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루시엘의 물음에 이벨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엘리샤 리즈벳이라, 글쎄 이 이름은 아니었단다. 캐서린이라는 이름이었을 거야.”
“그냥 혹시나 하고, 여쭈어보았어요. 아빠가 알려 주신 정보상 쪽 사람이랑 혹시 같은 사람인가 하고요.”
공작이 받은 명함에는 이름 옆에 테일러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고 했다.
루시엘의 추측에 이벨린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음, 네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나도 그게 사실인지 한번 확인하고 싶어지는구나. 우선은 가볍게 홍차를 마시자꾸나. 머핀을 좀 구워 놓았거든.”
“우와, 할머니가 직접 만드신 머핀. 기대되는걸요.”
머핀 이야기에 루시엘은 갑자기 뱃속이 허해지면서 출출함을 느꼈다. 이벨린이 루시엘의 손을 이끌면서 눈을 곱게 휘었다.
“맛있게 먹어 주면 좋겠구나. 사실 요즘 베이킹을 배우는 중이지. 솔리아페와 함께 말이야.”
“앗, 요즘 두 분이 함께 베이킹을 배우러 다니셨던 거예요?”
루시엘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이벨린이 민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단다. 그동안 네가 디저트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내 손으로 한번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솜씨가 엉망이라 시도를 못 하고 있었지. 그렇다고 주방장에게 배우기에는 안주인의 위엄과 자존심이 또 있잖니? 그래서 시내 제일의 디저트 장인에게 배웠지.”
“할머니이.”
루시엘은 할머니의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또롱 토파즈를 만들었다.
이벨린이 토파즈를 톡 붙잡아서 루시엘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작 이런 일에 감동이라니, 루시엘. 네가 이렇게 힘을 감추지 않고 보여 주는 모습이야말로 내게는 더 감동이구나.”
이벨린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린 시절에 당한 일들로 보석을 만드는 게 이 아이에게 마음 깊이 트라우마로 남았을 법도 한데, 그걸 극복하고 이렇게 티 없이 밝고 예쁘게 자라 주었으니까.
그것 또한 못내 고마웠다.
이벨린은 손을 뻗어 루시엘을 품에 꼭 안아 주고 보드라운 은발을 몇 번이고 쓸어 주었다.
“가족들 앞에는 이제 무엇도 감출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그래. 무슨 일이든 말만 하렴. 나도 도울 수 있는 건 최대한 협조할 테니까.”
“알겠어요, 할머니. 감사해요.”
“고맙기는. 가족이잖니.”
든든하고 의지가 되는 말이었다. 이제는 루시엘도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게 되었다.
몽글몽글 따스해진 마음으로 이벨린과 함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자 던컨 집사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큰 마님, 아가 마님. 테라스에 티 테이블을 준비했습니다. 오는 길에 큰 마님께서 좋아하시는 꽃집의 프리지어가 활짝 피어서 같이 곁들여 보았습니다”
“고맙네, 던컨. 자네는 참으로 섬세해.”
“별말씀을. 테라스로 가시죠.”
던컨이 멋들어지게 인사를 하며, 두 사람을 테라스로 안내해 주었다. 루시엘도 그를 뒤따르며 말했다.
“오늘도 근사한 접대 감사드려요, 집사장님.”
그의 접대 센스와 매너는 정말 수준이 높아, 어떤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도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어느새 아가 마님이 자라셔서 두 분이 나란히 계신 모습을 보니,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벨린은 워낙에 젊어 보이는 외견을 하고 있어서 세월의 흐름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루시엘이 자라니 달라 보인 것이다.
던컨의 주름진 눈이 흐뭇한 미소를 띄웠다. 그 역시 세월이 무색할 만큼, 깔끔하고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희 밖에 나가면 모녀처럼 보이겠지요?”
“어머, 루시엘도 참.”
“물론입니다. 그럼 두 분 즐거운 티타임 되십시오.”
