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87)화 (187/282)

<187화>

그날 바로 통신구를 취급하는 마도구 판매업자를 타운하우스로 호출했다.

기왕 바꾸는 것 가족들의 통신구도 전부 새로 구입하기로 했다.

여기 없는 길리아트와 키제프, 레오니, 엘링턴과 자르가 단장, 에바의 것까지.

신상 모델은 기존 통신구처럼 동그란 구 형태가 아니라 책처럼 펼칠 수 있는 형태였다.

루시엘은 분홍색으로 색을 지정해 놓고, 겉에 하얀색 토끼 모양과 이니셜도 새겨 넣었다.

펼친 한쪽 면으로는 상대의 얼굴이 보인다는 점이 신상 통신구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통신구를 멍하니 바라보던 루시엘은 마음속으로 그리운 키제프를 생각했다.

‘통신구로라도 얼굴을 확인할 수 있다면, 아니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일상을 보내다가도 이렇게 문득 툭툭 올라오는 그리움이 루시엘의 마음을 건드렸다.

가족들도 루시엘 앞에서는 최대한 키제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 루시엘의 마음이 아플까 봐. 그래서 그게 또 괜히 서글펐다.

루시엘은 잠시 그런 생각들을 눌러 놓았다. 가족들과 차례로 마나를 연결을 마칠 때쯤이었다.

바깥 정원에서 빛이 나는가 싶더니, 타운하우스의 문을 열고 곧장 길리아트가 들어왔다.

감색의 튜닉에 금빛 허리띠를 두른 길리아트는 마탑에서 오는 길인 모양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타난 그를 보고 루시엘이 먼저 총총 다가가서 그 든든한 품에 안겼다.

“할아버지!”

“오냐, 루시엘. 어릴 적에는 내가 안아 드는 것만 가능했는데, 이제는 네가 와서 안길 정도로 컸구나.”

“그러게요. 제게 할아버지는 언제나 나무처럼 커다란 분이셨는데…….”

“지금은 아닌게냐?”

길리아트가 수염을 문지르며 물었다.

“지금도 그래요. 아, 저 통신구 만들었어요.”

“오, 드디어 루시엘의 목소리를 어디서든 들을 수 있게 되었구나.”

두 사람은 마나를 연결해 서로의 통신구를 인식시켰다.

“이제 그 인형사 청년을 데리고 류프델을 만나러 가면 되겠구나.”

“네, 마차를 보낼게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이면서 그에게 인형 도면을 내밀었다.

“네, 제르다씨가 인형에 대해 연구도 했더라고요.”

“괜찮은 친구로군. 흐음…… 어디 보자. 우선 류프델에게 보여 주고 상의해 보도록 하지.”

잠자코 듣고 있던 공작이 턱가를 문지르다가 말했다.

“루시엘, 나 대신에 미스릴 건에 대한 협상도 잘 부탁한다. 이건 샘플로 가져가고.”

그가 미스릴이 든 묵직한 주머니를 루시엘에게 건넸다.

“네, 걱정 마세요. 아빠. 아 참! 할아버지, 메이플 쿠키는 가져오셨어요?”

“물론이다. 세스 주방장에게 잔뜩 구워 달라고 했단다.”

길리아트가 로브 안의 불룩한 포켓을 가리켰다. 류프델에게 쿠키 탑도 만들어 줄 수 있을 정도로 가득해 보였다.

“좋아요. 완벽하네요.”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

“제르다씨가 오면요. 저, 잠깐만요.”

루시엘은 아까부터 눌러 놓았던 키제프 생각에 다시 이벨린을 찾았다. 류프델을 만나면 당분간 일이 바빠질 터이니 혹여나, 연락이 가능하다면 더 늦기 전에 말하고 싶었다.

루시엘은 그사이 주방으로 간 이벨린을 뒤따라가서 물었다.

“할머니…….”

“루시엘, 계획이 잘 풀렸으면 좋겠구나. 잘 다녀오렴.”

“저어…….”

어렵사리 입술을 떼려는 루시엘의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던 이벨린이 이내 눈치챘다.

