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맞아, 얼굴에 자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리 색은 검었던가…….”
루시엘은 미간을 좁히면서 흐릿한 기억을 되짚으면서 기사단을 향해 걸었다.
고아원 출신의 평민 소년.
제국에는 평민과 노예이더라도 이름난 검사가 되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스콰이어 검투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무려 세 번의 연승을 거두고, 검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 바로 그였다.
푸른색의 투구를 쓰고 나타나, 청의 검사라는 호칭을 얻었던.
“근데 이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
하기사, 그는 검술로 유명해진 후에는 이름보다는 청의 검사라는 호칭으로 불렸고 유명해지기 전 막시무스의 시종일 적에도 이름으로 불린 적은 거의 없었다.
머릿속을 헤집어 보던 루시엘은 기사단에 다다르기 직전에 걸음을 멈췄다.
저 멀리 펼쳐진 거대한 장벽의 윤곽이 그제야 제대로 가늠이 되었다. 장벽의 달라진 모습은 루시엘의 가슴을 뛰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와, 저게 검은 장벽?”
루시엘의 진홍빛 눈이 커다래져서 먼 풍경을 담았다.
과연 천재 건축가 갈리우스다웠다. 장벽의 사이사이 세워진 첨탑 모양의 포탑들은 보기만 해도 위용이 그대로 느껴졌고, 무엇보다 드래곤을 형상화한 석조 장식은 인상적이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성벽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었다.
탑의 개수를 다 셀 수도 없을 만치 많았다. 성벽은 보다 높아졌고, 단단한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과거와 다르게 튼튼하게 보강된 검은 장벽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실드를 배치하는 일만 남았구나. 나도 옵시디언을 만들어서 도움이 되어야지.’
루시엘이 그리 다짐하며, 맞은편에 있는 기사단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제법 걸어서인지 슬슬 다리가 아파 왔지만 순간 이동을 쓰기에는 이미 많이 와 버렸다.
“……저기, 누가 오는 것 같아.”
“하얀 드레스의 레이디?”
“아가 마님이시잖아?!”
“어디, 어디?”
“와, 멀리서도 빛이 나시네.”
기사들이 우당탕거리면서 연무장의 간이 울타리 너머로 서로의 몸을 내리누르면서 루시엘의 얼굴을 보려고 난리가 났다.
저렇듯 순진하게 보이는 기사들이지만, 그들 역시 검은 날개의 정예들이었다.
그들 한 명이 다른 가문의 기사단 소대 하나와 맞먹을 정도의 어마어마한 힘을 가질 정도였다.
한편 연무장에 나와 훈련에 임하고 있던 기사들이 소란스러워지자, 조용히 교관들과 이야기하던 자르가가 기사들을 노려보며 주의를 주었다.
“해이한 정신은 용서치 않는다. 전원 그대로 다섯 바퀴 돈다. 실시!”
기사들의 신음 소리가 깊어지는 걸 차갑게 바라보던 자르가가 이내 루시엘에게로 다가오면서 고개를 숙였다.
거대한 체구의 자르가와 루시엘과의 체격 차이가 과거보단 덜했지만 그래도 늑대와 토끼 수준이었다.
“아가 마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자르가 단장님도 여전히 좋아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루시엘이 맑게 웃어 보이자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자르가 단장의 표정도 살짝 풀렸다.
“기사단에 방문해 주시고 영광입니다. 랄프의 부상 소식은 들으셨지요? 되도록 빨리 호위 기사를 선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루시엘이 없는 동안 본가의 과수원으로 휴가 갔던 그는 나무에 올라갔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아, 랄프가 쾌유하길 바란다고 전해 주세요. 안 그래도 제 호위 기사를 직접 뽑는 것이 좋겠다고 엘링턴에게 말을 전해 듣고 오는 길이에요.”
“예, 좋은 기사들이 많으니 원하시는 자를 두서넛 정도 뽑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자르가는 연무장을 도는 기사들을 힐끗 보면서 말했다. 루시엘이 조심스레 그들을 살폈다.
검은 머리의 기사들은 몇 있었지만, 루시엘이 찾는 그 소년. ‘청의 검사’는 없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주변을 둘러보던 때였다. 기사단 건물 뒤편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에게 줄 건초 통을 나르고 있는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머리, 왼쪽 뺨을 가로지른 자상과 날렵한 눈매와 민첩한 몸짓.
루시엘의 눈이 커졌다.
‘……설마 정말 청의 검사?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아.’
우연의 일치라고 해도 굉장했다. 이건 거의 하늘이 도와준 수준이랄까.
자르가 단장이 알아서 그를 데려오다니. 원래는 강대했을 카빌가가 이번 생에선 약해지면서 그의 운명도 함께 바뀐 것이 아닐까.
“단장님, 저 사람이 혹시 미카엘 고아원 출신인가요?”
“아, 예. 과거에 그곳에서 데려왔습니다. 카빌 후작가를 주시하다가 근처에 있는 고아원에서 발견한 아이였지요. 눈빛이 좋아서 데려왔습니다.”
“그랬군요. 음…… 저 청년과 대화를 해 보고 싶어요.”
루시엘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자르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저 아이는 왜 찾으십니까?”
루시엘은 얼른 둘러댈 이유를 생각했다.
“아…… 그게. 예전 저의 시녀가 미카엘 고아원 출신인데 혹시 아는 사이였는지 물어보고 싶어서요.”
“그렇습니까. 노아, 이리 와 예를 갖춰라.”
