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시내의 주점은 낮이지만 사람이 와글거렸다. 건물 뒤편에 바로 커다란 도박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도박장에서 돈을 딴 자들은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돈을 잃은 자들은 기분이 구리면 구린 대로 밤낮없이 술을 마셔 댔다.
막시무스의 경우는 후자였다.
오늘따라 씁쓸한 기분에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건너편 테이블에 얼마 전까지 저를 꼬시던 제인이 오늘은 다른 사내 옆에서 웃고 있었다.
돈을 잃는 날이 매번 늘어나서 줄어드는 돈은 딱히 체감이 안 되었지만, 여자에게 차이는 이 거지 같은 기분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인이 그때 막시무스를 알아보았는지, 슬그머니 남자와 함께 자리를 빠져나갔다.
저 좋다고 먼저 들러붙을 땐 언제고.
카빌 후작가의 큰 도련님으로 모두가 굽신거리는 환경에서 부유하게 자랐지만, 여기서는 그 누구도 자신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의 몰골은 아무래도 귀족가 도련님과는 거리가 멀었다.
싸구려 비단으로 만든 옷과 신발, 노후한 여관은 샤워실조차 없는 탓에 제대로 씻을 수도 없어 미끈하던 얼굴은 노숙자 저리 갈 정도였다.
‘하기야 집을 나온 지 벌써 일 년이 넘어갔군.’
몰래 훔쳐 온 어머니의 패물이나 돈이 될 만한 물건도 이제 다 팔아서 없었다.
집사나 어머니에게 연락해도 이제 제 서신에는 답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인 카빌 후작을 찾아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매타작을 당할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돈도 많으면서, 하나뿐인 아들을 쥐 잡듯이 닦달을 하시나. 이거야 원. 아니, 그러다가 나도 페넬로페 계집애처럼 아예 날라 버리면 어쩌려고?’
막시무스는 콧방귀를 뀌면서 주머니 속 동전을 세어 보았다.
수중에 남은 돈은 이 술값을 계산하고 나면, 며칠 밤 여관비밖에 남지 않는다.
“딸꾹!”
속상한 마음에 연거푸 술을 마시던 막시무스가 잔을 쿵, 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생각할수록 기가 차는 일이었다. 간밤에는 정말로 감이 좋아서 크게 한탕 따는 줄로만 알았는데.
처음 룰렛을 돌릴 때만 해도 베팅한 영역이 한번 걸려 감이 좋아 베팅액을 올렸더니 다음, 그다음 판부터 쭉 말아먹었다. 일곱 판을 내리 쭉.
“하아, 빌어먹을. 그놈이 나를 속여 먹은 게 틀림없어. 그러지 않고서야 이 내가 일곱 번이나 털릴 리가 있냐고오! 히끅.”
거칠게 혀 꼬부라진 소리로 중얼거려도 취객 몇몇이 주목할 뿐.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제엔장.”
그때였다. 옆 테이블에 사내들이 생전 처음 듣는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는 것이 들려왔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와이번 경주 대회가 오늘 열린다던데?”
“와이번이라니, 그건 마물이 아닌가? 경마는 들어 봤어도 내 평생 그런 대회가 있다는 건 처음 듣네만.”
“그래, 그래. 경마랑 비슷한 개념이지. 아, 글쎄 말 대신에 와이번이 달리는 대회라지 뭔가! 이번에 최초로 나왔다고 하더군. 다들 그 이야기로 난리인데 이거 참 둔한 친구로구만.”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게졌던 막시무스는 술이 깨는 것 같았다.
“와이번? 경마?”
처음 듣는 별세계 같은 이야기에 막시무스도 호기심이 생겼다.
그리고 잠시 후 들어온 다른 일행들도 온통 그 이야기였다.
와이번 경기가 벌써 다 매진에 가깝더라.
경기에서 우승하면 경마에 비해서 배수가 높더라.
후원 제도가 있더라.
제대로만 터지면 몇십 배는 우스운 수익이 될 거다.
등등 와이번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하는 인간이 없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제국 내에 곧 와이번 경주 열풍이 불어닥칠 것만 같았다.
이건 그야말로 신이 주신 기회 같았다. 그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카데미에서 퇴학 처분을 당하고, 지난 몇 년을 횡보하던 그의 인생이 스무 살, 지금부터 잭팟이 터질 모양이었다.
막시무스는 술에 찌든 제 뺨을 톡톡 두드리며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인생은 한 방이지. 이거야, 이거!”
그 길로 당장에 와이번 경주가 열린다는 경주장으로 달려갔다.
매표소 앞은 길게 줄지어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로 북적거렸다. 막시무스는 이 사람들의 돈이 다 제 주머니로 들어올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 방긋 미소 지었다.
* * *
원형의 와이번 경주장은 과거에 경마장으로 쓰이던 공간을 개조해 만든 모양이었다.
타원형의 트랙과 널따란 관람석, 그리고 건너편으로는 와이번 사육장이 보였다.
곳곳에는 와이번 경주 대회에 출전하는 와이번의 이름과 생김새가 그려진 깃발들도 나부꼈다.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목소리를 크게 울리게 하는 마도구를 이용해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국 최초로 개설된 와이번 경주장을 찾아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삼십 분 전부터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사회자의 인사에 지친 관람석의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고 원성이 높아졌다.
“거 참 바쁜 사람들 모아 놓고, 질질 끄는 것이 지나치군.”
“빨리빨리 시작하란 말이오!”
일부 화가 난 관람석의 손님들은 모자를 던지기도 했다. 생각보다 더 과열된 분위기에 사회자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얼른 순서를 전달받고 진행했다.
