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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77)화 (177/282)

<177화>

“저를, 아니 벨슈타인을 지키기 위한 방비를 단단히 해 두어야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정보가 필요합니다.”

창밖의 사시사철 푸른 휴양림을 바라보던 랜버트 후작이 한참 뒤에 뒤를 돌았다.

공작은 사뭇 진지한 눈이었다.

솔리아페와 결혼하기 전날에도 찾아와 저런 눈을 하고 있었지.

‘다시는 따님을 보지 못하실 겁니다. 이 결정은 온전히 솔리아페의 뜻이고, 저는 그걸 존중할 겁니다. 하지만 솔리아페의 행복을 위해서 죽을 각오를 다할 테니, 그 점에선 마음 놓으시라고 이렇게 왔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일 겁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렇게 이별 인사까지 하고 갔던 벨슈타인 공작이 제 발로 먼저 찾아온 것은, 그의 여생에서 근래 들어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랜버트 후작은 이미 노쇠한 노인이었다.

“나는 이미 끝났소, 공작. 오래전에 정보를 다루는 일은 손을 뗐다네. 알지 않는가. 그쪽 일은 한 몇 달만 쉬어도 다 끝난 일로 치부된다는 것을…….”

랜버트 후작의 말에 공작은 포기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크로우의 수장이 손을 놓았을 뿐, 정보는 여전히 그를 향해 흐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움직이지는 않으시더라도 후계를 들여 관리는 하고 있으신 게지요?”

넘겨짚는 말에 랜버트 후작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착석하며 물었다.

“……크흠. 도대체 뭘 알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드디어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마음이 생긴 듯했다. 공작의 핏빛 눈에는 불꽃이 일어날 듯 빛났다.

“발루크의 실체와 모든 것. 5년 전부터 완전히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발루크는 유령이지. 워낙 정보가 흐르지 않는 놈들이야.”

“그러니 장인어른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하면, 내 정보가 유독 값이 나간다는 것도 알고 있겠소만.”

랜버트 후작이 주름진 눈을 휘며. 씩 웃었다.

“얼마를 원하시든 드릴 수 있지만, 돈보다도 더 값진 것을 드리겠습니다.”

“뭘 내어주려고 그러나?”

“손주들을 멀리서 보시는 건 이제 지겹지 않으십니까?”

“……!”

몹시 흔들리는 랜버트 후작의 푸른 눈을 보면서, 공작은 이 거래에선 확실히 우위를 점하겠다 싶었다.

‘토끼같이 귀여운 손주 며느리도 생겼습니다, 장인어른.’

얼마 후 공작은 명함 하나를 받아 들고는 귀환했다.

* * *

배당금 수령처라고 적힌 사무실에서 이제 막 우승 배당금을 수령하고 나오는 막시무스를 다시 만난 노아는 어색하게 어깨를 살짝 틀었다. 그러자 막시무스와 살짝 부딪치게 되었다.

“아…… 죄, 죄송합니다.”

“아이, 뭐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가던 길 가세요.”

기분이 좋은 막시무스가 배당금이 든 봉투를 소중히 품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옆 좌석에 앉았다.

뭘 하나 봤더니 돈을 세고 있었다. 노아도 어색하게 그를 따라 옆에 앉았다.

일단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자신이 제대로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원래 호위 기사는 이런 일도 하는 건가?’

무엇보다 아가 마님이 자신에게 시킨 첫 번째 임무였다.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지만, 그의 내향적인 성격으로는 퍽 난감한 일이긴 했다.

보좌관인 엘링턴 스튜어트 경이나 다른 기사들과는 달리, 그는 벨슈타인 내에서도 얼굴이 덜 알려졌고 어설픈 게 딱 일반 사람 같다면서 맡겨졌다.

게다가 막시무스와 완전 초면이었다.

