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이동을 마치자 온통 새카만 암흑의 공간이 펼쳐졌다.
촉촉한 밤이슬이 맺힌 나무 아래로 소환되어 뺨에 차가운 것이 스쳤다.
“여…… 여기가 맞나요?”
살짝 겁먹은 듯한 제르다의 말에 루시엘이 라이트 마법을 사용하자, 금세 주변이 환해졌다.
“네, 여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류프델이 열어 준 포탈이라 대장간 내부로 바로 통했군. 다행히 파수견은 없…… 지가 않구나.”
길리아트는 멀리서 노랗고 형형한 눈동자를 가진 채, 달려오는 시커먼 파수견을 보며 말했다.
식겁한 제르다가 어찌할 바를 몰랐고, 길리아트가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뒤로 가렸다. 그사이 루시엘이 나섰다.
“멍멍아, 오랜만이다. 잘 있었어?”
―컹컹!
집채만 한 개가 달려오더니 루시엘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배를 보이면서 애교를 부렸다.
루시엘이 파수견의 검은 등을 쓰다듬었다. 한참 분위기 좋던 파수견이 제르다가 있는 방향을 보며 잠시 이를 드러냈다.
―크르르.
파앗.
그러나 루시엘이 얼른 마나 방울을 만들어 주자, 다시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제르다와 길리아트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르다 씨, 이리로 살짝 와 봐요. 냄새는 한번 맡게 해 주어야 하는데…… 이걸 손에 올려 놓고 있어요.”
루시엘이 에메랄드 하나를 제르다에게 던졌고, 그가 어렵사리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는 엉거주춤 파수견에게 다가갔다.
“자, 저길 봐.”
파수견이 킁킁, 보석과 제르다의 냄새를 동시에 맡았다.
루시엘은 슬쩍 뒤로 빠졌고, 이제 제르다에게로 완전히 관심을 보인 파수견이 그 주위를 빙글 돌면서 노란 눈을 빛냈다.
그는 숨을 꼴깍 내쉬었다. 두려움으로 손바닥이 덜덜 떨렸다. 그의 어깨에 매달린 곰 인형이 토닥여도 소용없을 만큼…….
낼름.
길고 축축한 파수견의 혀가 지나가며 보석을 삼켰다.
오도독. 보석을 씹어 삼킨 파수견은 완전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꼬리의 회전 속도가 더 빨라졌다.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
“루시엘이 없었으면 통과하기 어려웠을 거요.”
길리아트가 제르다에게 그리 말했다.
파수견과 함께 세 사람은 쇠를 제련하는 소리를 들으며, 류프델이 있는 가장 안쪽 집으로 이동했다.
공방에서 무언가를 만들다가, 파수견이 달려오는 걸 망원경으로 확인한 류프델은 울타리 옆 나무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왔다.
그러곤 표정 관리를 위해, 미간을잔뜩 찌푸리며 금테 안경을 들어 올렸다.
“망할, 여긴 또 뭐 한다고 왔어?”
“류프델 보러 왔지요. 잘 지냈어요?”
“누가 보면 내가 니 할애빈 줄 알겠구먼.”
생글거리며 루시엘이 그에게 가까이 가서 친근하게 인사했다. 그가 움찔하면서도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슥 감추며 말했다.
길리아트가 못마땅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루시엘 할애비는 여기 떡하니 있는데 어딜 넘보냐, 난쟁이.”
루시엘이 길리아트에게 은근슬쩍 가만히 계시라고 윙크로 신호를 보냈다.
“두 분 다 저에겐 할아버지잖아요. 그렇지요?”
루시엘이 맑게 웃었다.
류프델이 긴 손톱으로 긁적이며, 웃었다.
“난쟁이 인생에 요정 손주를 다 둬 보는군.”
그사이 그의 황금 이빨이 입안에서 반짝거렸다.
“이빨 새로 하셨구나. 멋져요.”
“루시엘, 너만이 알아보는구나. 한 지 육개월이 지났는데 말이지……. 근데 저 여잔지 남잔지 모르게 하고 온 놈은 누구냐?”
“아, 류프델에게 꼭 소개하고 싶었던 사람이에요. 마법 인형사 제르다 씨예요.”
“아아, 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르다가 인형을 내려놓고는, 꾸벅 인사했다.
