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대륙의 날개, 살아 있는 성지라 불리는 신성 지구 아스트리야는 천공을 부유하는 섬이었다.
아스트리야를 떠받치고 있는 힘은 신의 신성력이다, 아스트리야는 대마법사가 만든 섬이다, 섬이 아니라 살아 있는 거대한 생물이다 등의 몇 가지 가설이 있었지만 신을 믿는 자들에게는 첫 번째 가설을 신봉했다.
그들에게는 신앙심이야말로 신의 존재와 그 힘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증거인 셈이었다.
아스트리야에는 신을 모시는 레트라논 신전을 비롯해 교황청과 학술원, 수도원 등 종교와 관련된 많은 기관이 있었다. 일부 높은 신분의 죄수들을 유폐시키는 감옥과 다름없는 곳도 있었다.
아스트리야는 대륙 위를 전반적으로 유유히 떠돌아다녔는데, 그 행로와 방향은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다.
특히 지난 3년간 서부의 뜨거운 콴드라 사막 지대를 돌 때는 그야말로, 아스트리야 내부는 불지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열기에 죽은 자들이 꽤 되었지만, 신의 힘으로도 그를 막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하여, 연로한 교황은 일찌감치 다른 곳으로 피신했고 대부분의 고위직 신관들과 추기경은 신력으로 더위에 맞서 버티고 있었다.
마탑의 마도사들을 투입해 도움받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신관들 대부분은 성력만이 오직 세상의 힘이라 굳게 믿었다.
그들이 매일 같이 기도를 드린 끝에 드디어 행로가 바뀌었다. 매서운 추위가 특징인 북부의 벨슈타인 지역이었지만, 살이 익어 가는 불볕더위를 참아 내던 그들은 기도가 통했다며 환호했다.
그들 중에는 레이놀드 황자와 그의 측근 팔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 신이시여! 황자 전하! 이제 살았습니다. 행로가 달라져 몇 개월 후면, 아스트리야가 북부에 다다르게 된다고 합니다.”
팔로스가 신관에게 들은 소식을 전하자, 레이놀드는 햇빛에도 그을리지 않은 창백한 낯으로 말했다. 태생적으로 핏기없는 피부색을 가졌지만, 시간이 지나며 더욱 깡마른 몸, 퀭해진 자안은 왠지 모를 광기를 담고 있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그전에 나는 여길 떠날 텐데. 개고생은 이미 다 하고서 말이지.”
이를 바득 갈은 레이놀드는 곧바로 표정을 싹 바꾸어 멀리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신관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꺄르르 신관들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를 추종하는 신관들이었다.
레이놀드는 처음에는 이런 빌어먹을 공간에 유폐 당했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며 참고 또 참았다.
‘참으세요, 잠시 쉬어 가면 됩니다.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요. 신전에서 찬찬히 힘을 키우는 겁니다. 나도 연구하고 준비할 것이 있으니, 우리 몇 년만 참고 해후를 나누도록 하지요. 성력과 맑은 마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을 황자의 추종자로 만드세요.’
타고난 외모와 황자라는 지위는 이곳에서도 감출 수 없는 법.
추종자를 만드는 건 파티에서 순진한 영애들을 꼬시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어머니의 말대로 이곳에 들어온 신관들 중 일부는 맑은 마력을 신성력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레이놀드는 누구보다 모범적으로 교리를 공부하고, 몸가짐을 가지런히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연기이자 가면이었지만 이곳에선 그의 진짜 모습을 팔로스밖에 몰랐다.
팔로스가 물었다.
“그것도 그렇지요. 그나저나 카일라 님께서도 행적을 감추셨으니, 돌아가는 즉시 찾아야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오실 테니, 그거야 문제없지요.”
레이놀드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웃다가 교리서를 옆구리에 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지상의 상황도 살펴야 하니, 먼저 내려가도록 하세요.”
레이놀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팔로스에게 명했다.
“예, 안 그래도 그 제안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레이놀드의 시선에 들어왔다.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머리카락,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 하얀 관복으로 감싸진 몸과 나붓한 인상까지. 보는 이의 눈이 정화되는 완벽한 피사체였다.
마력 측정기로도 그가 가진 힘이 가늠이 되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그는 같이 있는 이가 특별한 기분을 느끼게끔 만드는 자였다.
레이놀드가 가장 공들여 상대하는 자이기도 했다.
안드레아 필 아스트리야.
교황의 다섯 번째 손가락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다섯 번째 추기경.
공식적으로 그의 성력이 얼마나 되는지 기록된 건 아니지만, 그가 행하는 기적과도 같은 힘은 성자로 불리기에 충분했다.
쓰러진 병자의 손을 그가 잡아 주고 정화의 기도를 올리자, 병이 순식간에 깨끗하게 치유되었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했다.
레이놀드는 항상 그의 주변을 얼씬거리던 성기사가 없는 틈을 타 먼저 다가갔다.
“다섯 번째 형제이시여. 아까부터 한참 찾았습니다.”
“황자님께서 저를…… 말입니까?”
안드레아가 레이놀드 황자를 올려다보았다.
레트라논에 죄를 짓고 들어오는 황족들은 대개 오만하여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수도원에서 정해진 기간 동안 썩다가 나갔다. 그에 반해 레이놀드 황자는 아주 착실하게 행동했다.
