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69)화 (169/282)

<169화>

혼자서 별궁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루시엘은 문득 온실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와 함께 키제프가 보내 준 열매.

‘무슨 열매인지 심어 볼까?’

루시엘은 조심스레 온실 정원에 들어가 보았다.

울창하게 자란 여러 관상용 식물들 사이로 켜진 마법 랜턴이 야간에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루시엘이 없는 동안 온실 정원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약초들은 시클라인이 대부분 영지에 있는 약제원 앞으로 옮겨 심었고, 대신에 특별한 기후의 식물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잔뜩 보였다.

하지만 변함없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식물이 있었다. 길쭉한 열매가 다발로 달린 바나나였다.

‘레오니가 좋아하던 바나나네.’

루시엘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온실 안에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오늘 마주쳤던 내내 차갑기만 했던 레오니의 노란 밤톨 같은 뒤통수가 보였다.

아까는 너무 오랜만에 봐서 훌쩍 커 버린 줄 알았는데, 저렇게 바나나 앞에서 오도카니 올려다보고 있는 걸 보니 여전히 어린아이가 맞았다.

‘잘됐다. 무슨 일인지 꼭 물어봐야겠어.’

루시엘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레오니에게 다가갔다.

“레오니, 바나나 아직도 좋아하는구나.”

눈이 마주치자 또다시 레오니가 얼굴이 굳더니 피하려고 했다.

곧장 온실 정원을 빠져나가려는 레오니를 보고 루시엘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다른 길로 돌아서 가려고 했지만 이번에도 루시엘이 슥 팔을 벌려 막았다.

“가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해.”

레오니의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텔레포트(teleport).”

스륵. 푸른빛이 넘실거리더니 레오니가 텔레포트를 시도하며 보란 듯이 큭, 하고 조소했다.

‘음,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러나 루시엘도 마법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주문을 외웠다.

“홀드(hold)!”

이내 레오니의 두 발은 그 자리에 꽁꽁 묶이고 말았다.

“……왁, 무슨 짓이야?”

자박자박.

루시엘이 여유롭게 다가가면서 답했다.

“네가 자꾸 나를 피하니까 그렇잖아.”

“…….”

루시엘이 레오니의 어깨를 붙잡았다. 가늘게 떨리는 눈이 어쩐지 상처받은 것처럼 보여서 루시엘은 못내 걱정이 되었다.

“레오니, 왜 그렇게 남처럼 굴어? 누나가 널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뭐래. 우리 남 맞잖아.”

루시엘을 마주한 레오니가 말했다. 석류알처럼 붉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루시엘은 또래 아이보다 더 큰 레오니를 꼭 안아 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영락없이 루시엘의 품에 갇히게 되자, 레오니가 통통한 뺨을 잔뜩 붉게 물들였다.

‘갸르릉 거리는 고양이가 따로 없네.’

루시엘이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통을 살살 쓰다듬자, 이제는 피하지 않았다. 레오니는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었다.

약간 화가 풀어진 지금이 기회였다. 루시엘이 말했다.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없어.”

“그럼 왜 그렇게 화가 났어?”

“화가 난 게 아니라…….”

루시엘과 시선이 마주치자 레오니의 눈이 울망해졌지만 다시 머리를 털어 내더니, 의젓하게 말했다.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잖아. 루시엘이 마탑에 간 것도, 형이 드락카에 간 것도 말이야.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그 말에는 루시엘도 깊이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리다는 이유로 레오니에게 제대로 말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미안해. 그것 때문에 마음 상해 있었어?”

“……편지도 없었잖아.”

“아, 그건 아닌데. 네 생일에 분명 보냈…….”

“딸랑 한 줄짜리 카드 한 장?”

“…….”

샐쭉 튀어나온 레오니의 입술이 오리처럼 귀여웠다.

루시엘은 끙, 하고 신음을 냈다.

“그리고 나에게 이런저런 비밀도 전부 말 안 한 거 알고 있어.”

