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공작의 애정이 듬뿍 담긴 변함없는 주접에 루시엘이 민망해 땀을 흘렸다.
“아빠야말로 여전히 근사하세요.”
공작은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지만 아직 삼십 대처럼 창창해 보였다. 지금도 그가 사교 파티에 나가면 힐끔거리는 여인들로 짐 마차 몇 대는 너끈히 채울 수 있을 터였다.
“그보다 보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나도 보고 싶었다. 잘 왔다, 루시엘.”
루시엘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너른 품에 안겼다. 커다란 아빠의 품을 느끼니 그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되었다.
공작도 루시엘의 빈자리로 허전하고 쓸쓸했던 공작성이 맑은 생기로 가득해지는 걸 느꼈다.
“마탑에서 네 마법 실력이 부쩍 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려 5서클이라니, 믿지 못할 이야기지. 벨슈타인의 자랑이다, 루시엘.”
벨슈타인의 핏줄이 마법에 능하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며느리인 루시엘까지 마법 실력이 좋다는 것이 세간에 전해지면서 다들 놀라워하고 있었다.
과거 어린 시절 문학 살롱에서도 영상구를 통해 한 차례 주목받았던 일이 있었기에 그 관심이 더했다.
특히나 시내에 나가면 루시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꽤 있어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이제는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그의 칭찬에 루시엘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답했다.
“……더 정진할게요. 화염 마법은 권속인 피닉스 덕분에 자신 있지만요.”
“확실히 네 권속인 피닉스를 사용한다면 화염 마법은 5서클 그 이상도 가능하겠군.”
“네, 아 피닉스에 대해서 레오니에게는 절대 말씀하시면 안 돼요.”
“음? 왜 그러지?”
“레오니의 속성이 불이잖아요. 저 때문에 괜히 위축되지 않았으면 해서요.”
“레오니 성격이라면 그럴 것 같진 않은데.”
공작은 잠시 불같은 성격의 제 아들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도 그랬지만 커 가면서 더 자기주장이 강해진 녀석이었다.
잠자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루시엘이 잠시 상체를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궁금한 것이 생각난 터였다.
“참, 아빠. 제가 제안 드렸던 일은 잘되어 가고 있는 거지요?”
루시엘은 마탑에서 지내면서도 벨슈타인의 일을 항시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미래의 벨슈타인을 지킬 방비를 해 두는 것이었다.
루시엘은 검은 장벽을 보강하는 것을 재차 제안했고 공작도 길리아트, 갈리우스와 의논 끝에 일부 약해진 벽을 허물고, 보수를 진행 중이었다.
너무 대대적인 공사라 갈리우스가 부담스러워했지만, 루시엘과의 인연을 생각해 기꺼이 맡아 주었다고 들었다.
공사는 거의 끝마쳤고 이제 남은 것은 장벽에 촘촘하게 봉인석을 심고, 실드를 배치하는 일들이었다.
“물론이다. 검은 장벽의 공사는 거의 끝마쳤으니 이따 둘러봐도 좋겠군.”
“정말요?”
“다만 아직 봉인석을 강화해 더 단단하고 촘촘하게 마법 실드를 배치하는 일이 남았단다. 테오 자작이 장벽에 대해 황자에게 흘리려고 시도했던 일이 있었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음…… 저도 그 일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어요.”
루시엘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실드 마법은 고위 마법인 데다가 엄청난 마나를 소모해, 기존 실드를 관리하는 마도사도 오랜 시간과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음, 조만간 실드 중앙관리실 회의에서 네 이야길 해 보지.”
“네. 저도 마탑에서 에리카 언니와 함께 제 보석의 연구를 더 진행하다가 알게 된 것들이 있거든요. 제 보석을 봉인석에 심어 두면 장벽이 한층 단단해질 거예요.”
루시엘이 기쁜 낯으로 말했다. 공작이 놀라 되물었다.
“네가 만든 보석을?”
“네. 사실 제 보석이 최상급의 마정석보다도 더 커다란 마나를 담고 있다는 건, 과거에 알아냈었어요.”
루시엘은 가방에서 마법 두루마리를 꺼내어, 보석의 마력 수치를 기록해 놓은 것들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루시엘이 그동안 에리카와 여러 가지 실험을 했던 기록들도 남아 있었다.
과거 루시엘이 보석을 심어 워터 드래곤이 더 튼튼하고 크게 자랐고, 피닉스의 장미에도 보석을 주었더니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부활에 성공했다.
또 마법 세공을 통해서 지팡이를 강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것에 착안해 루시엘은 호기심이 생겨 다른 것에도 시험해 보았다.
바로 마력이나 마법으로 가공된 다른 물질도 보석의 힘으로 강해질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하다면 검은 장벽을 단단히 보강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 터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부탑주인 티온에게 부탁해 공수한 작은 실드 봉인석에 루시엘의 보석을 같이 심었더니, 더 강한 방어 실드가 구축되었다.
특히, 옵시디언과 가장 상성이 맞았다.
“네 보석에 원소의 힘과 강한 마력이 담겨 있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다만……. 정말 대단하군.”
어렴풋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을 뿐 이렇게 세세한 내용을 본 적은 없었다. 루시엘이 직접 말해 주기 전까지는 궁금해도 묻지 않을 작정이었고.
공작은 경이로운 눈으로 루시엘을 보았다.
“확실히 장벽을 보강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기야 하지. 다만 네 보석을 사용한다는 게 걱정되는구나. 이 보석은 네 감정과 마나를 소모해야 만들어지는 것이니까 말이지. 장벽의 봉인석은 꽤 개수가 많이 필요해서 네 보석도 많이 소모될 거다. 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마나에는 무리가 없어요. 시클라인의 마나 영양제를 먹고 있으니까요.”
