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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73)화 (173/282)

<173화>

“아가 마님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루시엘은 새로운 기사들과 눈을 맞추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이 곁에서 보필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갈색 숏컷을 한 이네스가 루시엘에게 물었다.

“아가 마님, 지금부터 호위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아…… 오늘은 혼자서 아기 영지에 다녀오려고요. 각하의 승인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호위를 부탁드려요.”

그러자 자르가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다가왔다.

“아가 마님, 다른 연유가 있으신 겁니까. 그럼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헛기침을 하던 자르가가 나서자, 뒤에서 다른 기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루시엘은 얼른 말을 돌렸다.

“앗, 단장님은 바쁘신데 제가 시간을 빼앗을 순 없어요. 그럼 그냥 두 사람에게 호위를 부탁할게요.”

루시엘은 어쩔 수 없이 새로 지명한 기사들을 거느리고 아기 영지로 향하기로 했다.

오늘은 마차 대신 그들의 말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사실 혼자 조용히 포탈 이동 마법을 사용해도 되지만, 기사들이 있을 때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았다.

루시엘이 순간이동을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을 알면, 불안감을 심어 줄까 봐 그들을 배려한 일이었다. 시녀들 앞에서도 순간이동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였다.

이네스의 손을 잡고 루시엘은 그녀의 말 안장에 함께 올랐다.

“고마워요. 말은 처음인데…….”

“주의해서 몰겠습니다.”

이네스는 말투와 표정은 매우 근엄하고 딱딱하지만, 눈치가 빠르고 배려가 깊은 것 같았다.

다각, 다각.

확실히 마차보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더 스릴 있고 속도도 빨랐다. 잠깐이지만 말에 타는 건 처음이라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동안은 너무 위험하단 이유로 타지 못했는데,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동이었다.

그러다 어느 곳에 이르자 유독 영지민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커다란 풍차가 돌아가는 시냇가 옆, 초록 지붕을 가진 하얀 건물과 그 앞에 너른 약초밭들이 보였다.

하얀 가운을 걸친 시클라인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걸 보니, 역시 오늘도 몹시 바쁜 모양이었다.

‘마나 영양제를 얻을 겸 들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한가해질 시간에 가야겠어.’

루시엘은 미소를 지으며 그곳을 지나쳐 아기 영지에 다다랐다. 루시엘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저는 별장 안에서 용무가 있어요. 두 사람은 여기에서 편하게 대기해 주세요. 이곳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에요.”

“예, 아가 마님.”

루시엘이 그렇게 일러주었지만, 두 사람은 긴장을 풀지 않고 아기 영지의 주변을 경계했다.

“챈, 네가 발이 빠르니 주변을 한 바퀴 시찰하고 돌아와 줘.”

이네스의 말에 챈들러가 서둘러 아기 영지를 살폈다.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네. 그러고 보니, 아르제온은 내가 팔찌를 풀고 마탑에 간 이후로 아기 영지를 떠났었지…….’

텅 빈 풀밭을 보고 있자니 살짝 궁금하긴 했다. 혹여나 마탑으로 귀환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엘은 오랜만에 별장으로 들어섰다. 마탑에 있을 적에도 가끔 보석을 만들 것 같으면 도망치듯 오곤 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진 만큼 이동에 필요한 마나도 더 많아져 매일 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여전히 아늑하고 포근한 별장이었지만, 뽀얗게 먼지가 내려앉은 소파를 보니 그냥 둘 수가 없었다.

“클린(clean).”

영창하는 순간 하얀빛과 함께 순식간에 먼지들이 말끔히 사라졌고 물건들에서도 반짝반짝 광이 났다.

“방의 청결함을 유지하는 마도구를 개발해 달라고 마탑에 제안서를 넣어야겠는걸.”

루시엘은 그제야 소파에 기대다가 발랑 누웠다. 그러곤 그동안 단련한 마나를 허공으로 슥슥 펼쳤다.

파아앗!

거대한 마나의 파도가 일렁거렸다. 손끝을 빙글빙글 돌리자, 마나가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서 찰랑거리며 자유로이 움직였다.

5서클의 마법을 익히면서 마나도 착실하게 훈련한 덕분일까?

마나를 운용하는 것이 이제 숨 쉬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이내 루시엘의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가 전해졌다.

“……세상에. 이 커다란 마나 좀 봐. 루시엘, 나 나가도 되는 것이지?”

피닉스는 마나를 밝히긴 했지만, 그래도 제멋대로 굴지는 않았다.

“별장은 혼자만의 공간이니까 나와도 좋아요. 잠깐만요, 지팡이 소환할게요.”

“고맙다.”

이내 루시엘의 지팡이에 세공된 루비에서 금색 빛줄기와 함께 스르륵, 피닉스가 인간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피닉스는 나오자마자 루시엘을 꼭 끌어안고는 별장을 가득 채운 마나를 들이마셨다.

“음. 정말 좋구나. 이 상쾌하고 시원한 마나란…….”

루시엘은 문득 궁금해져서 그녀에게 물었다.

“제 마나를 마시는 건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과 비슷한 거예요?”

“아아, 루시엘. 공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질 않지. 요정의 마나는 천상의 맛이란다. 과실처럼 달콤하고, 새벽이슬처럼 시원하게 목을 적셔 주지.”

“말만 들으면 복숭아 맛 주스가 생각나네요.”

“……인간 세상에도 그런 맛이 있다고?”

“먹어 보실래요?”

루시엘이 고개를 살랑 끄덕이자, 피닉스가 관심을 보였다. 그녀도 마침 목이 말랐으니까.

