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바짝 깎은 뒷머리를 긁적이던 노아가 말했다.
“……어떻게 보여드리면 좋을지.”
루시엘은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목검을 가리켰다.
“뭐든 좋으니, 검을 휘둘러 볼래요?”
“아…… 예.”
노아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허리춤에 있던 목검을 뽑아 들어 주변에 보이는 고목 앞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스윽!
쿠구궁.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얇은 나무지만 목검으로 베었더니, 고목 한 그루가 넘어가고 말았다.
“……방금 어떻게 한 거예요?”
“그냥 호흡을 집중해서 중심을 베었습니다.”
“……!”
이 실력이면 당장 루시엘의 호위를 맡는 데에도 무리가 없을 듯해 보였다.
자신의 호위 기사가 되는 일을 강요할 수야 없으니 그의 의사를 먼저 물어봐야겠지만…….
무엇보다 이번 생에서는 루시엘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자르가가 노아를 이곳에 데려왔으니 이전 생보다는 훨씬 나은 환경과 기회가 주어질 터였다.
‘차라리 모르고 지나갔으면 모를까. 이건 나에게도 기회야.’
기왕 이렇게 만나게 되었으니, 제국 제일가는 검사를 가까이에 둔다면 그녀가 계획하는 일들을 실행하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노아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겠지만 공동의 복수 대상인 막시무스와 카빌 후작도 있지 않은가.
생각을 마친 루시엘은 그에게 제안했다.
“놀라운 실력이에요. 제 호위 기사로 당신을 지목하고 싶은데 어때요?”
“……저를 말입니까?”
가느다란 눈을 끔벅이면서 그가 말했다.
“네. 당신은 훌륭한 검사가 될 것 같으니까요. 이대로 자르가 단장님 밑에서 훈련받으면서 실력을 더 키우면 검은 날개로도 활동할 수 있을 거예요.”
루시엘은 잠시 숨을 고른다 음 강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나와 함께 다니면 조금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의 성장도 도울 거고, 복수하는 대상, 부나 명예를 얻고 싶다면 그것도 도와줄게요. 한마디로 당신을 후원하고 조력하겠다는 소리예요.”
루시엘의 이야기를 들은 노아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무엇보다. 내 기사가 되면 당장 마구간지기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으로 훈련을 받게 해 줄게요. 일단은 아까 말해 준 그 스콰이어 검투 대회 우승을 목표로 하자고요.”
“왜 그렇게까지 저 같은 사람을 도와주시려고…….”
“공짜로 도와주겠다는 건 아니에요. 당신의 검술 재능을 알아보고 미리 후원하는 거니까. 꼭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되어서 제 호위를 해 주세요.”
루시엘의 말에 노아가 말했다.
“자르가 단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충성을 다해 지키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그때 비로소 진짜 기사가 되는 것이라고. 저에게는 과분한 제안입니다.”
루시엘은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갑자기 낯선 사람이 장밋빛 미래를 제안한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면 원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알겠어요, 노아. 그러면 제가 탈 말 한 마리만 골라 주세요.”
루시엘은 실망하지 않고 말했다. 일단은 한발 물러나겠지만,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다른 방법으로 노선은 바꿔야겠는걸.
‘그의 마음이 바뀔 때까지 핑계를 대서 찾아와야지.’
그러고 보니 루시엘은 말을 전혀 탈 줄 몰랐다.
사실 순간 이동 마법이 있어서 승마를 배우는 건 오로지 취미의 영역이었지만, 배워 두면 키제프와 같이 말을 타고 나란히 달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일단 마구간으로 같이 가 직접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아요.”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 그녀가 말을 갖고 싶다고 한마디만 하면, 곧장 공작이 최고 혈통의 말을 사 줄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 마구간에 있는 말들 중 하나를 고를 생각이었다. 루시엘은 별 기대 없이 기사단 근처에 있는 마구간으로 이동했다. 많은 말들을 지나친 노아가 한 마리의 말 앞으로 루시엘을 안내했다.
“제가 처음 여기 왔을 때, 공작 각하께서 직접 데려오셔서 돌보기 시작했던 아이입니다. 나중에 따님이 자라면 태워 주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는 따님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아가 마님을 따님처럼 여겨서 그리 말씀하신 거라고 나중에 전해 들었습니다.”
이마에 하얀 털이 있고 윤기 있는 갈기를 가진 예쁜 미색의 말이었다.
“응? 아빠가 절 위해 미리 데려온 말이었어요? 세상에. 왜 저한테 말씀 안 하셨던 거지요?”
“그때는 이 아이도 너무 어리다 보니 아가 마님을 태우기 어려워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구나.”
루시엘은 눈앞의 말에게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갔다. 가만가만, 말이 놀라지 않도록 손을 내민 루시엘이 갈기를 쓰다듬었다.
보송보송하고 부드러웠다.
루시엘은 어느새 눈앞의 예쁜 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크고 맑은 검은 눈망울과 긴 속눈썹, 연갈색 털로 뒤덮인 매끈한 몸까지.
이렇게 예쁜 말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너 진짜 예쁘구나.”
