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검은색 슈트를 입고 보라색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키제프는 오늘따라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멋졌다.
가넷처럼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루시엘에게 고정되었다.
금빛 머리칼은 바람에 살랑 흩날렸다. 반질반질 매끄러운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눈을 뗄 수 없게 누군가 섬세하게 아로새긴 조각 같다.
루시엘이 진홍빛 눈망울을 크게 키운 채 말했다.
“키제프?”
“……안녕.”
“이게 다 뭐야? 너무 예뻐.”
“내 마음을 보여 주는 중.”
키제프가 싱그레 상큼하게 웃으며 루시엘에게 연보랏빛 라일락을 엮어 만든 꽃다발을 건넸다. 루시엘이 꽃다발을 받아 들자, 그가 손을 내밀어 단단히 잡은 다음 끌어당겼다.
“이리 와.”
“어엇…… 어디 가려고?”
침대 위로 단숨에 끌어 올려진 루시엘이 무서워서 키제프의 옆에 바싹 붙었다.
“별 보러 가자고.”
“별……?”
진지한 눈에 머금은 빛이야말로 별처럼 반짝였다. 그의 단정한 일자 입술이 보기 좋게 올라갔다.
루시엘은 부끄러움에 조용히 꽃다발에 코를 박았다. 라일락 향기가 솔솔 풍겨 왔다. 두 사람을 태운 침대가 다시 둥실 떠올랐다.
손에 잡힐 만치 별들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침대는 유유히 하늘 위를 날기 시작했다.
루시엘이 입을 벌리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황홀하도록 고요한 밤, 총총 빛나는 별들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여기서 보니까 더 잘 보이네.”
“……생각보다 안 무섭지?”
끄덕끄덕.
루시엘이 힐끗 그의 잘생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섭지 않았다. 그보다 그녀를 더 신경 쓰이게 하는 것들이 많았으니까.
두근두근.
심장은 북처럼 쉼 없이 울리고, 밤하늘의 별과 눈앞의 소년은 마법처럼 근사했다.
키제프가 써 준 편지의 말들은 머릿속에서 부유하고, 그의 손은 따뜻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해서인지 도리어 벅찬 감정이 느껴짐에도 보석은 만들어 내지 않았다.
루시엘이 말했다.
“아까 그 편지랑 풍선들……. 그리고 지금 이것도 전부 꿈같아. 감동이야. 근데 할 말이 뭐야?”
“……이래도 모른다고? 심각하게 둔하네.”
루시엘이 종알거리자, 키제프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의 이마에 콩 머리를 부딪쳤다.
“왜겠어, 루시엘.”
“……으응?”
“…….”
말없이 저를 빤히 바라보던 키제프의 눈이 한층 깊어지며 손을 잡았다.
“널 좋아하니까.”
“……?”
“좋아해.”
거침없이 전하는 키제프의 고백을 들은 루시엘의 심장이 더 크게 두근거렸다.
누군가에게서 받는 진심 어린 첫 고백이었다. 기뻤다. 그 사람이 키제프라서 더.
루시엘은 도통 어쩌면 좋을지 몰라 고민이 되었다.
키제프에게 끌리고 있는 건 분명했지만, 이 감정을 완벽히 정의 내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웠다.
키제프가 누구보다 소중하지만 그 마음을 섣불리 결정 내리고 싶지 않았다.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엘도 조금 더 자신의 감정을 깨달을 시간이 필요했다.
‘나도 키제프를 좋아해. 하지만 키제프와 정말 같은 마음인지는 잘 모르겠어. 이런 감정은 나도 처음인걸……. 가벼운 마음으로 답해서 키제프를 상처 주고 싶진 않아. 그는 진짜 결혼해 영원히 함께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더더욱.’
처음부터 자신과 벨슈타인의 미래의 파멸을 막고 안전을 위해 했던 결혼 계약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남아 있었다.
“키제프, 그렇지만 우린 계약이…….”
또 그 핑계를 댈 줄 알았다. 키제프가 루시엘을 곱게 흘겼다가 이내, 진득하고 단단한 투로 말했다.