“본 경기에 앞서 와이번 후원 제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열띤 환영으로 미래의 경주를 책임질 어린 와이번들을 맞이해 주십시오.”
일부에선 본 경기는 도대체 언제 시작하느냐고, 불만 섞인 목소리도 있었지만 대부분 잠잠해졌다.
와이번이 마물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다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와아!”
처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와이번들은 제각기 달랐지만, 공통된 점이 있었다.
거대한 도마뱀을 닮았고 온몸은 비늘로 둘러싸였으며 발달한 두 다리로 서 있지만 한 쌍의 날개와 긴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제법 생김새들이 다 달랐다. 어떤 녀석은 뿔이 달렸고, 어떤 녀석은 이빨이나 손톱이 날카로워 제법 무시무시했다.
반면에 매끈하고 둥글게 생긴 귀여운 인상의 와이번도 있었다.
크기도 황소만큼 커다란 것이 있는가 하면, 강아지처럼 작은 녀석도 있었다. 색도 검은색부터 흰색, 붉은색까지 다양했다.
불을 뿜는 녀석도 있었는데, 다들 그 와이번에 후원을 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탕, 탕!
이내 와이번 경주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다다다다!
와이번들이 트랙을 따라서 거침없이 질주했고, 그 위에 올라탄 기수들도 고삐를 더욱 당겼다.
미친 듯 달리는 속도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였다. 다들 신기한 눈으로 경주에 집중했다.
“달려라, 달려! 가자, 레드 스네이크!”
“썬더블루가 일등이지!”
열광하는 사람들 틈 속에 막시무스도 레드 티켓을 흔들며 열광했다. 수중에 가진 돈을 다 걸었다.
자신의 머리 색과 같은 레드 스네이크는 아까 불을 뿜던 새끼 와이번의 어미였다. 그 녀석보다도 더 덩치가 크고 날렵해 보였다.
출발 게이트에서 결승 지점까지 엎치락뒤치락했지만, 기어코 레드스네이크가 승리했다.
“크아아아, 이겼다!! 1등이다. 레드 스네이크! 끝까지 가즈아!”
막시무스는 옆에 있던 검은 머리 청년을 난데없이 얼싸안고 흥에 겨워 외쳤다.
그 모습을 망원경으로 살펴보던 루시엘은 피식 미소 짓고는 특별관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역시 나타났구나, 막시무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의 꼴을 보아하니 생각보다 더 망가져 있는 것 같지만, 상관없었다.
루시엘은 오렌지 에이드를 빨대로 쭉 빨아 마시고는, 곧 제게 다가오는 엘링턴을 보며 색안경을 벗었다.
“아가 마님, 후원을 확정 짓기 전에 확인 겸 와이번 사육장으로 직접 가서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담당 매니저가 이동 마차를 대기시켰다고 합니다.”
“좋아요. 블랙스콜피온을 나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으니까요.”
본래라면 아까 공개되었어야 했지만, 녀석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쉬게 할 거라는 이야기를 미리 전달받았다.
선금을 보내, 후원을 예약했더니 와이번 사육 매니저가 알아서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사실상 블랙스콜피온은 왜소하고 동글동글한 외견이었기에, 경주를 하기에 용이해 보이는 녀석은 아니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일 처리를 확실히 해 두는 편이 좋았다.
루시엘은 다시금, 막시무스가 끌어안고 있는 노아를 바라보았다.
후원 건은 확실히 루시엘의 뜻대로 흘러갈 듯하지만, 막시무스 쪽은 노아가 어떻게 연기하느냐에 따라 달렸다.
‘노아, 힘내 줘.’
* * *
랜버트 후작령은 황도 아르테에서는 마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테스나 휴양림에 있었다.
한때 랜버트 후작가는 황실과 가까운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이제는 모두 옛 영광에 지나지 않았다.
솔리아페가 황태자비 경연을 포기하고 물러나던 그때, 후작 자신도 실의에 빠져 황성의 고위 관직에서도 물러났다.
지나간 세월 때문인지, 한결 유해진 인상의 랜버트 후작이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그의 주름진 눈 아래 푸른 동공에 이채가 떴다.
놀라움 반, 반가운 반인 기색에 루이비드가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벨슈타인 공작! 자네가 나를 찾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솔리아페는 알고 있소?”
“아니요. 제가 황도에 온 것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간 남처럼 지내 온 세월이 벌써 얼마였나. 자그마치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었다.
솔리아페가 결혼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인연을 끊다시피 했으니.
그땐 황후의 자리를 그토록 쉽게 포기하는 딸 아이가 미웠다. 솔리아페 역시 자신을 원망하고 있겠지.
이만큼 세월이 지나고 나니 그렇게 치열하게 싸워 온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만.
그러나 이제 서로 손을 내밀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감정의 골이든 세월이든 너무 깊었다.
어쨌든 그 일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잘난 공작 사위의 얼굴을 보았다.
“그래,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어서 오셨소?”
“장인어른께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모든 걸 다 가진 벨슈타인 공작이 나에게 부탁이라? 허허. 이해가 되질 않는군.”
“제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모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호크아이의 정보도 이제 끝물이더군요.”
“……허허. 그래서? 본론이 무엇인가?”
“비밀 정보 조직 ‘크로우’의 마스터셨잖습니까. 다시 운영하실 생각 없으십니까?”
“……그런. 내 뒤를 캔 건가? 그 정도 정보력이면 내가 필요 없을 듯한데.”
랜버트 후작이 부채를 접고, 크흠 뒷짐을 지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