자르가가 그를 불렀다. ‘노아’라, 무척 평범한 이름이었다.
“……예.”
노아는 반문 없이 루시엘의 앞까지 와서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습니까.”
루시엘은 그를 찬찬히 뜯어 보았다.
짧게 깎은 새카만 머리카락에 검은 눈, 노아의 쌍꺼풀 없는 눈은 순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인상은 담백했다.
가벼운 셔츠를 입었는데도 단단해 보이는 몸과 건초 통을 들고 있는 팔뚝에는 힘줄이 우두두 솟아 있었다.
‘……마구간지기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몸이 좋은걸. 계속 마구간 일만 해 왔던 것일까?’
과거에도 막시무스의 검술 선생이 그의 자질을 알고 몰래 검을 가르쳐 주었던 눈치였다.
분명 검을 직접 배우지 않았더라도 그라면, 검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더라도 지금부터라도 배우면 금방 익힐 수 있겠지.
그는 남들보다 두 세배는 빠른 감각으로, 검에 두각을 드러낼 테니까.
“……저를, 부르셨습니까?”
노아가 눈을 내리깔고 몸을 낮추며 말했다. 문득 루시엘은 그의 과거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 천한 고아 자식!’
막시무스가 아무리 발길질을 해도 그는 똑같이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었다.
소드 마스터의 실력을 가졌음에도 노예 검투사로만 살았다.
‘당신도 나처럼 노예로만 살았었지.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구나.’
루시엘은 어쩐지 씁쓸했다. 더 빨리 그를 찾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이분은 공작성의 아가 마님이시다.”
그런 높은 분이 저를 왜 부르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듯, 노아는 잠자코 루시엘의 말을 기다렸다.
루시엘은 자르가를 의식한 듯, 여자 이름 하나를 대며 아느냐고 물었고 노아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노아라고 했지요? 올해 몇 살인가요?”
“…….”
노아의 잉크처럼 검은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열여덟? 아니 열아홉인 것 같습니다.”
루시엘은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아무리 봐도 마구간 일만 시키기에는 아까운데.
“……당신, 검을 배워 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예?”
노아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건 자르가도 마찬가지였다.
“아가 마님이 그걸 어떻게……. 실은 저 녀석, 마구간지기로만 남기에는 아까운 아이라 제가 개인적으로 따로 검술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를 호위 기사로 두고 싶은 루시엘에게는 그야말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역시 자르가 단장님이 사람 보는 눈이 있구나.’
어쩐지 그냥 마구간 일만 한다기에는 꽤 단련된 몸으로 보였는데. 루시엘은 놀란 척하면서 물었다.
“몰래 검술 훈련을 시키실 정도라면…….”
“예, 검을 잡기에 더없이 좋은 신체 조건도, 기민한 감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평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다른 견습 기사들과 같이 훈련을 시키고 있지는 않습니다.”
자르가는 말끝을 흐렸다.
검은 날개의 기사들 대다수는 벨슈타인 영지 내의 가신 가문 출신이었다. 일부 평민도 있었지만 그들조차 검투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신분을 높이고 들어왔다.
“노아와 잠시 둘이서만 대화할 수 있을까요?”
“아아, 물론입니다.”
자르가의 허락이 떨어졌고, 눈만 끔벅이는 노아를 데리고 루시엘이 기사단 옆 쉼터로 잠시 향했다.
한편 노아는 이 어린 소녀가 자신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풀밭을 스치는 소리가 멎으면서 루시엘도 걸음을 우뚝 멈추곤 뒤를 돌았다. 이제 두 사람의 대화는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노아는 혹시 꿈이 뭔가요?”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고아원에서 자란 그에게 꿈이란 건 생소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주어지는 대로 살아갈 뿐이었다.
고아원 아이들 중 대다수는 귀족의 시종이나, 더 운이 나쁘면 노예로 팔려 가는 경우도 있었다.
아주 드물게 귀족의 입양아로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특별한 외모나 재능을 가져야만 가능했다.
노아도 한때는 그런 기적 같은 일을 꿈꿨지만 그건 그야말로 꿈에 불과했다.
“되고 싶은 것,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이 있냐는 뜻이에요.”
루시엘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정말요? 검을 배워서 강해지고 싶다는 꿈은 꾸지 않았어요?”
루시엘의 말에 노아가 주먹을 발끈 쥐었다.
“……무력이 강해진다고 해도, 신분이 높아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왠지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해 보였다.
“아뇨, 그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검술 실력을 키우면 되잖아요.”
루시엘은 맑게 웃으면서 제안했다.
“제국에는 매년 열리는 스콰이어 검술 대회가 있다고 해요. 거기에서 연승을 거두면, 사람들은 당신이 평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을 거예요.”
노아의 검은 눈썹이 올라갔고 저도 모르게 루시엘의 말에 집중했다. 심장이 뛰는 말이었다.
그는 오래전 자신을 고아원에 처넣은 인간을 떠올렸다.
“그리되면, 남작이라는 지위보다 더 높아질까요?”
“그건 검술 실력에 따라 달라질 것 같아요. 당신이 제국 제일의 검사가 된다면, 남작뿐일까요? 제국민의 영웅이 될지도요.”
루시엘의 너무나 아득하고 희망찬 이야기에 노아는 그것이 와닿지 않는지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에는 아직 실력이 부족합니다.”
“검을 배운 지는 얼마나 되었죠?”
“……3년 6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3년 6개월이라면 생각보다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루시엘이 반색하며 눈을 빛냈다.
“당신의 실력을 한번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