루시엘이 생긋 웃으면서 답했다. 다만, 옵시디언을 만들어 내는 감정이 고통이었기에 개수가 조금 부족할지도 몰랐다.
이번 생에서는 고통스러웠던 적이 별로 없었으니까.
다행인 동시에 지금 이 시점에서는 퍽 아쉬운 일이기도 했다.
연구가 기록된 마법 두루마리를 살피던 공작이 역시나 옵시디언이 고통에 의해 만들어지는 보석이라는 걸 살피더니, 미간이 구겨졌다.
“루시엘, 네 고통으로 만든 보석을 어떻게 쓰란 말이냐. 난 못 해. 이건 보류다.”
“아…… 그건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저도 예전과는 달라요. 이만큼이나 성장했는걸요.”
“안 돼, 루시엘.”
완강한 공작의 표정을 보니, 루시엘은 아무래도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았다.
우선은 다른 화제로 돌려야겠다고 생각하는 동안, 에바가 타이밍 좋게도 옥수수 스콘과 함께 홍차를 가져왔다.
“다즐링이랑 옥수수 스콘을 가져와 봤습니다.”
“고마워요, 에바. 마침 출출했는데……! 아빠, 향이 정말 좋아요. 먼저 드셔 보세요.”
루시엘이 웃으며 에바를 도와 레이스 모양의 차 코스터를 깔아 주고는 공작에게 다즐링 차를 권했다.
그녀의 섬세한 챙김에 마음이 스륵 풀리긴 했으나 공작이 말했다.
“네가 괴로워하는 건 절대로 볼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그나저나 미스릴 채광은 절반 이상 끝났으니, 이제 제련을 시도하셔도 좋을 때 아닌가요?”
루시엘이 미스릴 이야기를 꺼내자 공작이 신음을 흘렸다.
“끄음, 그게 말이다. 수소문해 보았는데 웬만한 대장장이들은 미스릴을 다루지 못하더군.”
“아빠, 그거라면 난쟁이 류프델에게 맡기시면 되잖아요.”
“이미 접촉을 시도했는데 미친 난쟁이가 너무 과한 보수를 요구해서 보류 중이다.”
사실 보류라기보다는 이미 엇각 난 상황이었다. 난쟁이가 이제 귓등으로도 들어 주지 않을 만큼 멀리 왔다.
“……아빠께서 직접 협상하러 가셨던 거예요?”
“망할 난쟁이. 얼토당토않은 요구에 욕설도 모자라 감히 나를 마법 주사위 따위로 속이려 들더군.”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고개를 끄덕이던 공작이 그때의 일이 다시금 떠올랐는지 이를 뿌득 갈며 분개했다.
“으음…… 길리아트 할아버지와 함께 가셨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아니면 다른 협상가를 보내시던가요. 이를테면 엘링턴 같은.”
남의 비위를 살살 잘 맞춰 주면서도 적당히 밀고 당기는 걸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그때 마탑 일로 바쁘셔서 나를 데려다주고 곧장 돌아가셨지. 그 난쟁이 놈과 둘만 남겨 두고…….”
‘최악의 상황이었구나.’
아무래도 류프델과 공작은 성격이 무척 강해 붙여 놓으면 안 되었다. 누구 하나 자존심을 꺾으려 들지 않았을 테니까.
류프델은 고집불통에 남을 장난스레 속이지만 조금만 비위를 살살 맞춰 주면 금방 꼬실 수 있는데 안타까웠다.
아니, 어쩌면 메이플 쿠키 하나로도 가능할지 모르는데. 루시엘은 고소한 옥수수 스콘을 베어 물며 생각했다.
“뭐, 상관없다. 다른 대장장이를 구하면 그만이니까.”
“음, 아니에요. 제가 한번 다녀올게요. 류프델과의 인연은 끈질기게 이어 가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그보다 류프델이 벨슈타인에 앞으로 협조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자신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에게도 어떤 사정이 있을지도 몰랐다.
마침 류프델과는 의논할 다른 일도 있으니, 루시엘이 직접 가 볼 참이긴 했다.
제르다에게도 먼저 연락을 취해서 같이 가는 것도 좋을 듯했다. 클로디아와의 일은 오래전 끝난 듯했으니까.
두 사람의 대화가 길어지자, 엘링턴이 집무실 안쪽으로 노크를 했다.
“두 분 회포는 다 푸셨습니까.”
“네, 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저런, 저도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오자마자 일 이야기를 안겨드리는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요, 아가 마님.”
“……음, 저도 같이 들을 이야기군요.”
“네. 카빌가에서 최근 저택을 담보로 해 섬을 매수한 모양입니다. 아가 마님이 예전에 정리해 주신 카빌가가 벌이려는 불법 사업. 그중에 하나를 시도하려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카빌가는 이제 더는 돈 빌릴 데도 없을 테니…….”
루시엘이 잠자코 제국의 신문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신문 한쪽 면에는 제국 최초로 와이번 경주 대회가 내달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역시 시작되었구나. 제국력 2033년, 그리고 블랙스콜피온 320329번.’
이건 긴가민가해서 문서에 정리해 전달하지 않았는데. 신문 기사를 보니 확실히 알겠다.
“엘링턴, 막시무스 폰 카빌의 최근 행방을 알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막시무스 폰 카빌이라면, 카빌가의 장남 말입니까?”
“네. 그가 몇 년 뒤 큰돈을 벌게 될 거예요. 그걸 미리 가로챌 계획이 있어요. 우리가 먼저 움직이기만 하면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