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잘 익은 석류알처럼 붉디붉은 보석은 마치 벨슈타인 가족들의 눈동자처럼 핏빛에 가까운 붉은색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붉은 장미 같은 이 보석의 이름을 루시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벨슈타인의 금고에서 보았으니까.
“이건 가넷이야.”
비슷한 붉은 계열의 보석이지만 루비보다 더 어둡고 빨갛다.
루비보다 찬란함은 덜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보석이었다.
가넷을 만드는 순간, 루시엘은 애써 묻어 놓고 있던 열망을 끌어 올렸다.
‘키제프가 돌아오길 바랐어.’
루시엘은 얼굴을 수줍게 물들였다. 그렇다면 가넷을 만드는 감정은 열망,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는 마음, 이를테면 욕심이랑 비슷한 것일까?
루시엘은 가넷을 핑크 다이아몬드와 함께 소중히 가방에 챙겼다.
‘새로운 보석이 생긴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지. 에리카에게 그동안 막혀 있던 연구를 다시 시작해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루시엘이 그렇게 다짐하다 문득 생각난 듯 이벨린 할머니가 주셨던 막스의 노란 봉투를 열어 보았다.
‘막스 씨, 뭘 보내신 걸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봉투를 열어 본 루시엘은 깜짝 놀랐다.
“어어?”
「루시엘 아가 마님께.
막스 하멜입니다. 그간 저를 이끌어 주신 덕분에 저는 점점 방향성을 찾고 규모가 커진 공방을 잘 운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조언해 주신 장인 길드도 창설했으니, 한번 놀러와 주십시오.
루시엘 아가 마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면 언제 어떤 일이든 두 팔 걷고 따라갈 테니 필요한 일은 말씀해 주시고요.
그간 벌어들인 수익금의 일부를 벨슈타인 은행을 통해, 루시엘 님 명의의 계좌에 전달했습니다.
제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루시엘의 은빛 눈썹이 축 처졌다.
“……아니, 힘든 일은 다 해 놓고. 수익금의 일부를 나한테 주면 어떻게 해? 이 착한 사람. 그렇지만 이게 막스 씨의 방식인 거야.”
루시엘은 기분 좋게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황금빛의 마법 통장도 꺼내서 확인했다.
“헉. 이, 이게 뭐지?”
마법 통장에는 여러 출처의 돈들이 띠링, 띠링 소리를 내면서 밀린 입금 내역을 알렸다.
루시엘은 눈을 의심했다.
매달 들어오는 루시엘 몫의 아기 영지 수익금과 플로린 부티크의 판매 대금, 매년 생일마다 오천만 틸링, 일억 틸링 등의 거금이 익명으로 입금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매월 공자비의 예산안으로 잡히는 금액도 있었다.
하멜이라는 이름은 제일 마지막에 띠링, 하고 천만 틸링이 입금되어 있었다.
“세상에…….”
사업을 하나 새로 시작해도 좋을 만큼, 자금이 넉넉했다.
고액을 보낸 익명의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벨슈타인의 성을 쓰고 있는 것 하나만은 틀림없었다.
“……나 좀 부자인가.”
루시엘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이내 미소 지었다.
“할머니가 그러셨잖아. 자고로 돈은 많을수록, 힘은 강할수록 좋은 법이라고.”
어느새 소파에 기대 잠든 피닉스 앞에 지팡이를 소환하자, 그녀는 루비 속으로 스르륵 깃들었다.
* * *
쏴아아아아!
에메랄드빛 물이 흐르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검은 옷 일색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희뿌연 물안개가 피어오르면서 수놓은 아롱진 무지개가 장관이었다.
요정 계곡.
아주 오래전 드락카의 땅에도 요정이 다녀간 모양이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현재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드락카의 땅 중에서 유일하게 물이 많은 지역이었다.
“요정이라…….”
누군가를 연상하게 하는 지명에 다물려 있던 마른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검은 망토의 후드를 벗어 내리자, 금빛 머리카락이 태양만치 환했다.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곱슬머리였지만, 타고난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햇살과 바람에 살짝 그을리고 단단해진 피부와 날카롭게 각진 턱, 음영이 진 깊은 이목구비와 가넷처럼 붉은 핏빛 눈은 그의 최종 목적지.
마지막 시련이 있는 검은 화산의 끓어오르는 붉은 용암과도 닮아 있었다.
그곳에는 악룡 호그누스가 살아 있었다. 상서롭고 지혜로운 빛의 힘을 저버리고, 탐욕에 눈이 멀어 모든 드래곤의 위에 서려다가 타락한 호그누스 때문에 드락카의 일부 마을은 불타 사라지기도 했다.
호그누스를 죽이고, 놈이 가지고 있던 사악한 힘의 구슬을 깨 버리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련이었다.
마지막 시련은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은 자가 나올 때마다 고대 석판에 매번 다른 것이 새겨지는데, 이렇게 강력한 시련이 나온 것은 근 수십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루시엘.”
키제프는 스피넬을 매만지면서 그녀의 이름을 웅얼거리듯 불렀다. 그 이름은 언제나 힘을 주었다.
수백 번, 수천 번.
이름을 부르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는 그 작은 아이가 바로 앞에서 그를 보고만 있을 것 같아서.
착각이나, 환상이라도 보고 싶었다.
“루시엘, 나에게 힘을 줘. 너에게 갈 수 있게.”
나직이 중얼거린 키제프가 뒤에 느껴지는 기척을 알아채고는, 하이드 마법으로 몸을 투명화시켰다.