“계약은 이제 상관없어. 루시엘. 너는 이미 내 신부야.”
“8년이 지나면 계약이 끝나잖아. 그러기로…… 했잖아. 우리.”
루시엘이 조심스레 말하자, 키제프가 하, 하고 다시 한숨을 흘리며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그럼 8년 있다가 나 버리고 도망가려고 했어?”
“그, 그게 아니라 그렇게 정했으니까.”
“내게서 도망갈 수 있다고 생각해? 소용없어.”
순간 짐승의 것처럼 키제프의 눈이 가늘어지며 입꼬리는 묘하게 길어졌다. 그의 입술이 루시엘의 은빛 머리카락에 닿았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루시엘도 알 것 같았다.
이게 어떤 마음이든 이미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8년 뒤, 그때는 이렇게 하면 되겠군.”
“……어떻게?”
루시엘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키제프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나와 다시 또 결혼해 줘.”
루시엘의 눈망울이 토끼처럼 커다래짐과 동시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잠깐만 키제프, 난…… 으?”
루시엘이 말하기 전에 키제프가 입을 손으로 막았다.
제 마음을 자각하지 못했을 루시엘에게 지금 진짜 결혼을 강요하면, 요 자그만 눈토끼가 진짜 도망갈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냥 듣기만 해. 5년 후에 그 대답 다시 들으러 올게. 천천히 생각해 줘. 어쨌든 8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기 전까지 우린 부부야.”
8년 중 5년은 떨어져 지내겠지만 루시엘의 마음이 다른 놈에게 넘어가게 두진 않을 터였다.
아이가 소녀가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루시엘이 얼마나 반짝이고 예쁜 눈을 가졌는지, 상냥한 미소를 짓는지 다른 놈들도 알게 될지 몰랐다.
키제프는 그렇게 못을 박아 버렸고, 루시엘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
머리로는 진짜 그 감정이 맞냐고 묻지만, 심장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용기를 낸 루시엘이 솔직하게 말했다.
“네 말대로 나 지금 어떤 대답은 못 하겠어. 나도 너를 이성으로서 좋아하는지 아닌지 몰라. 결혼도 당장은 대답 못 해 줘. 그렇지만 너랑 있으면 자꾸 이걸 만들게 돼.”
파아아, 세찬 박동과 함께 루시엘이 또로롱하고 영롱한 스피넬을 만들어 냈다.
분홍빛 뺨이 되었지만 루시엘은 고개를 든 채 말하며 제 보석을 그에게 전해 주었다.
“지금은 대답 대신 이걸로 만족할게.”
키제프의 눈이 부드럽게 휘었다.
“그러니까 지금 대답하지 마. 루시엘, 네 마음이 나와 같아지길 기다릴게.”
“고마워…….”
키제프의 눈이 사르르 접히면서 루시엘을 폭 안고, 보드라운 뺨에 얼굴을 비볐다.
루시엘은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었다. 코앞에서 쏟아지는 별들, 그에게서 나는 차가운 바람 내음, 달짝지근한 공기까지 모든 걸 기억했다.
* * *
며칠 후 키제프는 드락카로 떠났다.
드래곤의 땅 드락카는 마계를 통과해 가야 하는 멀고 험준한 지역이었다.
전서구나 우편 마차를 통해 서신을 나눌 수도 없었고, 통신구가 통하는 지역도 아니었다. 간간이 그곳을 드나드는 이벨린을 통해서 키제프의 소식을 들었고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이듬해 봄, 처음 받은 편지에서는 ‘죽을 것 같다’로 시작해 낯선 땅에서 적응하기 힘들어 보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차츰 괜찮아진 듯 보였다.
「보고 싶은 루시엘에게.
잘 지내고 있어? 아직 전하지 못한 편지가 여섯 통인데 그래도 펜을 들었어. 이럴 거면 차라리 책을 쓰는 게 낫겠군.