“키제프가 걱정되니?”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핑크 다이아몬드처럼 커다란 진분홍 눈에서 눈물이 아롱아롱, 떨어져 내렸다.

파아아앗.

또롱, 또로로!

물방울 모양의 커다란 사파이어와 옵시디언이 함께 공중에 맺혔다.

슬픔과 고통.

“루시엘…… 키제프는 마지막 시련만을 앞두고 있다. 곧 그걸 이겨 내고 돌아올 거란다.”

“그 시련이 무엇인데요?”

“…….”

이벨린은 드락카로부터 소식을 들어서 키제프의 시련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역대 가장 고된 시련이라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걸 알려 주면 루시엘의 걱정이 커지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늘 포근하게 웃기만 하던 이벨린의 얼굴이 단숨에 흐린 빛으로 물들자 루시엘이 말했다.

“……키제프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시련을 겪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지금 그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기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힘을 주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힘내라고 전해 주고 싶어요.”

“미안하지만 루시엘, 키제프는 이미 시련을 위해 여정을 떠났단다. 지금 내가 간다고 해도 그 애에게 편지 한 장도 전해 줄 수 없을 거야.”

이벨린은 그리 말하면서도 마음이 아파, 루시엘을 꼭 끌어안았다.

“미안하다.”

“아니에요. 어차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갔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아는데도 안타까웠다.

재작년부터 류프델에게 의뢰해 놓은 키제프를 위한 물건이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그걸 꼭 전해 주고 싶었는데. 아니, 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루시엘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물론 그동안 이벨린을 통해 보낸 편지에 다이아몬드와 피닉스의 장미를 보낸 적도 있었다.

그때 이벨린의 품에 안긴 루시엘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아, 장미가 있는 곳이면 어쩌면 피닉스가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으응?”

루시엘은 이벨린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도 설렜다. 그리고 지팡이를 꺼내서 피닉스를 불러냈다.

스르르, 아름다운 인간체의 모습으로 나타난 피닉스가 식당 테이블 앞에 앉았다.

“……호오, 과연 불사의 피닉스.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답군요.”

이벨린이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피닉스에게 인사했다.

“……당신도 내가 본 드래곤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걸. 나만큼 한 미모 하는군그래. 마나는 좀 맵지만 말이지. 콜록.”

“후후, 그럼 내가 있음 불편할 테니 자리를 피해 주어야겠구나. 또 봐요, 피닉스.”

이벨린이 떠나자, 피닉스가 숨을 참다가 몰아쉬었다.

“……콜록, 캑캑. 죽는 줄 알았다. 루시엘, 빨리 네 마나 좀.”

“알겠어요. 잠시만요.”

루시엘이 웃으며, 마나 방울을 만들어 피닉스에게 주었다.

“이제 살 것 같네. 근데 왜 불렀지?”

“피닉스,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은 피닉스의 장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이동할 수 있나요?”

루시엘이 간절하게 피닉스의 손을 붙잡고는 물었다.

피닉스가 주홍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매만지면서 말했다.

“물론이지. 그건 왜?”

“사실 지난번 저에게 주었던 피닉스의 장미를 키제프에게 보내 주었어요. 그럼 그에게 이동할 수 있나요? 드래곤들의 땅인 드락카라고 해도?”

“……하필이면 드락카라고?”

피닉스의 금빛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나듯 흔들렸다.

“이동할 순 있는 거지요?”

“나에게 드래곤 마나는 너무 매운데……. 너희들 음식으로는 칠리페퍼를 씹는 것 같단 말이다.”

피닉스가 그리 투정하자, 루시엘이 허리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피닉스, 이제는 당신이 저를 한번은 도와줄 때가 되었잖아요. 그동안 당신에게 마나도 먹여 주고 지팡이에서 재워 주고, 부활을 위해 힘썼고요.”

“…….”

루시엘이 은빛 눈썹을 까딱 올리면서 말하자, 피닉스가 제 머리카락을 둘둘 말면서 대답을 피하다가 슬쩍 말했다.

“알다시피 난 기관지가 약하단다.”

“그럼 보석 다섯 개 어때요?”