파앗.
슷! 키이익!
상대는 열두 마리. 지능은 낮지만 단체로 몰려다니는 인간형 마물이었다.
키제프의 핏빛 눈동자가 번뜩이자, 손끝부터 퍼져 나가는 드래곤의 마나가 빠르게 주변으로 펼쳐졌다.
“윈드 커터(wind cutter).”
물결치듯 바람의 칼날이 날아가며, 일부 마물의 다리를 쓱삭 절단했다. 키이익, 비명이 터지며 마물들이 다리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스릉, 그와 동시에 키제프가 검을 빼 들면서 자세를 잡았다.
검과 공명하면서 드래곤 마나가 지잉, 울렸다.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은 후로는 심장에 채워진 드래곤 마나를 이용해 마법과 오러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다.
키이익!
단숨에 달려드는 세 놈을 따돌리고, 뛰어올라서 검으로 일격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검 끝이 머금은 보랏빛의 오러가 사방으로 선이 그어지듯 튀면서 뻗어 나가, 마물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미친 듯한 독주를 끝내고 키제프가 마른 숨을 몰아쉬자, 어느새 남은 건 마물의 시체뿐이었다.
피로 범벅이 된 로브 자락을 내려다보며 키제프가 자그맣게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키제프의 그림자에서 스르륵, 모습을 드러낸 레이븐이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옳지, 이제 마물의 생명은 잘도 앗아 가는군. 작별의 날이 곧 머지않겠어.”
“……기다려. 아직은 아니니까.”
피에 엉겨 붙은 옷자락이 피부에 달라붙어 끈적거리는 탓에, 키제프는 약간 짜증 난 기색으로 말했다.
“그래. 그래. 기다리는 건 아주 잘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드래곤의 힘이 더 강력해지는 드락카의 땅에서는 사신이 가진 어둠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지루해진 건지, 레이븐은 불평불만이 더 많았다.
그가 하는 일은, 이따금 키제프와 수다를 떨거나 손을 잡고 과거로 돌아가 루시엘과의 추억의 순간으로 데려가 주는 일이었다.
“루시엘 보고 싶지? 또 데려다줘, 천문대?”
“……이 꼴로 갈 수는 없으니, 계곡물에 씻은 다음에.”
키제프가 귓불을 붉힌 채로 대답하면서 망토를 걷어 내고, 상의를 훌렁 벗어 던졌다.
보기 좋게 갈라진 근육들이 이제 더는 소년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키제프, 남자네.”
레이븐이 농담했고, 키제프는 그를 쏘아보고는 아공간 포켓에 옷을 챙긴 다음,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루시엘, 이제 곧 너에게 갈게.’
키제프는 그리 다짐하듯, 단숨에 절벽에서 계곡을 향해 뛰어내렸다. 바람의 힘으로 속도를 살짝 조절했지만, 그래도 거의 그냥 뛰어내린 수준이었다.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아 강인한 몸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레이븐은 그를 짧게 평했다.
“미친놈이야, 저거. 어휴, 여기에서 이걸 어떻게 뛰어?”
* * *
엘링턴과 와이번 경주 대회의 일을 의논한 후, 준비는 차근히 되어 갔다. 노아를 호위 기사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그는 아직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루시엘은 노아를 이틀이 멀다고 찾아갔다.
“프린세스 보여 줘.”
“당근 쿠키 좋아해?”
프린세스를 핑계로 찾아갔지만, 얼굴도장을 자주 찍었다.
루시엘의 그런 노력이 먹혀들었던 것일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드디어 노아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일이 생겼다.
마구간 근처에서 나뭇가지 위의 위태로운 새 둥지를 발견한 루시엘이 나무 위에 기어 올라갔던 터였다.
삐약, 삐약.
다행히 둥지 안의 알도, 아기 새도 모두 무사했다.
마법을 사용하면 아기 새가 놀랄까 봐, 사용하지 않았는데 잘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안 다쳐서.”
루시엘은 둥지를 안전하게 놓아 주곤, 다시 조심조심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한참 나무를 타고 내려오는데 말들을 산책시켰다가 돌아오던 노아가 그걸 보곤 깜짝 놀랐다.
“……아가 마님? 나무에는 무슨 일로 올라가셨습니까? 호위 기사들은 다들 어디로 갔습니까?”
“아…… 그게. 나 마구간 놀러 올 때는 원래 그냥 오는걸.”
“나무에는 왜 올라가셨지요?”
노아가 의아함과 걱정을 담아 물었다. 삐약, 소리가 나면서 곧 어미 새가 날아와 제 새끼를 품었다.
“새 때문입니까?”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응, 둥지가 떨어질 뻔해서 다시 잘 놔 주었어.”
“……그런 건 절 부르시면 좋았잖습니까.”
“노아가 있었으면 시켰지. 근데 삼십 분째 안 와서.”
루시엘이 나무의 기둥을 타고 뛰어내리려고 하자, 노아가 기겁했다.
“어어? 아, 안 됩니다. 제, 제가 받아 드릴 테니까 조심해서 내려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에이, 거의 다 내려왔는걸.”
루시엘은 거절한 채 나무 기둥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루시엘의 스커트 자락이 슬쩍 올라가자, 노아가 다른 데를 보다가 루시엘이 위험할까 봐 얼른 붙잡아 주었다.
“앗, 고마워.”
“……다음에는 이러지 마십시오.”
그리 말하는 노아의 눈에 어린 날의 여동생이 루시엘과 겹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