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 이야기를 나누었던 모양이었다.
공작의 집무실로 이번에는 솔리아페와 이벨린이 직접 찾아와서 일 이야기는 중단되었다.
“우리 루시엘이 왔다고?”
“엄마, 할머니!”
그리웠던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자, 루시엘은 어쩐지 살짝 눈물이 차올라 그들에게 다가가 안겼다.
“어이구, 우리 강아지. 루시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시내에서 마차를 돌려서 왔단다.”
이벨린이 루시엘의 뺨을 매만지면서 한참이나 포근하게 안아 주었다.
“천천히 오시지 그러셨어요. 이제 완전히 돌아왔는걸요.”
루시엘이 눈물을 슥 닦아 내자 이벨린이 손수건을 건넸다.
“한시라도 빨리 네 얼굴을 보고 싶어 그랬지. 우는 걸 보니 아직 아기로구나.”
“아니에요, 다들 얼굴을 보니까 이제 안도가 되어서.”
향긋한 손수건을 받아 눈물을 살짝 닦아 낸 루시엘이 또롱 토파즈를 만들었다.
솔리아페도 다가와 루시엘을 살짝 끌어안으며 푸른 눈이 촉촉해졌다.
“루시엘, 나도 안아 보자.”
“엄마. 보고 싶었어요.”
“나도. 잘 돌아왔어, 네가 없으니 성안이 어찌나 적적하던지.”
“참 마나 영양제는 잘 챙겨 드시고 있는 거지요?”
“물론이지. 그 약 덕분인지 아주 건강해.”
마나 리스가 완쾌됐었지만 그래도 조바심이 든 루시엘이 묻자 솔리아페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그런 둘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벨린이 말했다.
“두 사람 정말 친 모녀 같구나. 그나저나 루시엘, 그야말로 요정이 되어서 돌아왔어. 누구 손주 며느리가 이리 예쁠꼬?”
솔리아페와 공작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빛냈다.
“정말이구나, 루시엘. 사교계의 영애들이 전부 긴장할 미모야.”
“우리 루시엘은 나라를 흔들 미모지. 아무래도 호위를 강화해야겠다.”
“아니에요. 할머니와 엄마의 미모를 따라가려면 멀었는걸요.”
그간 세간의 예쁘다 하는 미인들도 보았지만 루시엘 눈에는 솔리아페와 이벨린이 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자아내는 분위기부터 기품이 흐른다. 그런 점은 닮고 싶었다.
“말도 곱게 하는구나.”
가족들을 보며 웃자 이벨린이 마탑의 로브 차림인 루시엘을 보며 말했다.
“근데 옷도 안 갈아입고 와서 일 이야기부터 하고 있었니? 피곤할 텐데.”
“아, 그게 아빠가 계시다길래 인사부터 먼저 하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졌어요.”
“그럼 우선 씻고 푹 쉬는 게 좋겠구나. 그런 다음 맛있는 저녁을 먹자꾸나. 뭘 먹고 싶니? 세스에게 말해 두마.”
“음…… 먹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할머니. 그렇지만 아무거나 다 좋아요.”
주방장 세스의 요리 솜씨가 그동안 얼마나 그리웠는지.
마탑의 주방장은 솜씨가 퍽 안 좋아서 밖에 나가 사 먹거나, 주방에서 따로 요리를 만들어 먹는 게 나았다. 그 때문에 아예 요리 당번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
루시엘도 처음에는 요리를 못해 고생을 좀 했지만 이제 그것도 다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직접 끓인 크림 스튜도, 구운 파이도 제법 먹을 만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우리 루시엘 뺨이 왠지 홀쭉한데. 이런, 마탑에서 우리 애를 쫄쫄 굶긴 건 아니겠지? 그이에게 물어봐야겠구나.”
‘마탑의 고위급 간부들은 식당이 달라요, 할머니.’