‘아빠가 나를 위해서 데려오신 아이인데,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그동안 나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콧등을 쓸어내리자 말이 기분 좋은 듯 푸르르,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뒤에서 루시엘을 지켜보던 노아가 덧붙였다.
“하프 링거라는 품종의 아이인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예쁜 녀석인 것 같습니다. 아직 이름은 없습니다. 주인이 지어 주시면 되겠군요.”
“아, 그렇구나. 늦어서 미안해. 네 이름은 고민해 볼게.”
루시엘은 말에게 그렇게 상냥하게 속삭였다.
말과 교감하는 루시엘의 고운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던 노아가 곧 고개를 떨어뜨렸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감히 시선을 제대로 마주할 수조차 없는 분이었지만, 저절로 시선이 가는 사람이었다.
“노아, 나는 이만 돌아갈게요. 이렇게 예쁜 말을 보여 줘서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내가 한 말들 다시 고민해 봐요. 나에겐 당신이 필요해요.”
“……예, 고민해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하대해 주십시오. 주인께서 한낱 마구간지기에게 존대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그의 말을 듣던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겠어, 노아라고 부를게. 그럼 우리 프린세스를 잘 부탁해.”
“……프린세스요?”
“이 아이, 정말 공주님처럼 너무 예쁜걸. 적당한 이름이 생각날 때까진 그렇게 불러야겠어.”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말을 보며 말했다. 그 천진난만한 미소에 노아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가 수컷이면 곤란할 뻔했습니다.”
“……앗, 수컷이야?”
루시엘은 말에게 큰 실례를 한 줄 알고, 놀라 되물었다.
“아뇨, 다행히 암말입니다.”
“다행이다. 또 올게. 프린세스랑 친해져야 하니까.”
“예.”
사르르 미소를 지은 루시엘이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떠나고 나자 뒤늦게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한 노아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했다.
자르가 단장이 자신을 고아원에서 데리고 나올 때, 말도 안 되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평생의 운을 전부 써도 모자를 만큼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던 걸까?’
살면서 피부가 그렇게 하얗고 고운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눈은 또 얼마나 맑고 커다란지……. 연약하고 가느다란 몸은 절로 보호 본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노아는 고개를 저었다.
저 같은 미천한 것이 그런 고귀한 분의 기사라니, 당치도 않다. 하지만 조금, 아니 많이 실력을 더 쌓으면…… 모시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잡념을 지운 채, 다시 건초더미를 치우기 시작했다.
얼른 일을 끝내야 다시 훈련할 짬이 날 테니까.
* * *
루시엘은 다시 기사단으로 돌아와 자르가와 검은 날개의 기사들을 대면했다.
노아가 루시엘의 호위가 되든 안 되든, 두 명은 지목할 생각이었다. 그러기엔 기사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일단은 가장 발이 빠른 사람을 뽑기로 마음먹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실력을 갖추었어. 하지만 위기 시에는 빠른 움직임이 필요해. 나를 보호하는 것도, 소식을 전하는 것도.’
그리 생각을 정하고 있자 자르가가 물었다.
“어떤 기사로 하시겠습니까? 자기소개를 한 명 한 명 시켜도 좋습니다.”
“그럼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그러자 기사들이 한 명씩 돌아가면서 자신의 검술 실력을 뽐내거나 유쾌한 화술로 루시엘을 찬양하거나 충성 다짐하는 등 제각기 자신을 어필했다.
“음, 아까 연무장을 돌 때 누가 가장 빨랐나요?”
그러자 회색 꽁지 머리를 가진 남자가 손을 들었다.
“네드 챈들러입니다.”
“챈들러 경을 첫 번째 호위 기사로 지명할게요. 그리고 나머지 한 분은…….”
루시엘은 아까 눈여겨 둔 갈색 머리의 기사를 다시 바라보았다. 칼린 이네스라는 기사였다.
그녀는 유일하게 애써 꾸며 내지 않고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했고, 위기 시에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은지 가볍게 알려 주었다. 침착한 모습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이네스 경이었죠? 두 분을 제 호위 기사로 지목하겠어요. 잘 부탁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잘 뽑으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루시엘에게 고개를 숙이는 두 기사를 보며, 자르가도 인정했다.
챈들러와 이네스 두 사람은 검은 날개 안에서도 정예 기사에 속했다.
이 둘이 붙는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긴 하지만 둘로는 적은 감이 있었다.
“아가 마님, 이 두 사람만 뽑으시는 겁니까? 각하께 보고하겠습니다.”
“아, 한 명 더 있지만, 아직은……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예, 언제든 다시 말씀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혹시, 세 번째 호위 기사는 아까 그 아이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
루시엘이 차마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가 누굽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엘의 호위를 맡고 싶어 하는 일부 기사들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앗, 자르가 단장님. 그걸 기사들 앞에서 말씀하시면 곤란하잖아요. 근데 저분들은 내 호위 기사를 왜 맡고 싶어 하는 걸까.’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르가를 눈치 없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본인도 눈치 없다는 걸 모르는 루시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