‘노아, 연기력이 살짝 필요해. 막시무스 폰 카빌에게 접근해 줘. 최대한 자연스럽게 후원 이야기를 꺼내는 거야. 그냥 바람만 넣어 주면 돼. 그는 단순해서 쉬울 테니까.’

어차피 막시무스라는 자는 수중에 큰돈이 없으니, 더 큰 배당금을 따기 위해 후작가로 손을 벌리러 갈 것이 틀림없다고.

레드스네이크의 새끼인 스칼렛코브라에게 카빌가의 전 재산을 후원하도록 유도하는 계획의 첫 바람잡이 역할을 노아가 맡은 것이었다.

“쯧, 패물을 좀 남겨 둘 걸 그랬군. 아쉬운 대로 이 돈으로 다음 경주도 마저 베팅할까?”

‘막시무스는 배당금을 타자마자 바로 또 경주를 시작하려 할 거야. 그 적은 돈에 만족할 리 없지. 그때 슬쩍 노아도 배당금을 탔고 이후 투자 계획이 있다고 이야기도 하면서 접근하는 거야.’

과연 루시엘 아가 마님의 예측대로였다. 노아가 용기를 내서 말했다.

“와, 아. 배, 배당금은 처음 타 보네. 와이번 경주 재밌네……. 거, 그쪽은 얼마나 따셨습… 니까?”

긴장한 탓에 말의 높낮이가 다소 이상하게 나왔다. 막시무스가 노아를 수상한 눈으로 보면서 봉투를 슥 감췄다.

“형씨, 뭔데?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속으로 울고 있는 노아였다.

* * *

마차를 타고 트랙을 가로질러 도착한 와이번 사육장은 탁 트인 언덕에 위치했다.

건너편에는 마지막 경주까지 끝나고 다소 한산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쉬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와이번 경주는 많은 사람에게 대박을 향한 환상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그 돈이 전부 자신의 것이 될 거라는 헛된 부자의 꿈.

미리 정보를 알지 않았더라면 루시엘은 절대로 와이번 경주장에 오지 않았을 터였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와이번 사육 매니저가 공손히 맞이했다.

“스튜어트 선생님,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고맙군. 우리 귀여운 숙녀분께서 와이번을 보고 싶다고 조르는 바람에 같이 데려왔으니 안내를 부탁하지.”

성인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가 거금을 와이번에 후원 투자를 한다고 하면, 쓸데없는 관심이나 안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어른인 엘링턴의 명의를 빌리기로 했다.

엘링턴이 모자를 쓴 채로, 루시엘이 마차에서 내릴 수 있게 손을 잡아 주었다.

루시엘이 발랄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삼촌. 너무너무 좋아요.”

“허허, 참 좋은 삼촌이십니다.”

엘링턴이 몰래 루시엘에게 속삭였다.

‘아빠 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그럼 절 몇 살에 낳은 걸로 하려고요.’

‘입양이요.’

그런 대화를 소곤소곤 마치고 나서 엘링턴이 중절모를 다시 눌러쓰곤, 말했다.

“험험. 그래, 블랙스콜피온을 어서 보여 주시오. 기대되는군.”

“보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매니저가 사육장 울타리의 열쇠를 열고는 안쪽으로 들어가며 손짓했다.

그러나 바짝 굳은 엘링턴이 말했다.

“아,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 말고, 데려와 줄 순 없나?”

그러자 사육 매니저가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녀석이 좀 포악한 성격이라 말을 잘 안 듣습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물지는 않으니까요.”

그때 안쪽에서 으아악, 비명이 들려오고는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사육사 하나가 피를 흘리며 도망 나왔다.

“저, 저놈이 물었어!”

“……자, 자, 잠깐만 대기해 주십시오.”

안내하던 매니저는 안쪽으로 들어갔고, 다친 사람은 울타리를 넘어와 털썩 주저앉았다.

아수라장이 되자, 엘링턴이 사색이 된 얼굴로 루시엘에게 말했다.