눈썰미가 좋은 할머니의 눈을 피해 루시엘이 말했다.
“그럼 식당에서 뵐게요.”
“오냐. 이따 보자.”
제게서 눈을 뗄 줄 모르는 어른들에게 루시엘이 인사하며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하고 몽글몽글했다.
마탑에서 지내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역시 집이 가장 좋았다.
루시엘은 괜스레 정원이며 복도를 서성이며 거닐다가 별궁으로 향했다. 루시엘이 들고 왔던 짐가방은 누군가 이미 정리를 마쳤는지 텅 비어 있었다.
테이블 위, 유리 화병에 예쁜 백합과 수국, 리시안셔스와 안개꽃이 섞인 꽃다발을 꽂고 있던 로즈가 루시엘을 보고 활짝 웃었다.
“아가 마님, 어서 오세요. 아가 마님이 오신다길래 그이에게 부탁해서 특별히 가장 예쁜 아이들로 골라 왔어요.”
“진짜 예뻐. 고마워, 로즈.”
향긋한 꽃내음이 물씬 풍겨 별궁의 아늑한 응접실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루시엘은 부른 배 때문에 허리에 손을 짚고 있는 로즈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이제 일은 쉬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움직여도 돼?”
“너무 가만히 있으니까 답답해 죽겠는걸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우리 아가 마님이 오시는 날인데 안 올 수가 없었어요. 간단한 일만 하니 오히려 운동이 되고 좋아요.”
주근깨 섞인 로즈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고 예뻤다.
정원사 청년 찰리와 꾸준히 연애하더니 아기까지 가진 로즈였다. 어느새 배가 커다랗게 부푼 그녀를 보고 있자니 세월이 빠른 것 같아 감회가 새로웠다.
“행복해 보여서 나도 기뻐, 로즈. 결혼식은 언제야?”
“……사실 지난달에 성당에서 둘만의 결혼식을 치렀어요.”
“뭐어? 거짓말. 왜 연락 안 했어?”
놀라움과 동시에 약간 섭섭하기도 했지만 무척 기쁜 일이라 루시엘은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축하를 건넸다.
“결혼 축하해. 로즈는 내 친구 같기도 하고 친언니 같기도 한걸. 아, 그리고 집 위치 좀 알려 줘.”
결혼 선물과 아기를 위한 임신 선물까지 한 번에 보내야 하니까.
“나중에요. 아가 마님. 얼른 씻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다른 시녀더러 목욕물을 받아 두라고 해 놓았어요.”
“알았어.”
욕실 안에 들어가 욕조에 몸을 담그니 한결 살 것 같았다. 그나저나 어릴 적에는 이 욕조가 아주 커다랗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리 크지 않고 적당했다.
곧 베시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아가 마님,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릴까요?”
“아…… 아니, 괜찮아. 나 혼자 할 수 있어.”
“알겠어요, 필요하시면 불러 주세요.”
“응.”
마탑에서 지내며 혼자 씻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목욕 시중을 받으려니 조금 부끄러웠다. 요즘은 몸이 부쩍 자라기도 했으니까.
루시엘이 볼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치렁치렁하던 머리를 수건으로 가뿐하게 틀어 올리고 목욕을 서둘러 마쳤다.
부드러운 가운을 걸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나서자 베시가 뽀송한 수건을 가져와 젖은 머리를 닦아 주며 웃었다.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우세요?”
“나도 컸으니까 혼자 씻는 건 당연해.”
“아가 마님도 사춘기가 오실 나이인지도 몰라, 베시.”
“그래도 왠지 서운한걸, 늘 들어드리던 목욕 시중인데. 아가 마님을 더 세심하게 보살펴 드리고 싶단 말이야.”
“알았어, 베시. 다음에 해 줘.”
“정말이지요?”
베시가 기뻐하며 웃었다. 그녀는 가운 속의 뽀얗게 빛나는 루시엘의 피부에 촉촉한 화장수를 뿌려 주며 말했다.