던컨이 하늘색 커튼을 쳐 주고는 돌아 나갔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티 테이블 의자에 앉자, 바구니 가득 담겨 있는 머핀과 향긋한 밀크티 향이 테라스를 채웠다. 프리지어의 싱그러운 향기도 함께였다.
“와, 전부 맛있을 것 같아요.”
루시엘이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머핀 바구니를 들여다보았다.
초코 칩이 콕콕 박힌 머핀, 버터 향이 폴폴 나는 머핀, 무화과나 블루베리, 견과류가 올려진 머핀까지. 루시엘은 행복한 얼굴로 머핀을 한 입 깨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단단하면서도 속은 포실포실 부드럽고 고소했다.
“와, 할머니! 너무너무 맛있어요.”
“제법 괜찮지? 호호, 열심히 배우러 다닌 보람이 있구나.”
“할머니, 저 나중에 이 레시피 알려 주세요.”
“오냐, 우리 귀염둥이. 얼마든지 알려 줄 수 있지. 많이 먹으렴.”
루시엘이 순식간에 머핀을 다섯 개나 먹어치웠고, 이벨린은 그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이벨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쯤, 테라스에서 타운하우스 저택의 대문으로 누군가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마차를 안쪽까지 타고 들어오지 않는 걸 보니, 전용 마차가 아닌 시내의 마차를 잡아타고 온 모양이었다.
“오, 아까 말한 그 테일러가 온 모양이구나. 슬슬 나가 볼까?”
“네.”
루시엘은 머핀 바구니 위로 린넨 천을 덮어 놓은 다음 자리를 나섰다.
* * *
캐서린은 친근하고 살가운 인상을 가진 중년 여자였다. 하얀색 블라우스 위로 검정색 베스트, 남색 스커트를 받쳐 입은 옷차림은 말끔했다.
갈색의 숱 많은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올린 채였다.
“벨슈타인 대부인, 오늘도 무척 아름다우시네요.”
“어서 오게나. 자네 덕분이지. 아, 여기 이 천사 같은 아이가 내 손주 며느릴세. 자네가 솜씨를 한번 부려 주게.”
“오우.”
캐서린은 하이톤의 감탄사를 흘리더니 루시엘을 보면서 눈동자가 커졌다.
“공자비님을 드디어 뵙게 되네요. 캐서린 몽트엘입니다. 캐서린이라고 불러 주세요.”
“반가워요, 캐서린 부인. 그런데 저를, 아시나요?”
“물론이지요. 이벨린 님께 이야기를 전해 듣기도 했고, 차세대 사교계의 주요 인물로 물망에 올라 계신 분이니까요. 과거 영상구를 통해서도 뵈었지요.”
“앗, 어쩐지 부끄럽네요.”
“제가 그걸 보고 얼마나 칭찬을 했는데요. 어린 나이에도 얼마나 영특하게 발표를 잘하시는지. 귀엽고 예쁘셨어요.”
“감사해요, 캐서린.”
그런데 보통 단장을 해 주는 직업이라면, 여러 사람들이 같이 올 텐데 그녀는 혼자였다. 게다가 짐도 달랑 가방 하나뿐이었다.
“아…… 그런데 혼자 오신 거예요? 테일러라면 정확히 어떤 단장을 도와주시는 것이에요?”
“좋은 질문이에요. 머리 스타일과 피부 결 관리, 화장, 옷이나 신발, 장신구 등 전반적으로 다 도와드린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보이지 않는 곳까지 책임지지요. 향수 마법도 할 줄 알거든요.”
“엇, 베아트리체처럼요?”
그 이야기를 들은 루시엘이 되묻자 캐서린이 호호, 웃었다.
“네, 사실 베아트리체에서 잠시 일한 적이 있었답니다. 지금은 독립해서 일하고 있고요.”
“그렇군요. 그럼 거기를 드나드는 손님들에 대해 잘 알겠어요. 사교계의 소문들에도 민감하고.”