“열다섯 개.”

“그건 양심 없잖아요, 열 개.”

루시엘의 말에 피닉스가 고개를 주억이며, 제안을 수락했다.

“알았다, 요 깍쟁이 같으니.”

“고마워요, 일단 다섯 개 먼저 줄게요. 나머지는 부탁을 들어준 다음에. 물건이 아직 내 손에 없어서. 일단 류프델에게 다녀올 때까지 기다려 줘요, 피닉스.”

루시엘에게서 보석을 받아 신이 난 피닉스가 배시시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핑그르 돌았다.

‘묘하게 블랙스콜피온이랑 하는 행동이 비슷해…….’

그때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불렀다. 그사이 제르다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얼른 피닉스를 지팡이로 다시 돌려보낸 다음, 밖으로 나갔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류프델을 만나서 해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지만.

* * *

달이 차오르자 정원에 모인 세 사람은 이동포탈을 이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 사람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게 호위하던 기사들도 모두 물러나게 해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제르다는 자못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그의 어깨에 타고 있던 곰 인형 윌슨이 끊임없이 그를 토닥여 주고 있자, 루시엘이 말했다.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어요. 밤의 대장간 내부로 바로 이동할 거예요. 류프델이 당신을 테스트하려고 하겠지만, 제가 막아 볼게요.”

“예……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제 일을 도와주려고 가시는 건데요. 인형 도면도 잘 봤어요. 그대로만 실행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해요.”

“과찬이십니다.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는 거니까요.”

길리아트의 팔로 올려 보내 주자, 곰 인형 윌슨이 그에게도 부빗거리면서 안아 주었다.

“나도 인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대단한 재주를 가진 것은 틀림없군. 허허허.”

“그렇죠, 할아버지? 제르다 씨는 윌슨보다 더 대단한 장난감들도 많이 만들었대요.”

“그래, 네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으니 알고 있다. 루시엘.”

화기애애한 분위기에도 제르다의 표정은 풀리지 않아서, 루시엘이 재차 물었다.

“제르다씨, 혹시 무슨 일 있어요?”

“아, 그게…… 오는 길에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말이지요.”

“아는 사람?”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제 쌍둥이 형이요. 아니, 아닙니다. 제가 잘못 보았겠지요.”

“잠깐만요. 그건 중요한 일이잖아요. 뒤쫓아 가 보았나요?”

“……네. 하지만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더군요. 아마 형이 아니었을 겁니다. 제국을 떠난 형이 이곳에 다시 돌아올 리가 없으니까요.”

“왜 떠난 거예요?”

“형은 마법 장난감 가게를 이용해 큰돈을 벌기를 원했어요. 저는 아니었고요. 거기에서 엇갈리기 시작했던 거죠.”

그러고 보니 루시엘이 과거에 읽었던 기사에도 그의 형제에 대한 이야기가 짤막하게 나왔다.

「아버지의 가게를 물려받아 형과 열심히 꾸려 나갔지만, 돌연 갈라섰다. 혼자의 몸으로도 그는 인형 제작을 멈추지 않았다.」

해당 기사와 그의 말로 추측해 보자면, 그의 형도 인형사였음에 분명해.

가게를 그대로 두고 간 걸 보면, 제르다 씨의 아버지 역시 같은 뜻을 가진 분이었을 거고.

갈등이 생긴 형은 떠난 거구나. 어디를 갔던 것일까?

‘제르다씨와 같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역시 솜씨가 뛰어났겠는걸.’

루시엘이 그리 추측하고 나서 그에게 말했다.

“형도 인형사인가 보군요. 하루빨리 형과 재회하길 바랄게요.”

제르다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습니다. 이젠 오래된 일이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줘요. 저도 도울게요.”

하지만 제르다는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르다만큼 뛰어난 인형사라면 그 솜씨를 숨길 수 없을 텐데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남은 가족이라곤 형뿐일 텐데, 그런 형과의 이별은 그에게는 상처로 남았을 일이 분명했다. 루시엘은 제르다를 꼭 도와주리라 다짐하며 포탈에 다가섰다.

눈부신 빛이 루시엘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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