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열한 살이 되었던 봄부터 4년이 지나는 동안, 루시엘과 주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클로디아 황녀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우울증 치료 양성사를 2기까지 배출했고, 그들은 고아원이나 황도의 시내에도 배치되는 등 활약을 하고 있었다.
시클라인의 약제원은 아기 영지에서 감당하기엔 모자랄 만큼, 규모가 커져서 이제 영지 내 다른 곳에 크게 약제원을 차렸다. 마나 영양제가 안정성 테스트까지 통과해 황실과 약제사 협회의 특허까지 받은 영향이 컸다. 그녀가 만든 마나 영양제는 이제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필수 약이었다.
막스의 유리공예는 제국 전역에서 인기를 끌어, 이브나크도 이제 명실상부한 유리공예의 산지로 주목받았다. 루시엘은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막스 씨는 이제 엄연히 유리공예 마스터니까, 제자들을 가르치고 장인 길드를 운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에리카도 마탑 내에서 연구 실력이 꾸준히 향상되어 다른 연구원들을 이끄는 팀장이 되었고 에레스도 견습 딱지를 떼서 이제는 엄연히 정식 마법사로 활동 중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꾸준히 성장을 꾀하는 동안 루시엘도 스스로 전환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키제프가 드락카를 선택해 힘을 키우고 성장하기로 했으니 루시엘도 그러고 싶었다.
‘나도 어딘가에 들어가 자신을 단련하고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해.’
루시엘도 어른들과 진로를 상담해, 두 가지로 선택이 좁혀졌다.
아카데미에 가는 것과 마탑에 들어가는 것으로.
루시엘은 마탑을 선택했다. 그곳에 있는 만큼은 마음껏 마법을 단련할 수 있었으니까.
키제프와의 이별을 이겨 내려면 무언가에 몰두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탑에 들어간 루시엘은 에리카와 에레스,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유대를 쌓으면서 조금씩 임무를 했고 마법 수련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덕분에 마법의 성장이 뚜렷하게 있었다.
―허, 마탑주 님께서 제자로 삼으신 이유가 있었군요. 4년간 무려 5서클까지 성장하시다니. 마법의 천재가 아닙니까.
그녀의 드러난 마법 실력만 보고서도 사람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하지만 이제는 마탑을 벗어나야 할 때였다.
너무 뛰어난 재능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독이 된다는 걸 루시엘도 알고 있었다. 적당한 때에 물러나는 것이 좋았다.
무엇보다 이제 슬슬 다시 해야 할 일을 본격적으로 손에 잡을 때가 되었다.
얼마 전 류프델이 만들었던 다이아몬드 브로치와 연결된 영상구에 기록이 하나 잡혔다고 길리아트가 알려 주었다.
내년이면 레이놀드 황자도 슬슬 수도원에서 나올 시간.
카빌 가문은 사일런트 섬을 매수하지 못한 대신 빚을 내 다른 섬을 매수하는 등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엘링턴과 호크아이가 파헤친 바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곧 그들이 움직일 시간이었다.
막시무스가 큰돈을 벌었던 그것.
루시엘은 마탑을 떠나면서 골똘히 잠겼던 생각을 털어 냈다. 어느새 루시엘과 친언니처럼 지내는 에리카가 말했다.
“루시엘, 조심히 가.”
“응, 에리카 언니. 또 만나.”
“다음에 나랑 재대결하기로 한 거 기억나지?”
“……으음. 몇 번을 대결해도 에레스는 나한텐 안 될 텐데.”
에리카와 에레스 남매가 루시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걸 보던 긴 로브를 두른 남자가 멀리서 지켜보더니 저벅저벅 다가왔다.
어깨까지 늘어뜨린 밀색 머리카락에 페리도트 같은 연두색 눈동자. 항상 꽃을 한 송이씩 들고 다니면서 묘하게 나른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티온 세그리스였다.