루시엘은 기사들에게 전달할까 하다가 그들의 수고로움을 생각해, 순간이동 마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별궁의 응접실로 날아가서 달콤하고 시원한 복숭아 주스 두 잔을 가져온 루시엘은 한 잔을 피닉스에게 내밀었다.

그걸 마셔 본 피닉스의 타오를 듯한 화염석 같은 금빛 눈동자가 몹시 커다래졌다.

“……진짜 비슷한데! 여기에 네 마나를 넣은 것이니?”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빨대로 복숭아 주스를 쪽쪽 소리가 날 때까지 다 마신 피닉스를 보면서 루시엘이 제 것도 양보했다.

“먹고 쉬고 계세요. 저는 보석을 확인하고 고민 좀 하고 있을게요.”

“그래, 그래.”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로, 복숭아 주스에 정신을 빼앗긴 피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루시엘이 보석을 가끔 주어서인지, 이제 피닉스는 보석을 탐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부활을 마친 후라서, 큰 힘이 필요 없는 듯했다.

보석의 방에 들어온 루시엘은 문을 잠갔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차곡차곡 모아 온 보석들이 점점 많아져 방 안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랐다. 길리아트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구한 마법 서랍에 옮겨 놓아서 시름을 덜긴 했지만.

루시엘은 열두 칸짜리 마법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보석들이 아름답게 반짝거리며 만들어 내는 빛들 때문에,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루시엘은 마지막으로 만든 핑크색 다이아몬드를 매만졌다.

지금까지 만든 보석 중에 가장 크고 영롱한 핑크 다이아몬드.

아직도 그 보석의 힘이 무엇인지 비밀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핑크 다이아몬드 다음으로는 새로운 보석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만큼 내가 평온하고 조용하게 살았던 건지도 몰라.’

확실히 지난 5년 동안의 삶에서는 큰 파동 없이 평탄한 나날들이었으니까.

‘아니면 핑크 다이아몬드가 마지막 보석이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가 가진 보석은 이것으로도 충분해.’

과거였다면 지금쯤 루시엘의 몸은 보석을 뽑히는 바람에, 슬슬 마나가 말라 가기 시작했을 터였다.

그러나 이번 생에서는 착취당하지도 않고 마나 영양제를 계속 먹어서 그런지, 이제 보석을 온종일 만들어 내도 심장에는 뻐근한 감각조차 없을 것 같았다.

‘보석을 많이 모았으니, 그 쓰임도 생각해 보아야지.’

루시엘은 행복한 고민에 빠져 배시시 웃었다.

루시엘은 가방을 열어 아주 오랜만에 추억의 빨간 노트를 열었다. 이번에 돌아와서 책상 정리를 하다가 서랍장 깊은 곳에 굴러다니는 것을 베시가 발견했다.

루시엘은 오랜만에 그 노트를 열었다.

회귀한 이번 생에서 자신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려고 했는지, 그 흔적이 남은 것 같았다.

「마법 배우기.

자금 만들기.

벨슈타인가와의 돈독한 인연 쌓기.

보석의 힘 연구하고 그 힘을 활용하기.

나만의 아지트 마련하기.

믿을 만한 호위 구하기.

내 사람 만들기.

마나 영양제 얻기.

벨슈타인의 발전에 도움 주기.

이브나크의 유리공예 살리기.

피닉스 부활 돕기.

어머님의 건강 되찾아 주기.

검은 장벽 보강하기.」

“이 모든 걸 이루어 냈구나.”

리스트에 줄을 죽죽 긋고 나니 루시엘은 성취감과 뿌듯함이 차올랐다. 앞으로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심장을 두드렸다.

파아!

또로롱, 또롱!

루시엘은 허공에 맺히는 아름다운 핑크 다이아몬드를 붙잡았다.

그간 운이 좋아 잘 풀린 일도,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은 일도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계획을 생각할 시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시엘은 다음 장을 넘겨 조금 구체적인 계획들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검은 장벽 실드 마무리에 도움 주기.

류프델 설득해서 미스릴 제련하기.

노아를 호위 기사로 만들기.

핑크 다이아몬드의 비밀 알아내기.

레오니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돌봐 주기.

아르제온의 봉인 풀어 주기.

카빌가의 사업 방해하기.

페넬로페와 발루크 후작 부인의 행적을 찾고, 음모 파헤치기.

클로디아 황녀를 지지해 황위에 오르게 만들기.

인형사 제르다와 류프델을 협력시켜 분신 인형 만들기.

정보원 만들기.

내 사람들과 함께 눈토끼 상회 만들기.」

……적어 내려가다 보니 해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들도 너무 많다는 걸 깨달은 루시엘은 펜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잡았다.

「키제프와 재회하기.」

루시엘은 마지막으로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적었다.

마음만은 언제나 키제프와 함께였던 지난 시간들이었다. 덕분에 많은 걸 이루어 냈던 것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의 별이듯, 그녀의 별 역시 그였으니까. 멀리서도 빛으로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그의 귀환을 원하고 있었다. 이 수많은 일들 중에 그녀가 가장 원하는 건은 하나였다.

“하루빨리 돌아와 줘. 내 앞에 나타나 줘, 키제프.”

루시엘은 강한 열망으로 중얼거렸다. 그 순간, 일렁이던 마나가 꿈틀거리면서 마나 방울들이 뽀글뽀글 그녀를 감쌌다.

이내 장미처럼 새빨간 빛깔의 묵직한 보석 하나가 루시엘의 심장 가까운 곳에 생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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