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본성에 있는 식당 플레르 홀로 같이 들어서는 두 아이를 보던 이벨린의 푸른 눈이 휘어졌다.
“오는 길에 만나서 같이 왔구나. 어서 와서 앉으렴.”
“네.”
길쭉한 직사각형 식탁에는 의자가 두 개씩 삼면에 놓여 있어 두 명씩 짝지어 앉기에 좋았다. 그중 가장 상석에는 이벨린과 길리아트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거기에 둘이 앉으면 되겠구나. 오랜만에 볼 텐데 인사는 나누었느냐?”
“네에, 할아버지.”
“레오니도 누나를 만나 좋지? 어릴 때 어찌나 루시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지…… 귀여운 녀석.”
길리아트가 허허 웃으면서 턱가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나 레오니는 여전히 뚱하게 차가운 기색이었다.
“……기억 안 나요.”
“하긴 너무 어릴 적 일이니까요.”
레오니가 찬바람이 씽씽 나게 대답했다. 그러곤 루시엘이 의자를 빼 주려고 하자 굳이 식탁 건너편으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레오니가 이렇게 냉랭하게 자랄 줄은 몰랐던 터라, 루시엘도 더 다가가지 못하고 조심스러웠다.
‘어릴 땐 서로의 뺨도 만지고 같이 잠도 자면서 누나, 누나 하며 그렇게 귀여웠는데 말이지.’
루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휙 달아나듯 레오니가 다른 곳으로 고개와 함께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나한테 뭔가 화났던 게 아닐까?’
대리석 식탁 위를 비추고 있는 천장을 문득 올려다본 루시엘이 와, 하고 감탄했다.
스테인드글라스 기법으로 제작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나팔 부는 아기 천사가 매달려, 오색 영롱한 빛을 쏟아 내는 샹들리에였다.
황실에 진상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고, 섬세한 유리공예품이었다.
“이거…… 설마 하멜 공방에서 제작된 거예요?”
이벨린이 웃으며 특유의 푸른 빛 도는 신비한 눈으로 말했다.
“그렇단다. 내가 직접 방문해서 의뢰를 넣었더니 대금을 받지 않으려고 해서 애를 먹었다만. 너에게 신세를 많이 졌다면서 말이야.”
“아…… 에구, 막스 씨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도 전달하고 왔지. 이렇게 귀한 물건을 대가 없이 받을 수 없으니까.”
“맞아요.”
“아, 그리고 막스라는 자가 너에게 이걸 꼭 전해 달라고 하더구나.”
이벨린이 도톰한 노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어, 편지일까요.”
일반 서신이라면 제 이름 앞으로 보내도 되었을 텐데,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이내 공작과 솔리아페가 함께 도착했기에 루시엘은 봉투를 받아 따로 챙겨 놓았다.
레오니 옆에 앉던 솔리아페의 시선이 루시엘의 보랏빛 드레스로 향했다.
“루시엘, 그 드레스는…….”
“베시가 가져다주었어요. 엄마께서 어릴 적에 입으신 드레스라고 했지요?”
드레스가 잘 보이도록 루시엘이 잠시 빙글 돌았다.
“맞아. 너보다 더 어릴 적에 입었던 건데, 루시엘에게 꼭 맞는구나.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아끼던 드레스인데…… 그걸 입고 사교 파티에 간 날 테라스로 나가 숨어 있다가 돌아오곤 했지.”
솔리아페가 어린 날을 회상하면서 말했다.
“파티가 싫어서요?”
“기억하는구나. 그보다 가구들이 급하다고 들었는데, 초소형 마법이 걸린 가구들을 우선 사용하는 게 어떨까. 그보다 내 드레스를 입은 걸 보니 당장 입을 드레스가 별로 없겠군?”
“뭐라. 우리 루시엘이 입을 드레스가 없어? 내일 가서 시내의 의류점을 매입해 둘까.”
공작이 지진이 일어난 듯한 얼굴로 말했다. 또 의류점을 사 주신다는 이야기에 루시엘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사양할게요. 아빠. 몇 벌은 사 둔 게 있어요. 어릴 적에는 옷들이 많았는데 몸이 자라니 아까워요.”
“루시엘, 이참에 전담 테일러를 두는 것도 좋겠구나. 나와 솔리아페도 담당이 다르니까. 그들은 수선 마법도 할 줄 알거든. 우선 당장 입을 것들이 필요하니 어릴 때 입던 드레스 중에 입을 만한 건 그녀에게 맡겨서 사이즈를 조절하는 것도 방법이지.”
“그런 마법도 있었구나, 좋아요.”
“그래, 유효 시간이 며칠 가지 않고 값비싼 마법이라 통용되는 건 아니다만.”
하긴 그런 마법을 쉽게 접한다면, 의류점은 망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드레스 생각은 루시엘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곧 식탁 위에 만찬이 펼쳐졌으니까.
문어와 조개관자, 올리브와 양상추가 들어간 향긋한 남부식 해산물 샐러드 전채요리를 시작으로 생연어와 굴이 레몬과 함께 나와 입맛부터 돋웠다.
“많이 먹으렴. 오늘은 남부 카리비 해안식 식단이란다.”
“아, 남부식 요리는 처음이에요.”
루시엘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접시에 요리를 덜어 맛을 보았다. 상큼하면서도 신선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우와, 맛있어요.”
“세스 주방장이 남부로 잠시 출장을 다녀오더니, 레시피를 배워 온 모양이야. 네가 오기만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던데.”
“앗, 그랬구나.”
솔리아페의 말에 루시엘은 하마터면 너무 감동해 보석을 쏟을 뻔했지만, 겨우 참아 냈다.
그간 루시엘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훈련을 조금씩 거듭했다. 마탑에서 생활하려면 남들과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니까.