차기 부탑주이자 북부 지부 마탑주로 점쳐지고 있는 인물 중 하나였지만 길리아트의 평가로는 조심할 놈이었다.
마탑에서 잘 지내려고 루시엘이 어쩔 수 없이 점수를 따 두었던 사람인데, 어째 너무 과하게 따 버린 모양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거 같은데……. 마탑에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어렵지 않으니 마음 바뀌면 말하도록 해. 정식으로 마법사 등록도 하고 말이지.”
티온이 루시엘의 짐가방을 들어 주며 말했다.
“아뇨, 그건 생각해 볼게요. 어서 가 봐야 해요. 해야 할 게 아주 많아요. 부탑주님께는 그동안 신세 진 게 많았어요.”
루시엘이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런, 진짜 우릴 버리고 가겠다는 거지.”
그는 정말이지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네, 갈게요.”
루시엘이 단호하게 말하며 마탑의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손을 흔들었다.
“남의 손주 며늘아기에게 너무 친절하구나. 불쾌하군. 루시엘, 그놈 그만 상대하고 이만 가자꾸나.”
“네.”
루시엘은 길리아트와 함께 이동포탈을 타고 공작성으로 돌아왔다.
파아아.
가장 먼저 응접실로 나온 건 에바였다. 루시엘은 달려가 에바와 베시를 꼭 끌어안았다.
“아가 마님, 이게 얼마 만인가요.”
“넉 달밖에 안 됐잖아요. 지난번에 다녀갔으니까.”
“그래도 이번엔 아주 돌아오신 거잖아요. 돌아오셔서 기쁘네요. 흑.”
“나도 오니까 너무 좋아.”
“점점 예뻐지시는 것 같아요, 우리 아가 마님. 언제 이렇게 크셨을까.”
베시의 말대로였다.
열다섯 생일을 앞둔 루시엘은 누가 봐도 예쁘게 자란 소녀였다.
이제는 마냥 작기만 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키도 예전에 비하면 훌쩍 자랐고 곧게 뻗은 우아한 팔다리가 백조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마치 활짝 핀 수선화처럼 청초한 미모였다. 그럼에도 아직 아이 티가 남아 있는 볼살 때문에 귀여웠다.
자신을 마냥 예뻐하는 사람들을 만나니, 루시엘도 기뻤다.
“식구들은 다들 어디 가셨어?”
“큰 마님과 마님께선 시내에 가셨고, 주인님께선 집무실에 계세요. 레오니 도련님은 수업 중이고요.”
“그럼 아빠께 먼저 인사드려야지.”
루시엘은 설레는 마음으로 공작의 집무실부터 들렀다. 마침 보좌관들이 모두 어디 갔는지 보좌관실에 남아 있는 한 영식이 루시엘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 역시 루시엘의 또래로 보였다.
“여, 영애께서는.”
“실례할게요, 공작 각하를 뵈러 왔어요.”
“아, 안에서 저희 아버지와…….”
“그랬군요. 고마워요, 영식.”
“아, 네에.”
루시엘이 감사 인사를 하고 소파에 앉자, 그가 조심스레 루시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여, 영애께선 이름이 어떻게……되시나요? 부모님과 함께 오셨나요?”
“아, 아뇨. 저는 영애가 아니라 이 집 며느리인데요.”
“네에??”
루시엘이 맑은 눈동자를 굴리며 생긋 웃자, 그는 당황했다가 이내 낙심한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보좌관 팀이 돌아와 루시엘과 반갑게 인사했다.
“아가 마님, 돌아오셨군요.”
“나날이 예뻐지십니다.”
그때였다. 문이 달칵 열리면서 집무실 내부에서 공작을 비롯해 중년의 다른 귀족 남성과 엘링턴이 함께 나왔다.
새로운 사업을 의논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시엘을 발견한 공작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방금 전까지 서늘하기만 하던 기색이 금세 달라지며 입꼬리는 슬쩍 올라갔다.