“네, 그런 편…… 이지요.”
캐서린은 순간 아차 싶었던 모양인지 말을 얼버무렸다. 루시엘은 이벨린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캐서린이 가방을 여는 사이에 이벨린이 은근슬쩍 떠보듯 물었다.
“혹여 궁금한 것이 있으면 그럼 자네에게 물어보면 되겠구먼? 소문이나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 터이니.”
“호호, 그런 것은 정보상이나 정보 길드에 가셔서 의뢰해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지요. 대부인.”
‘정보상’이나 ‘정보 길드’, ‘의뢰’라.
꽤나 전문적인 용어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루시엘은 과거 저편에서 흐릿하게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 테일러가 도착했습니다.’
레이놀드는 가만히 있다가도 그의 테일러가 왔다고 하면 얼른 뛰어나갔다. 두 시간이 넘게 치수를 재는 적도 있었고, 다녀와서 싱글거린 적도 있었다.
테일러가 오고 가면 반드시 팔로스와 함께 무언가를 논의하고 상의했다. 루시엘에게 보석을 요구하기 위해, 환각 마법을 거는 순간에도 테일러가 왔다고 하면 뛰어나갔다.
정확한 내용은 들은 바 없지만 테일러를 통해 어떤 긴밀한 정보가 오가고 있음은 유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일러들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적어도 셋 이상.
그렇다는 건…… 테일러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정보 조직인 걸까?
“저는 그저 테일러일 뿐이랍니다.”
캐서린이 눈을 내리깔았다. 모른 척하려는 듯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베아트리체를 아까 이야기하셨지요? 거기가 서비스는 한 수 위지만, 저는 마법으로 편리하고 간단하게 단장을 도와드리고 있어요.”
“아하, 확실히 시간도 절약되고 편리하겠어요.”
루시엘은 일단은 그녀의 말에 차분히 맞장구를 쳐 주었다. 단장을 다 받은 다음, 그녀의 정체를 추궁해 보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테일러를 두는 건 바쁜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절약할 좋은 방법인 듯했다.
최근 로즈가 임신을 하면서 베시가 루시엘의 단장을 혼자서 맡고 있었는데, 그녀의 일손을 덜어 줄 수 있을 듯했다.
“네, 요즘 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테일러를 이용하는 추세이기도 하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단장하기 전에 목욕부터 들어가 볼까요?”
캐서린의 말을 들은 루시엘은 잠자코 제 방을 정돈하고 있던 베시를 바라보았다.
“목욕 시중은 원래 도와주던 베시에게 받을게요.”
낯선 사람에게 몸을 보여 주는 건 아직 루시엘에게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얼른 목욕을 마치고 오자, 캐서린은 날카로운 눈으로 루시엘의 요모조모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왜 그러세요?”
“타고난 피부와 몸매, 얼굴과 이미지도 모두 순백의 백지 같아요. 공자비님께선 무엇이든 잘 어울리시겠어요. 제 예술혼이 불타는 모델감이란 말이지요.”
“……으응?”
캐서린이 가방 안쪽에서 접이식으로 된 가느다란 마법 지팡이를 꺼냈다.
그녀가 주문을 외자 분홍빛의 소환진 위로 커다란 책자와도 같은 것이 소환되었다.
톡 누르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형식이었다. 이벨린도 다가와서 호기심 어린 눈을 빛냈다.
“이번 봄 시즌의 최신 유행 매거진이에요. 원하는 스타일을 골라 주시면, 마법으로 체험시켜 드릴게요. 베아트리체나 몇몇 부티크와 전속 계약을 맺어 두어 그곳의 의상들도 바로 입어 보실 수 있답니다.”
“와…… 그동안 뷰티 쪽도 이만큼이나 발전했군요?”
“어머, 요즘 소녀들답지 않은 말씀이시군요.”
캐서린이 호호 웃으면서 루시엘에게 매거진을 넘겨, 여러 스타일을 소개시켜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