그 덕분에 레이놀드는 수도원을 3년에 걸쳐서 청산하고, 조금 더 운신이 자유로운 신학 기관인 신전의 학술원으로 이동했다.
안드레아로서는 레이놀드의 실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다만 학술원에서 최근 발표를 듣고 언변은 괜찮다고 생각하던 터였다.
레이놀드가 행실이 안 좋다는 이유로 이곳에 왔으리라고 추측할 수는 있었다. 황실에서 이유를 정확히 밝히지 않았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곳 내에서는 레이놀드에 대한 평가가 좋다는 사실이었다.
품행이 바르고, 약자는 돕는.
올곧고 선한 행동이나 그것만큼 꾸미기 쉬운 일도 없었다.
왠지 모르게 내키는 사람은 아니라서 안드레아는 그와 일정 거리를 두고 있었다.
더구나 안드레아는 갸름한 얼굴선, 부드러운 성격 때문에 쉬이 호감을 갖고 다가오는 이들이 많아 타인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다.
“교리를 공부하던 중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 도움을 구하고 싶습니다만.”
“교리를 담당하는 신관님께 물어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겁니다.”
레이놀드가 교리서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가, 안드레아의 시선을 읽고는 눈매를 좁히고는 이내 친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런, 들켰습니까. 안드레아 경과는 가깝게 교류하며 지내고 싶어서.”
* * *
루시엘의 귀환 후로 공작성은 안팎으로 분주해졌다. 에바와 베시는 숙녀가 되어 가는 루시엘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별궁을 새롭게 단장하느라 여념이 없었고, 기사단에서는 아픈 랄프를 대신하여 기사들이 서로 루시엘 호위를 담당하겠다고 앞을 다투어 결투를 청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루시엘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벨슈타인의 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금일 회의장에 아가 마님이 참석한다는 이야기에 다들 꽃과 인형, 먼 지방의 특산물, 액세서리 같은 선물들을 한 아름씩 들고 있었다.
“아가 마님!”
“어서 오십시오! 그간 기다렸습니다.”
곱게 자란 아가 마님을 향한 팬심 반, 길렌 백작처럼 예지몽의 이야기를 들어 한몫 잡으려는 사심 반으로 똘똘 뭉친 가신 무리를 보고는 공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 진행을 의논할 일이 있는가 싶어 참석하려던 루시엘은 그 뜨거운(?) 인기에 그대로 다시 회의장에서 나오고 말았다. 보호 차원에서 공작이 막아선 터였다.
“루시엘, 따로 의논할 일이 생기면 가신들을 셋 미만으로 불러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네, 아빠. 알겠어요.”
루시엘은 싸늘하게 굳은 공작을 보며 답했다. 마침 엘링턴이 다른 보좌관들과 함께 회의장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다른 보좌관에게 서류들을 넘기고는 루시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아가 마님, 알아보니 막시무스 폰 카빌은 저택을 나갔고, 도박장 여러 곳을 전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으엑? 집을 나갔대요?”
“예. 왜 그러시지요?”
과거에도 막시무스는 집을 나갔고 그 시점부터 카빌 후작이 그에게 모든 금전적 지원을 끊었다.
그러자 돈을 벌겠다고 도박부터 손을 댔고 나아가 와이번 경주에 관심을 갖는 흐름으로 발전했다.
막시무스가 움직이는 건 원래는 적어도 2~3년 후였다. 하지만 루시엘이 알고 있는 대로만 미래가 흘러가는 건 아니었다.
카빌 후작가의 좁아진 입지 덕분에 평소라면 그냥 쉬쉬하고 넘어갔을 막시무스의 악행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덕분에 그는 아카데미에서 퇴학 처분까지 당하게 되었고, 카빌가는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와이번 경주 대회가 시작된 이상, 막시무스가 더 빨리 움직일 가능성은 분명 존재했다.
“그러면 막시무스도 더 빨리 움직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해요.”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 듯한 기분에 루시엘은 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말했다. 엘링턴이 물었다.
“음, 저에게 차근차근 자세히 알려 주시면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좋아요. 지금 여기서 말하기에는 좀 그러니까, 이따가 아기 영지로 와 주세요.”
루시엘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엘링턴이 말했다.
“그럼 정무 회의에 다녀와서 그리로 가겠습니다.”
“네. 고마워요.”
“아, 그리고 아가 마님. 기사단에서 다들 서로 호위 기사를 맡겠다고 호들갑이니까 직접 기사를 지명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게 서로가 평화로워지는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응? 무슨 일 있었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엘링턴은 아가 마님 덕분에 싸움이 났다고는 차마 전하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따 뵐게요!”
마침 랄프가 호위 기사를 그만두게 되었으니, 루시엘도 새롭게 믿을 만한 호위를 구하려던 참이었다.
‘기사단에 가 봐야겠어.’
사실 마탑에 들어가기 전 루시엘은 자르가가 미카엘 고아원 출신 한 소년을 기사단의 마구간 지기로 뽑았다길래, 반신반의했었다.
카빌 후작가에서 노예 검투사로 부렸던 소년도 미카엘 고아원 출신이었던 터였다.
그는 훗날 스콰이어 검투 대회를 휩쓸면서 엄청난 검술 실력을 보였지만, 그 수입은 오롯이 카빌 후작에게로 넘어갔었다.
공작에게 부탁해 그를 찾아볼까도 했었지만, 이름을 모르니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저 얼굴만 흐릿하게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