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75)화 (175/282)

<175화>

루시엘을 보니 과거가 떠올라서 멍하면서도 슬픈 얼굴이 된 노아를 보면서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이야?”

“아뇨, 옛날 생각이 잠깐 나서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가족 생각?”

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엘도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우리 언니도 하늘로 갔어.”

“……!”

“나를 보호해 주려다가. 언니도 어리고 약했으면서…….”

루시엘이 담담하게 꺼낸 말에 노아의 눈동자에도 파문이 일었다.

“그런, 아가 마님의 언니는 무척 강한 분이셨을 겁니다.”

“맞아. 그래서 나도 더 강해질 거야. 노아도 그리운 가족이 있어?”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루시엘은 나무 그루터기로 가서 앉으며 경청했다.

미카엘 고아원에 버려지기 전 노아에게도 가족이 있었다. 평범하게 농사를 지으면서 소작민으로 살던 부모님과 노아, 그리고 하나뿐인 여동생 미아.

착하디착해서 길가에 버려지거나 다친 동물을 모른 척하지 못하던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오빠, 이 고양이가 너무 가여워. 집에 데려가자. 응?’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삶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에 걸려 죽고, 어머니는 마을 영주인 남작과 결혼하기로 약속한 뒤 가족들과 헤어지면서 평화는 깨졌다.

남작은 어머니와 미아는 남작가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지만, 노아는 죽은 아버지를 닮았단 이유로 미워하고 적대시했다.

결국 어머니에게는 아이를 잃어버렸다면서 노아를 몰래 고아원에 보내 버렸다. 그게 노아의 나이 열두 살, 벌써 칠 년도 더 된 일이었다.

고아원에서 도망치려고 했지만 남작이 원장에게 따로 부탁을 했는지 다른 아이들보다 감시망이 더 촘촘했다.

남작은 어머니가 마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만을 전했고, 미아의 이야기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이제 미아는 어엿한 남작 영애로 자라서 자신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동생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남작보다 더 이름이나 명예가 높아지면, 어쩌면 미아를 다시 데려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잠자코 노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시엘이 위로했다.

“그랬구나. 힘겨운 세월이었겠지만 잘 견뎠어. 그래도 만날 동생이 있다니 너무 잘됐어.”

어느새 루시엘에게 제 과거를 전부 털어놓고 말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는 속내를 누군가에게 잘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분에게는 저도 모르게 마음을 열고 말았으니. 노아가 머쓱해져선 말했다.

“제가 너무 쓸데없이 긴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아니야. 들어서 좋았는걸.”

“…….”

노아가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아가 마님께서 너무 맑고 순수해서 저도 모르게 털어놓은 것일지도요.”

슬쩍 그의 경계심이 풀린 틈을 타서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며 나무 그루터기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아는 분명 강한 검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검에 재능도 있고, 성실하고 겸손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어. 꾸준히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게다가 동생에게도 좋은 오빠였던 것 같네.”

루시엘의 말에 노아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동생을 되찾지 못했으니 좋은 오빠는 못 된 것 같습니다.”

“……아니야, 아직 끝나지 않았어.”

힘없는 노아의 말에 루시엘이 고개를 저었다.

“좋은 오빠가 될 기회, 아직 충분히 남아 있어. 그러니까 노아, 내 기사가 되어 줘. 동생을 다시 만나는 일은 나도 협조하겠어.”

루시엘의 제안에 노아의 마음이 흔들렸다.

어머니의 마지막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뿐인 동생은 꼭 다시 만나고 싶었다.

“강한 검사가 되어서 동생 앞에 누구보다 당당한 오빠로 가는 거야. 나와 함께.”

루시엘이 다시금 말했다.

어쩐지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무릎을 꿇고 결연한 눈동자로 말했다.

“노아 반. 부족한 실력이지만 충성을 다해 지키겠습니다.”

나부끼는 바람에 노아의 짧은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지만, 그 마음만은 굳게 다가왔다.

“나도 잘 부탁해.”

짧은 인사와는 달리 루시엘 역시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이번 생에서는 당신의 그 재능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길 바랄게.’

그렇게 루시엘의 세 번째 호위 기사가 정해졌다. 자르가에게 보고를 들은 공작가의 3대가 달려와 노아를 유심히 살폈다.

“이놈인가.”

공작의 붉은 눈이 낮게 구르면서 노아를 예리하게 살폈다.

노아가 평생 이렇게 따가운 눈총을 받아 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벨슈타인 공작가의 세 사람이었다. 웬만한 자였다면, 그들이 뿜어내는 위압감과 살기에 눌려 벌벌 떨고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고개를 숙일지언정, 떨고 있지는 않았다.

“노아, 각하께 시범을 보이거라.”

노아가 침착하게 다른 기사를 제압하고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실력은 제법 쓸 만하군. 한데 신분이 평민이라고?”

공작의 눈썹이 까딱 치켜 올라갔다. 바짝 긴장한 노아가 대답했다.

“예.”

보고 있던 루시엘이 나섰다.

“……아빠가 저를 위해 사다 주신 말을 노아가 정성껏 길렀다고 해요. 감동이에요.”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며 공작의 팔에 매달리자, 그의 입가가 풀리며 말했다.

“……그래? 뭐 눈에 차는 놈은 아니다만 정성은 감안하지. 합격.”

“흐음, 눈빛이나 태도는 침착해 보이니 괜찮은 것 같구나. 게다가 루시엘이 골랐다고 하니, 믿어 보지.”

공작과 길리아트의 합격이 떨어졌지만, 레오니는 불퉁한 얼굴로 새침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저는 반대인데요.”

