빠르게 봉인된 포장을 풀었다.

이터널, 영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자태의 긴 검이 드러났다. 휘황찬란한 광채를 머금은 유리보다 투명하고,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한 칼날이 푸르게 빛났다.

검의 손잡이에는 검은 드래곤의 장식이 있었고, 주변에는 촘촘하게 루시엘의 보석이 세공되어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무기였다.

이어 검에서 투명한 빛과 함께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제프, 이 검이 날아가 너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 비록 내가 곁에서 직접 응원할 수는 없지만……. 난 여기에서 항상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 이제 만날 시간이 되었잖아. 보고 싶어. 어느새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서 이만큼 커졌어.]

그리운 목소리가 귀에 박히는 순간, 키제프의 핏빛 눈동자에도 물기가 고였다.

“……루시엘, 너의 마음 잘 전달 받았어.”

그러나 감동을 이어 갈 시간의 여유 따위 없었다.

―크롸라라!

호그누스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성 안을 울리듯 고막까지 뚫고 들어왔다.

키제프는 이터널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손에 착 휘감긴 손잡이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와 그의 드래곤하트에서 퍼져 나온 드래곤 마나가 빠르게 공명했다.

키제프의 핏속을 돌던 드래곤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소용돌이쳤다.

―크롸라!

콰과과과광!

거대한 위압감의 호그누스가 쿠궁, 소리를 내면서 키제프를 찾았다.

아직 이 검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공명한 순간 키제프의 내면으로 엄청난 힘이 밀려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낸 검인지는 몰라도, 이 검에는 강력한 원소의 힘이 심어져 있었다.

화염 속성을 가진 호그누스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얼음 속성이 유리했다. 하지만 키제프는 바람과 어둠 속성이었기에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검에는 얼음 속성을 비롯해 네 가지 원소가 전부 깃들어 있었다. 아직 채 파악이 안 되었지만 다른 힘도 있는 것 같았다.

키제프가 간단한 얼음 속성의 주문을 외웠다.

콰과과가가!

순식간에 주변이 얼어붙었다. 이어서 검에 실린 드래곤오러를 차갑게 하는 것도 가능했다.

사아아아!

칼날이 냉기를 품고는 새파랗게 변했다. 사파이어처럼.

“이거면 됐어.”

호그누스의 노랗게 형형한 눈동자가 구르며, 키제프를 발견하곤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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