류프델의 까만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리며, 제르다를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딱히 특별해 보이진 않는데.”
“특별한 건 바로 그가 만든 인형이죠. 위로해 주는 인형이에요.”
루시엘이 윌슨을 안아서 류프델에게 건네주었다. 그러나 윌슨이 위로하기도 전에 류프델은 황금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그는 인형을 훑어보더니 발로 뻥 차 버렸다. 인형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나 제멋대로에 사악해…….’
그의 돌발 행동에 루시엘도 경악해 땀이 삐질 나오는 것 같았다.
“류프델, 대체 무슨 실례를…… 너무하잖아요.”
그러자 그동안 얌전하던 제르다의 눈에 분노가 일렁였다.
“그 아이는 제 목숨보다 귀한 아이입니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셔도 저 역시 제가 만든 인형을 존중하지 않는 분과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류프델이 씩 웃으며 곰인형 윌슨을 빼돌린 다른 손을 보여주었다.
“……제작한 인형에 대한 진심을 보고 싶어서 잠시 어떻게 나오는지 보려고 시험했다. 차는 시늉만 한 거다.”
“앗, 오늘은 손톱을 두드리지 않아서 완전 속았어요. 아, 황금 이빨을 부딪쳐서 마법을 발동시킨 거죠?”
“이런, 그걸 또 간파하는 게냐. 어쨌든 모두 감쪽같이 속았구먼.”
“난 속지 않았다. 유치하긴.”
길리아트는 알고 있었기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프델이 황금빛 지팡이로 제르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길리아트 네 놈은 날 너무 잘 아니 그렇지. 그건 그렇고 자네 아까 그 말, 마음에 드는군. 제작한 인형이 자네 목숨보다 귀하다는 말. 아무렴 제작 장인이라면 그런 정신이 있어야지!”
그래도 그의 테스트는 여기서 끝인 거 같아, 루시엘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류프델, 오늘은 의논할 것들이 아주 많아요.”
“긴 밤이 되겠군. 꼬맹이, 그만큼 컸으니 오늘은 밀주 한잔할 수 있더냐?”
“그거 마시면 큰일날 거예요.”
“내 아들이 쫓아올 거다.”
“길리아트, 네 아들은 말이 안 통한다.”
“서로의 고약함을 알아보았군.”
오랫동안 함께했기에 저런 농담도 서슴없이 하는 거겠지. 두 사람을 보며 루시엘도 웃었다.
* * *
탑처럼 쌓아 올린 메이플 쿠키와 달콤한 시럽을 듬뿍 넣은 산양 우유를 마시면서 논의는 계속되었다.
메이플 쿠키를 본 류프델은 함박웃음을 짓고는 그 뒤로 온순해졌다.
생각보다 제르다에 대한 인상이 좋아서일까.
류프델은 제법 열린 자세로 그가 가져온 인형 도면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수정할 방향이나 재료를 구할 방법 같은 것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조금 계열은 다르지만, 비슷한 제작의 대가들이 만났으니 관심사가 비슷해서인지 대화의 물꼬가 터지고 나서는 끝이 없었다.
류프델은 그동안 자신이 만든 물건에 대한 자랑까지 했다. 제르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류프델을 칭송했다.
“류프델 님의 손은 기적을 만드는 황금손이 아니실는지.”
“우하하! 자네, 여기 매일 와서 내게 마법 제작을 배워 보면 어떤가? 모름지기 한 공간에서 손발을 맞추면서 같이 도모해야, 결과도 좋을 걸세.”
“……아, 가게를 닫으면 인형들이 저를 찾을 텐데요.”
“그건 걱정거리가 되지도 않지. 이 포탈석만 있으면, 얼마든 여기로 다시 올 수 있으니까.”
어느새 루시엘과 길리아트는 사이에 끼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두 사람은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두 분 잘 통해서 다행이에요. 제 인형 제작도 잘 부탁드려요.”
“그래, 이 친구의 아이디어가 꽤 쓸 만해서 나도 해 볼 마음이 생겼다.”
“류프델 님 같은 대단한 분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만 들으면 거의 몇 년을 지낸 스승과 제자 같은 느낌이었다.
“류프델, 이제 다른 일 이야기도 해요. 미스릴 제련을 맡기고 싶은데……! 보수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어요.”
“진짜 미스릴이란 보장이 있나? 난 질 나쁜 재료는 취급 안 한다.”