루시엘 옆에 저렇게 체격도 좋고 젊고 잘생긴 남자가 늘 있다고 생각하니 안 될 것 같았다.

레오니의 눈에 불꽃이 팍 튀었다.

저 남자에게 빼앗기느니, 키제프 형이 낫겠어.

“……레오니, 이유가 있어?”

“어? 그게 아니라. 누나는 내가 마법사님 되어서 지켜 주기로 했잖아!”

“루시엘의 마법사님은 내가 맡도록 하지.”

“이 할애비도 있다.”

“아빠, 할아버지……. 그, 그만 하세요.”

공작에 이어 할아버지의 주접에 루시엘은 그만 그 자리에서 숨고 싶어졌다.

마지막으로 솔리아페가 나타나 자신이 루시엘의 네 번째 기사님이라고 말해 모두를 벙찌게 만들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작전을 개시하기 위해 루시엘은 세 명의 호위 기사와 엘링턴까지 함께 가세해 황도의 타운하우스로 왔다.

보호자 명목으로 솔리아페와 이벨린도 따라왔지만, 그들도 황도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날이 따뜻해지는 봄이었으니 어느새 사교 시즌이 훌쩍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때아닌 지방의 소영주부터 시작해서 한몫 잡으려는 부유한 상인들까지 많은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제국 역사상 전례 없는 새로운 유흥거리가 생긴 것이니까.

많은 제국민들이 기대하는 검투 대회가 열리는 건 가을쯤이고, 경마는 한때 큰 유행을 탔지만 이제는 한물가서 시들해진 감이 있었다.

루시엘은 듣기 싫은 쇳소리 같았던 막시무스의 말을 떠올렸다.

‘루시엘, 이 남편님께서 돈을 좀 벌어 보려는데 말이야. 보석 좀 더 만들어 봐 봐. 어? 시커먼 거라도. 최대한 많이.’

과거 막시무스는 후작가를 나가 도박장에서 틀어박혔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제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저택으로 돌아와 루시엘에게 강제로 보석을 만들도록 괴롭히고 그 보석들을 갈취해 갔다.

도박장에 눌러앉은 지 몇 년이 지났어도 그는 늘 돈을 잃기만 했는데, 어느 날 제법 큰 투자 아이템을 발견했다면서 좋아했던 적이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제국에는 이미 경마나 마창 경기, 검투 시합 같은 사행성 경기가 유흥 문화로 자리 잡았지만 새롭게 떠오른 게 있었다.

바로 경주용 와이번에 투자를 하는 일이었다. 막시무스 같은 놈팡이가 손댄 일치고는 제법 합법적인 사행성 오락이었다.

평소 지식을 쌓는 일에는 관심도 없던 막시무스가 밤낮 경주용 와이번에 대한 것들을 달달 외우는 바람에 루시엘도 자연스레 약간의 지식을 알게 되었다.

와이번 한 마리를 훈련하고, 육성하는 데에는 경주마의 수배 이상 비용과 노력이 들어서 후원 제도가 있었다. 자신이 후원한 와이번이 승리를 하면, 수익금의 일부가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특히 연승을 달성하면 몸값이 수십 배에서 수천 배로 뛰기도 했다. 그런 막시무스가 후원했던 와이번은 블랙스콜피온 320329번. 제국력 1032년 3월 29일에 태어났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제 곧 태어난 지 한 살이 되어 후원자를 모집할 시기가 다가왔다. 이 시기에는 그야말로 겉모습과 연습 경주만을 보고, 후원을 하는 것이기에 연습 경주에서 꼴찌를 담당하던 블랙스콜피온의 배당률은 무척이나 높았다.

막시무스가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블랙스콜피온에게 진즉 투자했어야 하는데!’

였다. 사실 막시무스가 투자한 건 1037년, 블랙스콜피온의 몸값이 제법 상승한 후라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럼에도 그의 수익률은 무려 160%에 달했다.

하지만 루시엘이 그에 앞선 시점인 지금부터 후원을 시작한다면, 약 6개월 뒤부터 수익률이 가파르게 상승해 투자액의 1024%, 즉 10배가 넘는다.

세월을 거듭할수록 수익률은 상승해 훗날이 되면 40~100배까지도 노려 볼 수 있었다.

막시무스는 아직 그 정보를 모르고 있을 시기이긴 하지만 도박장을 전전하고 있다니 그보다 빨리 그 와이번, 블랙스콜피온을 찾는 것이 관건이었다.

‘현재 날짜는 3월 27일. 후원을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날짜는, 블랙스콜피온이 한 살이 되는 3월 29일이야.’

와이번 경주 대회가 열리는 건 27일, 오늘이었다. 오늘부터 어린 와이번들의 연습 경주를 보고, 후원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공식적일 때의 이야기. 비공식적인 후원이 가능한지는 가서 부딪쳐서 알아낼 수 있겠지.’

루시엘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생크림이 든 쿠키를 집으며 말했다.

“엘링턴, 오늘 와이번 경주장으로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마차를 대기시켜 주세요.”

루시엘의 말에 엘링턴의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가 마님, 후원을 시작할 수 있는 날짜는 모레부터인데요? 제가 지난번에 경주장에 가서 매니저도 만나 보고 왔지 않습니까. 아하, 미리 후원할 녀석의 모습을 한번 보시려는 겁니까?”

엘링턴의 추측에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것도 그렇지만 공식적인 후원은 29일이어도 비공식적인 후원은 혹시 가능할지 모르잖아요? 일단 가서 찔러 보자고요.”

“아하! 되든 안 되든 그게 정답이긴 합니다. 알겠습니다.”

엘링턴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