“우리 딸, 언제 온 것이냐?”
“방금이요.”
“호, 벨슈타인 공작께 이렇게 곱고 예쁜 따님이 있으셨습니까.”
먼 지방의 귀족인 터라 벨슈타인의 내부를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딸 같은 며느리지. 백작의 제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소. 우리 애와 재회를 해야 하니 다음에 보도록 하지.”
직설적으로 말해서 얼른 가라는 뜻이었다. 다행히 백작은 눈치가 좀 있었다.
“허허, 알겠습니다, 각하. 아들 하나만 있는데 참으로 부럽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지요, 가자.”
백작 영식이 루시엘을 힐끔 보다가 제 아버지와 함께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그 시선이 퍽 못마땅하던 공작이 보좌관들에게 그들이 나가자 찬물 한 잔을 요구했다.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공작은 얌전히 저를 기다리고 있는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루시엘, 다음부터는 손님이 있을 때는 네 방에 있다가 오도록. 예쁜 널 누군가 눈독 들일지도 모른다.”
“네? 아빠 눈에만 예쁜 걸 거예요.”
“아닌데, 그렇지 않나?”
공작이 보좌관들 한 명, 한 명에게 루시엘이 예쁜지에 대한 대답을 기다렸고 그들은 찬양을 읊었다.
옆에 있던 엘링턴이 루시엘에게 슬쩍 말했다.
“아가 마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그렇게 해 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각하가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치만 정말 예뻐지셨습니다. 다음 생에서는 아가 마님 아들로 태어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엘링턴 역시 수려한 외모 덕에 뭇 영애들이 전하는 고백 편지가 늘어난다고 들었다.
“익, 뭐라구요? 농담이 과한데요, 엘링턴.”
“그래야 그 미모를 닮죠. 자, 그럼 그동안의 회포를 풀어 볼까요.”
엘링턴이 웃으며 루시엘을 집무실 안으로 안내해 데려갔다. 그러나 공작이 루시엘의 어깨를 감싸면서 엘링턴에게 차갑게 말했다.
“됐고 자네도 나가.”
“……예, 예. 제가 감히 어디라고 끼어들겠습니까.”
엘링턴이 물러가자 공작은 그제야 루시엘을 푹신한 소파로 데려갔다.
문득 예전이 떠올랐다. 루시엘은 혼자서 소파에 올라가지 못해, 그가 앉혀 줄 때도 있었다.
“언제 이렇게 자랐지. 루시엘, 키가 갈수록 크는 것 같군.”
“아직 160도 안 되는걸요.”
워낙에 키가 큰 공작에게는 가슴에도 못 미치는 키였지만, 그래도 무척 커졌다. 처음 보았을 땐 달랑 들어 올려야 할 만큼 아주 작았으니까.
공작은 친딸처럼 루시엘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마탑에 간 뒤로는 몇 달에 한 번씩 띄엄띄엄 마주쳤음에도 루시엘은 만날 때마다 훌쩍 자라서 돌아왔다. 처음 벨슈타인에 왔을 때는 여섯 살 아기처럼 작았는데, 이제 어엿한 소녀로 자랐다.
뿐인가.
영롱한 분홍빛 눈과 가지런한 코와 딸기색 입술이 여전히 요정 같았다. 뽀얗고 작은 얼굴에 가득 들어찬 앙증맞던 이목구비는 어릴 적보다 도드라져 길을 가다가도 누구나 뒤돌아볼 미인이 되었다.
달빛을 엮은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발과 윤이 나는 매끄러운 피부도 눈이 부실 만큼 투명했다.
날이 갈수록 화사하고 싱그럽게 피어나는 미모에 예쁜 딸을 둔 아비의 마음이 된 공작의 조바심은 커져 갔다.
“하, 우리 루시엘. 내 아들놈에게 주기엔 분에 넘치도록 아깝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