레오니가 살쾡이처럼 눈을 흘겼다. 루시엘은 얼굴에 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루시엘에 대한 대부분의 이야기는 어린 레오니에게는 비밀이었으니, 가족들이 자신을 두고 따돌린다는 오해를 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런 거 아닌데…….’

“……아, 그건.”

루시엘은 핑계를 대려다가, 이제 레오니도 이만큼 자랐으니 알 나이가 되었다 싶었다.

루시엘이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말했다.

“이건 가족들 외엔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루시엘이 당부하자 레오니가 볼을 부풀렸다.

“칫, 내가 그렇게 어린앤 줄 알아?”

“좋아, 믿을게. 내 비밀 한 가지 알려 줄 테니까 다음에는 모른척하지 말아 줘.”

“……뭘 보여 주려고 그래.”

루시엘은 마나를 파앗, 끌어모았고 시답잖은 마법인 줄 알고 잠자코 있던 레오니의 눈동자가 몹시 커다래졌다.

또로롱, 또롱!

루시엘은 찬란하게 빛나는 토파즈를 레오니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 이게 다 뭐야? 루시엘은 마녀야?”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레오니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 어디선가 읽었던 책의 마녀가 스쳤다. 마녀들은 온갖 신기한 마법을 부리니까.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그…… 그럼 지팡이도 타?”

“아니, 그건 못 타.”

루시엘이 방긋 웃으면서 레오니에게 제 지팡이를 소환해서 보여 주었다.

“이건 절대 타는 용도로 보이지 않잖아.”

반짝반짝 찬란하게 빛나는 지팡이를 소환한 루시엘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워 보였다.

달빛을 흩뜨려 놓은 것처럼 긴 은발과 환한 미소는 어릴 적보다 더 예뻐져 멍하니 바라보게 되었다.

“난 루, 루시엘이 마녀라도 괜찮아……!”

“……응? 나 마녀 아니야. 그보다 누나한테 자꾸 이름 부를래? 어릴 때는 누나라고 잘만 불러 놓고?”

“……그, 그건.”

레오니가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더니 말을 돌렸다.

“그럼 마녀 아니고 뭔데?”

“난 요정이야. 보석을 만드는 힘을 가진 요정.”

“……요정.”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어린 레오니는 아직 모르는 듯해서 루시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픈 이야기는 덜 하고 싶으니까.

“그럼 엄청 소중히 지켜 줘야겠네. 이런 거 막 만들고 그러면.”

“맞아.”

레오니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가슴을 쭉 펴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내가 지켜 줄게.”

루시엘은 어린 날에도 했던 약속이 떠올라 장난스레 웃었다.

“좋아. 레오니가 기사님 해 줘. 아니, 마법사님인가?”

그러나 레오니가 고개를 붕붕 젓더니 새치름한 눈을 가늘게 휘며 말했다.

“아니, 아니. 남편님 할 거야.”

“……으응? 풋! 그건 안 돼. 난 너의 형수님이니까.”

루시엘은 빵 터져서 레오니를 귀엽게 보며 알려 주었다.

“형이랑 한 그 결혼, 3년 후면 끝난다면서.”

“앗, 너 그 얘긴 어디서 들었어?”

“어? 모…… 몰라.”

루시엘이 잠시 잊고 있던 키제프 생각을 하는 사이에 어느새 스르륵 홀드 마법이 풀리자, 레오니가 주변 정원에 있던 이름 모를 꽃들을 꺾어 왔다. 모아 놓으니 꽃다발이 되었다.

“루시엘 누나, 아, 아니 형수님. 나 3년 동안 키도 바나나만큼 많이 크고 강해질 거야. 그러니까 나 이 담에 크면 형수님이랑 결혼할래. 결혼하자! 응?”

슥, 하고 아직 작은 양손으로 바치듯 내민 꽃다발. 통통한 양 볼만큼이나 귀도 빨개졌다.

