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83)화 (183/282)

<183화>

황도의 시내는 주말이라 제법 북적거렸다. 루시엘은 마차의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내 마차는 세련된 화이트톤 인테리어의 레스토랑에 다다랐다. 특히나 강가에 세워진 레스토랑이라 분위기가 무척 좋았다.

파라솔을 설치한 야외석도 근사해 보였다. 어른들의 뒤를 따라서 루시엘은 레스토랑을 구경하며 입구로 들어섰다.

예약을 한 달 전에 해 놓아야 한다는 유명 레스토랑이었지만, 단골 고객인 공작의 얼굴을 확인한 매니저는 친절하게 바로 입장시켜 주었다.

“다시 방문해 주셔서 기쁩니다. 즐겨 찾으시던 자리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공작이 이벨린과 루시엘의 의사를 묻는 눈치로 돌아보았다.

“전 아무 곳이나 좋아요.”

“난 조용하고 한적한 자리가 좋구나.”

“늘 앉던 곳으로 안내해 주게.”

공작이 매니저에게 답을 했다.

홀과 야외석도 있었지만, 평소 공작이 선호하는 자리는 파티션으로 공간이 분리된 창가의 좌석이었다.

특히, 이 층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풍경을 감상하기에도 좋은 자리였다. 강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작은 테라스로 향하는 문도 있었다.

“아빠, 밖으로 나갈 수도 있어요!”

“탁 트인 곳이라 볼만하지. 나가서 구경하고 와라.”

루시엘은 테라스로 나가서 강과 하늘을 보았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루시엘의 긴 은발을 길게 간지럽혔다.

루시엘은 난간을 붙잡고는 한참 여유를 즐겼다. 강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 슬슬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하는 나무들, 모든 게 평화로워 보였다.

“기분 좋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루시엘이 무심결에 고개를 숙였을 때였다.

휘잉, 순식간에 바람이 불어 머리 위에 있던 하얀 모자가 아래로 날아가 버렸다.

“어? 내 모자.”

아래는 야외석과 강이 같이 있어 자칫하면, 물에 빠질 수도 있었다.

아래로 날아간 모자는 다행히도 누군가의 테이블 아래, 매끄러운 구두 옆으로 떨어졌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루시엘의 모자를 주워 들고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기요! 그거 제 모자인데, 잠깐만 제가 내려갈 테니까 맡아 주세요.”

루시엘은 자리를 지나면서 공작과 이벨린에게 말했다.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서, 찾아 가지고 올게요.”

구둣발이 총총 아래층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이벨린이 자못 걱정이 되었는지, 루시엘을 힐긋 보았다.

아래층 테라스 석을 찾아 루시엘이 두리번거렸다.

‘이 층처럼 파티션으로 구분이 된 좌석일 거야.’

루시엘은 강변 자리를 휘휘 둘러보았다.

하얀 모자를 가진 한 소년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흰 제복, 푸른색 망토를 걸친 은발의 소년이었다. 루시엘과 비슷한 머리 색을 가진 사람은 제국에서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저기요…… 실례지만 그 모자 제 건데.”

소년의 사파이어처럼 빛나는 푸른 눈이 힐끔 루시엘에게 향했다. 도도하고 나른하게 뻗은 긴 눈매와 도톰한 붉은 입술. 고양이 같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우아하고 예쁘장하니 귀공자처럼 눈에 띄는 외모였다.

“수법이 너무 고전적이군.”

“……네?”

“모자를 던지는 것 말이야. 이런다고 내가 그 쪽에게 관심 가질 줄 알아……?”

팔짱을 낀 소년이 따분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한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진짜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간 것뿐이에요. 그 쪽에게 관심 가질 이유도 없고요. 그럼 모자는 돌려받을게요. 감사합니다.”

루시엘이 모자 위로 손을 뻗어 가져가려는데, 소년이 흘깃 루시엘을 보았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그대의 노력은 가상하군.”