류프델이 눈썹을 까딱 치켜 올렸다.
“그건 전문가의 눈으로 보시는 게 더 정확하겠죠?”
루시엘이 가방에서 미스릴이 든 주머니를 꺼내, 보여 주었다. 물건의 가치를 보는 안경으로 미스릴을 보던 류프델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나는 것이, 가볍고도 단단했다.
“호…… 제법 쓸 만하군. 아주 상등품은 아니지만, 미스릴은 구하는 것이 워낙 힘드니. 제련할 양은 얼마나 있지?”
“음…… 조금 많아요. 아홉 수레 정도?”
“이크, 그렇게나 많이? 어차피 제련은 내가 만든 일꾼들이 할 거긴 하다만…… 워낙 까다로운 조건에서 해야 해서. 시일이 좀 걸리겠군.”
“얼마나 걸릴까요? 채광하는 데에도 꽤 오래 걸렸는데…….”
“넉넉잡아 두 달은 걸릴 거다.”
그 정도면 그래도 봐줄 만한 기간이었다.
“좋아요. 그럼 의뢰할게요. 보수는 얼마를 드릴까요?”
“공작의 돈이냐? 그럼 10억 틸링은 줘야 한다.”
류프델이 사악하게 말했다.
“제 돈으로 드리면요?”
류프델이 루시엘을 올려다보며 다른 조건을 제안했다.
“네 돈은 안 받는다.”
“앗, 그럼 공짜로?”
루시엘이 깜짝 놀라자 길리아트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럴 난쟁이가 아닌데.”
“큭, 정답.”
류프델이 루시엘에게 귀를 달라고 손짓했다. 그러곤 자그맣게 조건을 말했다.
“네 보석 스무 개만 줘.”
두 달 동안이나 제련하는 데 보석 스무 개라니 류프델이 제안한 노동력의 대가치고는 너무 저렴한 게 아닌가 싶었다.
“……음, 정말 그래도 되겠어요? 너무 밑지는 거 아닌가요?”
“그래, 대신 인형을 제작하고 나서 왕창 뜯을 거다.”
류프델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네가 의뢰한 물건은 저쪽 방에 있으니 돌아가기 전에 들고 가거라. 제작이 너무 늦어서 미안하군.”
루시엘이 부탁한 지는 한참 되었지만 재료 수급에 문제가 생겨 좀 더 미루어진 물건이었다.
“아니에요. 어쩌면 빨리 전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아, 봉인 포장을 해 둬서 열어 볼 수 없을 거다. 받는 사람만이 보겠다만 네 지팡이 이래 가장 훌륭한 물건이라 자부한다. 그만큼 최선을 다했다. 길리아트도 재료를 구하는 걸 도왔지.”
“할아버지까지, 두 분 정말로 감사해요……. 류프델,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고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루시엘은 기뻐서 류프델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의 짧은 팔이 정말 손주가 안긴 듯 도닥였다.
“멀리 떠난 남편이 뭐 그렇게 좋으냐?”
“키제프가 정말 기뻐하겠구나, 루시엘.”
키제프를 위해 마법 검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제작만으로도 일 년에 가까운 시간이 들었다.
루시엘이 만든 보석들도 예쁘게 세공해 달라고 했으니, 이노센트 지팡이에 버금가는 아주 강한 무기일 것이 틀림없었다.
키제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는데 기뻤다. 루시엘은 설렌 얼굴로 류프델이 말한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법 검은 봉인 씰로 눌러 놓아 상자 안에 담겼음에도 불구하고, 광채를 찬란하게 뿜고 있었다.
겉에는 마법 검의 이름과 키제프의 이름이 함께 적혀 있었다.
이터널(eternal).
루시엘은 검을 든 채 말했다.
간절한 마음을 모아서.
“키제프, 이 검이 날아가 너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어. 비록 내가 곁에서 직접 응원할 수는 없지만……. 난 여기에서 항상 널 기다리고 있을 거야. 우리 이제 만날 시간이 되었잖아. 보고 싶어. 어느새 그리움이 쌓이고 쌓여서 이만큼 커졌어.”
루시엘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목소리들이 검 안으로 사르르 스며들며, 묘하게 조금 더 빛이 났다.
강렬한 그녀의 감정들이 보석을 만들어 방 안을 데굴데굴 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