“그동안 별로 가꾸시지도 않았을 텐데 피부가 투명하게 빛이 나요. 고우셔라.”
오늘 집에 와서 예쁘단 말을 삼십 번도 더 들은 것 같았다.
물론 공작가의 가족들과 시녀들 모두 자신을 과하게 예뻐하니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듣기에 좋았다.
루시엘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전생에 말라비틀어진 모습에 비하면 지금은 건강하고 생기가 넘쳐 보였다.
‘낯빛도 화사해. 예전에 비하면 예뻐진 거 같기도…….’
“아 참, 어릴 때 쓰시던 침대가 이제 불편하실 것 같아서 침실을 새롭게 꾸미려고 해요. 예정보다 먼저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바꾸어 놓는 건데.”
베시의 머릿속은 복잡해 보였다. 침실뿐 아니라 커튼과 테이블도 바꾸어야 하고, 드레스룸의 화장대도, 옷들과 구두, 모자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 놓을 것이 많았다.
“그래도 침대는 쓸 만한데. 두 다리 뻗고 잘 수는 있는걸. 여기서 키가 좀 더 자란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말도 안 돼요. 아가 마님은 너무 검소하시다고요. 자, 어서 옷 갈아입고 식사하러 가셔요.”
베시가 미리 사 둔 드레스들을 꺼내 놓으며 말했다.
그중에 처음 보는 보라색 실크 드레스가 한 벌 있었다.
“이 드레스는 마님께서 결혼 전 십 대일 적에 입으시던 거라고 해요. 워낙에 고급 재단사가 만든 물건이라 세월이 지났는데도 새것처럼 그대로더라고요. 유행이 지났지만 버리기엔 아깝다고 하셔서 한번 가져와 보았어요.”
“진짜 예쁜걸. 이걸로 입을래.”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며 말했다.
* * *
단장을 마치고 루시엘이 만찬을 위해 식당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회랑을 총총 걸어가는데, 한 소년이 건너편에서 오는 것이 보였다.
주홍빛이 도는 금발에 석류알 같은 붉은 눈. 녹색 베스트 차림의 열 살 남짓한 남자아이가 눈동자를 굴리더니, 루시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루시엘을 본체만체하면서 고개를 휙 돌렸다.
‘어? 레오니 아냐?’
벨슈타인 공작성에 저런 외모를 가진 남자아이는 레오니밖에 없었다.
가끔 성에 다녀갈 적마다 레오니는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2년 전에 본 게 마지막이었고 길게 대화를 한 건 더 오래된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2년 안 만났다고 가족끼리 모른 척하는 게 어디 있어!
루시엘이 총총 달려가서는 레오니의 어깨를 붙잡으며 이름을 불렀다.
“레오니! 레오니!”
“…….”
“같이 가자. 그동안 잘 지냈어?”
레오니는 루시엘이 잡은 어깨를 툭 털어 내면서 뒤돌았다.
잔뜩 좁아 든 미간, 치켜 올라간 눈매가 왠지 싸늘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불만이 한가득한 표정…….’
그럼에도 아직 부푼 뺨이 귀여워 루시엘이 레오니의 머리를 쓰다듬으려고 하자 그가 슥 멀어지며 말했다.
“뭐야, 왜 이래?”
“……레오니, 나 루시엘 누나인데 나 안 보고 싶었어?”
루시엘이 다정하게 말하자 레오니의 붉은 눈이 구르며 말했다.
“말없이 갈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누나라고?”
자박자박.
쪼끄만 소년 주제에 부루퉁한 얼굴이 제법 서늘하게 굳더니 먼저 뒤돌아 가 버렸다.
열 살인데도 루시엘의 시선과 얼추 비슷할 만큼 키가 훌쩍 컸다.
‘레오니, 너 많이 컸네.’
루시엘이 얼른 레오니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