“…….”

계속 오해받기에는 조금 짜증이 솟구쳐서 루시엘이 상큼하게 웃으며 말해 주었다.

“너, 내 스타일 아니니까 안심해. 외모도 그렇고, 성격은 더 그래. 솔직히 말해 줄까? 완전 최악이세요.”

“……뭐?”

소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가 벌떡 의자에서 일어섰다.

일어서서 보니 더 조그만 여자애였다.

보송보송한 토끼처럼 보이는 것이 제법 깜찍하게도 재미있는 말을 쏟아 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이번에는 살짝 착각한 듯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여자들이 제게 물건을 주워 달라고 하는 일이 워낙에 많았고, 그것이 의도적인 접근이라는 걸 알게 된 것도 최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최악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또 그의 인생에서 처음 있는 경험인 듯싶었다. 보통은 엮이려고 안달이 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편견은 차치하고서라도 눈앞의 작은 소녀에게 흥미가 생겼다.

보기 드물게 같은 은발인 것도, 인형처럼 귀여운 얼굴도. 저보다 두세 살쯤 어려 보이는데 시선을 떼기 어려웠다.

이국으로 온 첫 여행, 들뜬 기분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소년의 키가 훌쩍 커서 순간 위압감이 들었지만, 루시엘은 얼른 모자를 휙 가져가려 테이블에 손을 얹었다. 소년이 씩 웃으면서 모자를 붙잡았다.

“레이디, 그냥은 못 가져가. 그대 이름이 뭐지?”

“……그건 알 필요 없잖아.”

“좋아. 그럼 내 이름을 알려 줄게.”

“아니, 안 궁금하거든?”

루시엘이 귀를 막으며 심드렁하게 답하자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요한. 요하네스 루트리히. 내 이름이다.”

어디선가 들어 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잠깐, 요하네스 루트리히라면, 루트리히 공국의 대공가. 이렇게 어린 나이에 대공일 리는 없고, 그의 아들일까?’

루트리히 공국은 타이라 제국과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메이너드 왕국과 가까웠으니까.

루트리히 공국에 대해 무언가 가물거렸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듯했다.

때마침 그의 부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님, 대공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알았다. 잠시 나가서 대기해.”

“예.”

요한이 이제야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순순히 루시엘에게 건네주었다.

“아까는 확실히 내가 착각했던 것 같군.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저도 발끈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대공자 전하. 미리 밝히지 않으셨으니 아까 반말한 건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 제국에서는 황족도 귀족에게 예우를 갖춰 대한답니다.”

루시엘도 생긋 웃으며 답했다.

“아아, 그런가? 공국과는 예법이 조금 다른가 보군…… 요.”

어색하게 존칭을 쓰던 요한이 다시금 루시엘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디의 성함은 정말 안 가르쳐 줄 건가요?”

“그게 필요한 일일까요?”

“제국의 예법을 조금 더 배워 볼까 해서요.”

“죄송합니다. 가족이 기다리고 있어서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루시엘이 고개 숙여 인사하곤 돌아가자, 요한이 오래도록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중얼거렸다.

“제국이 마음에 드는군.”

루시엘이 모자를 가지고 몸을 돌려 다시 이 층으로 향하려는데 공작이 몸소 내려왔다가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공작의 형형한 핏빛 눈을 마주하자마자, 요한은 슥 몸을 돌렸다.

“앗, 아빠. 왜 내려오셨어요?”

“네가 하도 오질 않아서. 기다리다가 왔는데.”

공작이 눈매를 가느다랗게 좁히며 중얼거렸다.

“저놈은 왜 널 보지?”

“아, 저 사람이 모자를 주워 줬어요.”

“네게 반한 듯한 눈을 하고 있는데…… 가서 죽일까.”

공작이 서늘하게 중얼거리자, 루시엘이 기겁했다.

‘대공자를 죽이면 난리가 날 거예요, 아빠.’