네가 걱정하는 것보다 이 마을은 살기 좋은 곳인 것 같아. 드락카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마을이라 야만스러운 방식이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도 이제 익숙해졌달까. 가리는 음식도 없어졌어.
이곳에는 드래곤만 있는 건 아니야. 나처럼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이 제법 많이 살고 있어.
물 속성 드래곤이 적은 탓에 식수가 귀한데 워터 마법 덕분에 나는 제법 쓸 만한 녀석이라는 취급을 받고 있어. 아카데미에서 외톨이였던 내가 말이지.
매일 아침 나무줄기를 타고 숲을 누비다 보면 하루를 시작할 마음이 들게 돼. 어서 하루하루 성장해서 너에게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레이븐은 여기 와서 초콜릿이 없다고 계속 징징거려서 미치겠군. 아, 다음에 이벨린 할머니를 통해 초콜릿 좀 보내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나는 루시엘 네 편지만 오면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아도 좋겠지만.
이만 훈련 받으러 가야겠어.
너는…… 잘 지내고 있는 거지? 다음 편지에선 마탑의 마도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 줘. 한 명도 빠짐없이.」
키제프의 편지는 이벨린이 오고 가는 반년간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나 그 뒤로는 전달이 쉽지 않아 간격이 더욱 벌어졌다.
한 달, 두 달, 석 달 다음은 여섯 달. 오가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편지에 담기는 키제프의 아쉬움과 루시엘을 향한 그리움도 깊어졌다. 그러나 루시엘은 서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단단하게 성장하고 있을 키제프라는 걸 믿고 있었으니까.
미래에 자신을 구원해 준 그였으니, 훌쩍 돌아와 웃어 줄 그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었다.
루시엘은 어서 그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편지를 썼다.
[누구보다 강한 키제프에게.
오랜만이야. 요즘은 편지가 부쩍 줄었네. 키제프도, 나도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하지 마.
내가 준 보석 잘 간직하고 있지? 스피넬에 키제프가 잘되길 빌었으니까 다 잘될 거야. 내 축복의 힘을 받아서.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아직 멀기만 하지만 그래도 언젠가 오겠지?
그때가 되면 키제프도, 나도 서로를 못 알아보게 될 만큼 커지는 건 아닐까? 가끔 꿈에서 널 봤는데. 키가 나무처럼 컸거든. 그래도 난 너를 알아볼 수 있을 거야.
나도 언제나 응원할게.
키제프가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 누구보다 강한 벨슈타인으로 있을 테니까. 어서 돌아와. 네가 없는 벨슈타인은 조금 재미가 없으니까. 보고 싶어.
너의 작은 별님 루시엘.]
앞으로 5년. 긴 시간이었지만 루시엘에게는 모든 걸 완벽히 준비하기에 짧을지도 몰랐다.
크리스털 페어리를 노리는 자들은 아직 어둠 뒤에서 흉흉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으니까.
루시엘은 편지를 봉하며 일어섰다. 조용하던 피닉스가 말을 걸어왔다.
“오늘도 또 마법 수련하러 가는 것이냐, 루시엘?”
“응, 키제프만큼 나도 열심히 할 거야. 더 강해져야 하니까. 나도, 벨슈타인도, 모두를 지키려면 더 성장해야 해.”
루시엘은 지팡이를 소환해 보석이 세공된 곳을 가만 쓰다듬었다.
각각 원소의 보석들이 품고 있는 힘들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지팡이도 더 성장시킬 수 있을 것 같아.’
그러기 위해서는 마법을 계속해서 수련해야지. 더 높은 서클의 마법도 배울 거야.
‘더 강해져서 내 행복은 내가 찾을 거야. 유리관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때와는 달라. 누구든 나를 노리는 자들은 내 마법으로 해치울 수 있게.’
루시엘은 베시에게 편지를 부탁하며 수련장으로 향했다. 더 이상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모두가 곁에 있으니까.
달려가던 루시엘은 보지 못한 사이 지팡이의 보석들이 점차 은은하게 빛났다. 주인의 그 의지에 반응하며 조금씩 숨을 고르듯이.
미래는, 멀지 않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