어린아이치곤 그 진지함에 놀란 루시엘이 꽃다발을 받다가 툭 떨어뜨리자, 레오니가 그걸 얼른 주워서 쪼르르 다시 눈을 초롱이며 내밀었다.

“……뭐?”

“누나. 하자아, 결혼. 응?”

“……저, 레오니.”

레오니가 루시엘에게 찰싹 달라붙어 졸랐다.

‘덩치만 커졌지, 속은 아직 꼬마 레오니 맞구나.’

루시엘은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겨우 그를 달래려고 슬쩍 물었다.

“나랑 왜 결혼하고 싶은데?”

“세상에서 제일 예쁘니까.”

“음…… 그건 말이야. 레오니, 네가 더 자라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될걸?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아껴 둬. 후회하지 않게.”

“…….”

루시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레오니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그러자 레오니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숨을 내쉰 다음 말했다.

“아휴, 차였다. 내가 그렇게 별로야?”

짧게 친 주홍빛 금발과 진한 눈썹 덕분에 장난꾸러기 같은 인상이 강해 보이는 레오니였다. 이마 한쪽을 드러내니 오뚝하게 솟은 코가 더 도드라져 미모가 더 돋보인다.

자기가 잘생긴 걸 스스로도 아는지 반질반질 매끈한 제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던 레오니가 물었다.

“우리 레오니가 얼굴은 최고 왕자님이지.”

루시엘의 칭찬에 레오니는 흐무러진 입매를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그니까 나 이대로 놓칠 거야?”

“레오니, 너 그런 말 다 어디서 배운 건데?”

열 살짜리가 못 하는 말이 없네, 하면서 루시엘은 키제프가 보내 준 열매가 들어 있는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단단하고 납작한 갈색의 열매.

두드려 보니 통통, 소리가 나기도 했다.

“레오니, 이게 뭘까? 형이 보내 준 거야.”

“어, 그거. 나도 형이 비슷한 거 보내 줬어.”

“앗, 정말?”

“응. 이미 저쪽에 심었는데?”

레오니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가 보니, 흙을 도닥여 놓은 곳이 보였다.

“누나 것도 심어 줄까?”

“응.”

레오니가 루시엘의 열매를 가져가더니, 마법 도구를 이용해서 능숙하게 심었다.

“잠깐만. 내 보석을 넣으면, 무엇이든 잘 자라게 돼.”

쏴아.

레오니가 열매에 토파즈를 같이 심자, 루시엘은 워터 마법으로 물을 촉촉하게 뿌렸다.

무슨 열매인지 모르겠지만, 키제프라면 자신과 레오니를 기쁘게 할 무언가를 보내지 않았을까.

그래도 레오니의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었다. 이전 생의 레오니는 비뚤게 자라서 나쁜 길로 들어섰지.

‘자주 관심을 가져 줘야겠는걸.’

“레오니, 새로 사귄 친구들 있으면 누나한테 보여 줘.”

“응. 걱정하지 마. 여자친구는 안 사귈 거야.”

레오니가 히힛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자, 루시엘이 말했다.

“사귀어도 돼.”

“싫어어. 멋진 남자는 일편단심이랬어.”

팔짱을 낀 채 레오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가를 또 단단히 착각한 것 같지만 어느새 밤이 가까워졌다.

“이제 그만 자러 가자, 늦었어.”

“응.”

루시엘의 손을 꼭 잡고 있던 레오니가 다른 손에 라이트 마법으로 구체를 소환해 내 어둠을 밝혀 주었다.

“내가 별궁까지 데려다줄게.”

“무슨 소리야. 누나가 데려다줄게.”

“남자가 데려다주는 거래.”

고집을 피우는 레오니와 아웅다웅 실랑이를 하다 지친 루시엘이 그냥 순간이동 포탈을 열어 주고 손을 흔들었다.

“레오니, 저거 타고 돌아가면 방으로 곧장 갈 거야. 잘 자!”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