덕분에 할머니의 드래곤 마나가 담긴 부적은 문학 살롱 이후로는 곱게 보관 중이었다.
음료는 세 가지가 준비되었는데 가벼운 화이트와인과 사과향 스파클링 음료, 아몬드를 첨가한 우유였다.
어른들 눈치를 보며 스파클링이 들어간 사과 음료로 손을 뻗자, 옆자리의 공작이 조용히 루시엘에게 우유가 든 병을 밀어 주었다.
“루시엘, 아무리 그래도 아직 술은……. 아빠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
“앗…… 이거 술 아니에요, 아빠.”
루시엘이 가볍게 웃었다. 뽀글뽀글 기포가 올라오는 마법이 담긴 음료였는데, 그가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가 한번 맛을 보더니 허락해 주었다.
잠시 후 세스 주방장이 직접 트레이를 끌고 다른 요리를 가져왔다.
“아가 마님, 돌아오셔서 기뻐요. 특별히 최고의 요리들로만 준비했으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와, 잘 먹을게요. 세스.”
루시엘을 위해 세스 주방장이 특별히 수비드 스테이크와 랍스터, 크랩 요리를 가져왔다.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에 침을 꼴깍 삼킨 루시엘은 이제 마탑의 요리 따위는 전부 잊어버렸다.
디저트를 먹을 수조차 없게 배부른 식사를 마친 루시엘은 이벨린과 소화도 할 겸 산책을 했다.
“루시엘, 네게 줄 것이 있다.”
“줄 것이요?”
할머니는 항상 감사하게도 루시엘에게 많은 것을 주시곤 했다.
루시엘도 사실 이벨린과 솔리아페에게 작은 선물을 드릴 참이었는데, 짐가방 맨 밑에 넣어 둔 걸 기억했다.
“저도 있는데 나중에 가져다드릴게요. 근데 또 무얼 주시려고요.”
이벨린이 웃으면서 바구니를 내밀었다. 편지와 함께 굉장히 단단한 껍질을 가진 열매가 들어 있었다.
봉투에 적힌 글씨를 단번에 알아본 루시엘은 그것이 키제프로부터 온 편지라는 걸 알아채고 뛸 듯이 기뻐했다.
“이건 키제프 편지잖아요! 드락카에 다녀오셨던 거예요?”
눈이 커다래진 루시엘을 보고는, 이벨린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말했다.
“그래, 편지를 마탑으로 전해 주려다가 네가 온다기에 기다렸지.”
루시엘이 걱정되고 궁금한 마음에 그녀의 손을 붙잡고 물었다.
“할머니, 키제프는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지요?”
“물론이지. 건강하다. 마지막 시련을 겪고 있는 중인 것 같더구나. 그래도 네가 마탑에서 모아 준 편지들을 보고 힘이 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키제프를 다시 만날 날이 기대돼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가 돌아오길 누구보다 간절히 기다려 왔으니까.
루시엘은 시련을 겪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가도, 제 편지에 힘을 냈다는 말을 듣고 맑게 웃었다.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에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어떤 모습일지 여러 번 머릿속에 그려 봤지만 상상이 안 돼요.”
“키제프가 얼마나 단단하고 멋진 남자로 성장했는지 보면 깜짝 놀랄 거란다.”
“할머니, 감사해요! 저 우선 가서 편지 뜯어 보고 올게요.”
“그러려무나, 루시엘.”
이벨린이 그런 루시엘을 보고는 감상에 젖었다.
“이게 전부…… 루시엘, 저 아이가 없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지.”
루시엘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안고, 별궁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가 이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편지를 확인했다. 실로 오랜만에 받아 보는 편지였다.
「루시엘에게.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 보니 정신없이 흘러간 것 같기도 해.
드래곤의 힘을 받고 내 몸에 적응하는 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어.
내가 아닌 것 같아서 아직도 어색하지만, 차츰 적응 중이야.
이제 수련의 벽이라는 걸 통과했어. 마지막 시험이 하나 남아 있는데, 내가 그걸 잘 해낼지 잘 모르겠지만 해 보려고 해. 아니, 반드시 해내서 네게 달려갈게.
루시엘, 내게 힘을 줘.
네 응원을 받으면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거든.
드락카의 하늘에서 네가 있는 방향을 끝없이 보다가 귀여운 별자리를 하나 발견했어.
아무도 없는 새벽에 뜨는 별 무리를 하나씩 이어 보니까 내가 아는 게 그려지더라고.
눈토끼라고 이름 붙여 줬어.
너는 항상 내 별이기도 하니까.
곧 만나길 기원하며.
추신. 그 열매를 심어 봐.」
방으로 채 돌아가기 전에 정원에서 혼자 키제프의 편지를 다 읽어 버린 루시엘은 그만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더 커다란 마음이 전해지는 편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매일 밤 새벽까지 날 그리워하면서 잠들지 못한 걸까?’
저릿하고 뻐근하게 아파 오는 심장에 루시엘의 마나가 모여들었다.
또롱, 또로롱.
사파이어와 옵시디언이 동시에 만들어져서는 풀숲에 툭툭 떨어졌다.
루시엘은 영롱하고 투명하게 빛나는 사파이어 대신에 검디검은 옵시디언을 집어 들었다.
키제프와 떨어져 있는 동안 슬픔의 감정으로 수많은 사파이어를 만들었지만, 옵시디언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키제프를 걱정하고 기다리는 마음이 고통이 되었구나.’
힘겨운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키제프를 생각하니, 자신도 결코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서 너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이지만, 그거라도 몇 번이고 할게. 무사히 어서 돌아와. 나도 미래를 위해서 다시 힘낼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루시엘은 한참을 혼자 정원에서 서성거리다가, 눈물을 닦아 내고는 별궁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