“조카야, 굳이 직접 보고 후원을 마칠 수 있는 건 아니니 사무실로 다시 돌아갈까?”

“……아뇨. 다 왔는걸요, 삼촌.”

그러나 루시엘은 다친 사육사에게 얼른 달려갔다.

“두 사람! 저 사람 치료할 동안에 혹시 와이번이 튀어나올지도 모르니까. 호위를 부탁해요.”

“예!”

루시엘이 챈들러와 이네스에게 명령하자, 그들이 곧장 루시엘 주변을 호위했다.

“삼촌도 정신 챙겨요.”

“……으응, 그, 그래.”

엘링턴은 얼른 마차로 돌아가서 코트에서 호신용 단검을 챙겨 나왔다.

그사이 루시엘은 힐을 시전했다. 그러곤, 두르곤 있던 숄로 가린 다음 다이아몬드에 성수를 부어 환자의 상처 위에 올려놓았다.

찢긴 상처는 금방 치료되었고 자신의 피를 보고 기절했던 사육사도 정신을 차렸다.

가벼운 상처는 마나와 다이아몬드의 힘만 소모되었기에 루시엘은 얼른 다이아몬드를 다시 옷 속에 숨겼다.

“허. 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아프지 않군요.”

그의 옷에는 여전히 피가 묻어 있었고, 상처도 목숨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위급하지 않게끔만 최소한으로 치료했다. 완전히 낫게 하면 괜히 그녀의 정체를 의심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에요, 다행히 상처가 깊지 않았나 본데요.”

“아, 아. 저는 피를 보고 너무 놀라서. 기억도 제대로 안 나네요.”

“근데, 어떻게 된 거예요? 와이번들이 훈련이 덜 되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건가요?”

“아뇨. 이 정도로 크게 공격성을 보인 적은 없습니다.”

사육사도 처음 겪는 일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아까 안내를 해 주었던 사육 매니저가 돌아왔다. 여러 명의 사육사들이 그 뒤를 따라 쇠창살로 막힌 우리를 끌고 왔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갑자기 저 녀석이 이상하게 날뛰는 바람에……. 저 녀석입니다. 블랙스콜피온.”

-크아와앙!!

철제 우리 안에 갇혀 있는 블랙스콜피온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둥글고 납작한 얼굴에 눈코입이 귀여웠다. 작지만 날렵한 몸뚱이와 꼬리와 날개까지 이어진 하얀 반점을 가진 검은 와이번이었다.

무시무시한 이름에 비해서는 귀여운 외견이었다.

“너무 귀여운데요. 이름이랑 전혀 달라요.”

루시엘이 감탄하자, 블랙스콜피온이 크와왕 이쪽을 향해 입을 벌리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분노한 녀석의 꼬리 끝이 일순 날카로워지더니 팽그르, 돌며 사방을 경계했다.

“저래 보여도 저 귀여운 몸에 부딪히면 머리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갑각류처럼 단단하거든요. 블랙스콜피온이라는 이름도 저 꼬리로 전갈의 독침처럼 빠르게 상대를 공격한다고 해서 붙여진 것입니다. 야생 성체의 경우에는 저 꼬리로 공격하면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만, 걱정 마십시오. 저희가 안전하게 훈련시킬 테니까요.”

매니저가 그렇게 설명했지만 엘링턴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과, 과연. 저, 잠시 우리끼리 대화 좀.”

마차 안으로 루시엘을 데려간 엘링턴이 말했다.

“아가 마님, 저렇게 위험한 걸, 후원하는 게 맞는 걸까요?”

“걱정 말아요. 우리가 직접 하는 것도 아닌걸요. 그리고 저 와이번이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요.”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루시엘은 이벨린 할머니가 해 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루시엘,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너에게는 많은 것들이 꼬여들 수도 있단다. 간혹, 요정의 마나에 환장해서 상태가 안 좋아지는 녀석들도 있지. 그건 어쩌면 네가 길들일 수 있는 녀석이라는 뜻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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