“……이, 일단 올라가요. 저 배고파요.”

루시엘의 애교에 공작이 굳어진 얼굴을 풀고는 올라갔다. 그러나 계속 신경 쓰이는 건 여전했다.

그 녀석이 입고 있는 차림을 보아하니, 어디 조그만 나라의 왕자라도 되어 보였던 터였다.

‘왕자가 아니라 왕자 할아버지라도 안 되지. 감히 어딜.’

공작은 속으로 뿌득 이를 갈았다.

* * *

진한 풍미, 통통하게 속이 꽉 찬 고소한 속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아내렸다.

랍스터 요리는 끝내줬다.

공작과 이벨린이 서로 돌아가면서 친히 도톰한 살을 발라 주어, 루시엘은 입안으로 열심히 가져가기만 했다.

이벨린은 루시엘이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면서 행복해했지만, 루시엘이 접시 가득히 랍스터 살을 담아서 주자 그녀도 맛있게 먹었다.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오페라 극장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요 근래 꺼져 있던 제르다의 마법 장난감 상점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루시엘이 두 사람에게 살짝 양해를 구했다.

“죄송한데 잠깐 장난감 상점에 들러도 될까요?”

“그래, 우리 루시엘은 아직도 인형이 좋은 거니? 귀엽기는.”

이벨린이 웃으면서 말하자 루시엘이 볼을 발그레 물들였다.

“인형을 좋아하지만, 구경하려는 게 아니라 제르다 씨에게 잠깐 할 말이 있어서요. 그는 마법 인형을 만드는 실력이 좋아서, 류프델을 만나러 갈 때 같이 가자고 하려고요.”

“아아, 들은 바가 있지. 근데 그 망할 난쟁이는 성격이 더러워서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놈이니.”

공작이 류프델과의 일을 떠올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하……. 그럼 다녀올게요.”

루시엘이 마차에서 내려, 마법 상점의 문을 두드렸다.

이내 한참 있다가 문이 달칵 열렸다. 제르다가 졸린 눈을 비비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어깨엔 곰 인형 윌슨이 매달려 있었다.

“누구시……?”

“제르다씨. 오랜만이에요! 저예요, 루시엘.”

“아…… 루시엘 아가 마님? 들어오세요.”

“잠시 들른 거라 살짝 이야기만 하고 갈게요.”

“알겠습니다. 대체 언제 이렇게 자라셨을까요? 저는 그대로인데.”

“원래 애들은 금방 큰대요. 그런데 여긴 그대로네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제르다 당신도요.”

“저야 늘 한결같이 사니까요.”

봐도 봐도 놀랍다는 듯, 제르다가 루시엘을 보았다. 정말 그는 여전했다. 그 비대칭의 단발도, 어딘가 피곤해 보이는 기색도, 장난감들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도.

“음, 당신의 일정이 어떤지 문의하러 왔어요. 이제 바쁘신 일은 없는 거죠?”

“삼 년 정도 정신없이 바빴다가 이제는 다시 여유롭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보이기는 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잠시 가게를 닫을 수도 있나요?”

“아…… 삼 일 이상 가게를 비우는 건 무리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제가 너무 오랫동안 없으면 불안해합니다.”

“그렇구나, 참고할게요. 제 생각엔 하루 넘게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그것보다는 외부인에 특히 민감한 류프델의 성격이 문제였다. 루시엘이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쯤, 제르다가 조용히 인형 도면을 몇 장 내밀었다.

“이건 혼자서 끄적여 본 것인데, 시간 나실 때 보시면 좋겠군요.”

“잘 볼게요. 그러면 조만간 마차를 보낼게요. 같이 류프델을 만나러 가요.”

“류프델이 누구더라…….”

제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 말한 적이 있지만, 잊은 모양이었다.

“괴팍하지만 마법이 담긴 무기나 물건을 제작하는 데에서는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난쟁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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