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푹신한 피크닉 매트를 풀밭에 깔고, 커다란 흰색 차양이 달린 테이블과 의자까지 설치하자 금세 먼 휴양지에 놀러 온 것처럼 근사해졌다.
어른들이 앉아서 쉬는 동안, 루시엘은 레오니와 함께 숲길 사이로 다람쥐를 찾아다녔다.
“쩌기도 있다. 다람쥐 쪼끄매.”
“정말이네.”
루시엘이 도토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니 둥글고 예쁜 꼬리를 가진 다람쥐가 무섭지도 않은지 다가왔다.
그 모습을 레오니가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반짝였다.
“뉴나처럼 짝고 기여워. 얘뻐.”
통통한 볼 가득히 도토리를 먹는 다람쥐와 초코볼을 하나씩 볼 안 가득 굴리고 있는 레오니야말로 똑 닮아 있었다.
“네가 더 귀여워.”
루시엘의 칭찬에 레오니가 슬쩍 본 마음을 밝혔다.
“딘짜? 나 기여워? 그러엄…… 그럼 뽀뽀해죠.”
레오니가 눈을 감고 입술을 쭉 내밀었다. 루시엘은 입술 대신에 발그레한 아이의 뺨에 뽀뽀를 쪽 했다.
레오니가 뺨을 손으로 감싸며 눈앞에 뾰로롱 별이라도 본 것처럼 멍해졌다.
“우아! 해따. 뽀뽀. 뉴나, 나 이거 처음 뽀뽀얀데. 헤헤.”
부끄러워하다가도 이내 밝게 웃으면서 레오니가 조잘거렸다. 루시엘은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일어나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오니, 그런데 키제프는 못 봤어?”
“형아? 우웅.”
루시엘이 가족들이 있는 곳을 살폈다. 차를 마시면서 카드게임을 하는 이벨린과 솔리아페, 낮잠을 자는 길리아트의 여유로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루이비드는 업무 때문에 참석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지만 곧 멀리서 걸어오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아빠 오셨다. 가 보자, 레오니.”
“웅.”
루시엘이 레오니의 손을 잡고 피크닉 테이블로 다가갔다.
가족들은 모두 편안하고 활동적인 옷을 입고 있는 데 반해, 공작은 베스트 차림이었다.
“여보.”
“왔구나.”
“예, 이걸 보고 안 올 수가 없어서.”
루시엘이 말린 단풍잎에 적어 보낸 편지를 팔랑 흔들면서 공작이 대답했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 피크닉에 와 주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루시엘의 단풍잎 편지라니 탐나네.”
“어머, 나도 안 온다고 할 걸 그랬구나?”
솔리아페와 이벨린의 웃음소리가 높아졌고, 루시엘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공작은 매트에 앉아 다가오는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그의 입매가 조용히 올라갔다.
“오셨어요, 아빠?”
“아부디.”
“오냐, 이리 와라.”
공작이 커다랗고 단단한 양팔로 루시엘과 레오니를 각각 끌어안았다.
볼이 새빨개진 레오니를 보며 이벨린이 물었다.
“근데 우리 레오니는 왜 그렇게 볼이 빨개져서 왔누?”
“…….”
레오니가 부끄럽다는 듯, 포동포동한 조막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수줍어하던 레오니가 결국 루시엘과 뽀뽀했다고 실토하자, 곤히 자던 길리아트도 부산스러운 소리에 오만상을 쓰며 일어나 중얼거렸다.
“뭐야, 어떤 녀석이 우리 루시엘과 뽀뽀를 했어?!”
레오니가 손을 번쩍 들었다.
“요 넘이요!”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더 높아졌다. 이내 세스 주방장과 에바가 직접 피크닉 바구니를 가져다주었다.
각자 앞에 놓인 피크닉 바구니를 열고는 서로 다른 메뉴들을 하나씩 펼쳤다.
게살을 듬뿍 넣은 샌드위치와 훈제 닭, 문어구이 꼬치, 부드러운 코티지 치즈 샐러드, 버섯 크림 스튜, 라즈베리 머핀 등 가볍게 배를 채우기 좋은 먹거리들이 나왔다.
마지막 바구니에는 루시엘의 아기 영지에서 재배한 사과와 블루베리, 산딸기와 생크림, 신선한 우유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어째 키제프가 없으니 허전하구나……. 계속 기사단에서 지내고 있어서 루시엘도 통 못 봤지?”
“네.”
이벨린의 말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황도에 다녀와 공백이 길었다며, 쿠란티엘의 훈련이 더 강화되었다는 이야기까지는 전해 들었다.
때문에 훈련 중일 때는 다른 연락도 거의 받지 않았고, 같은 성에 있어도 얼굴 본 지 일주일이 넘은 것 같았다.
“그 녀석, 고민이 많을 겁니다.”
잠자코 있던 공작이 무언가 아는 듯한 말을 해, 루시엘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키제프가 고민이 있다고 했어요?”
“쿠란티엘과 진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더군. 원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녀석이 그런 말을 할 정도면 굉장한 고민을 하고 있단 거겠지.”
“……그랬구나. 몰랐어요. 항상 괜찮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루시엘은 키제프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것 같아 기운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네 탓이 아니라 누구나 오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니 걱정 말거라, 루시엘.”
‘네 앞에선 강해 보이고 싶어서겠지.’
공작은 뒷말은 아꼈다.
그런 다음 최근 들은 황자의 소식을 떠올렸다.
즐거운 자리에서 되도록 그놈 얘긴 입에 담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 말은 전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참, 루시엘. 황자는 최소 몇 년은 수도원에 처박히게 될 거다.”
“……아카데미행이 아니라요? 아빠가 손 쓰셨군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마.”
그가 느른하게 웃었다.
공작이 황자를 감시하기 위해 보냈던 스캐빈저 독수리가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고, 그걸 곧바로 황후에게 제보해 둔 터였다.
「황족을 감시한 불경죄를 덮는 걸로 감사 인사를 대신하지요. 벨슈타인 공을 믿어서가 아니라 우리 클로디아를 위해서입니다.」
황후는 바로 움직임을 취했고 공작의 제보는 사실로 드러났다.
알려진 곳은 사냥터 안쪽 깊은 곳에 수백 마리 동물들의 뼈가 무더기로 묻힌 작은 굴이었다.
취미로 사냥을 즐겼다기엔 너무 많은 숫자의 동물을 죽이고 박제한 정황이 여실히 드러나자, 그의 잔혹한 인성 논란이 클로디아를 지지하는 대신들 사이에서 먼저 일어났다.
개중에는 헤르만 백작 등 공작이 심어 둔 자들이 절반이었다.
“폐하, 폭군 아즈란의 일을 잊으셨는지요? 예부터 군주의 잔혹함은 나라에 피바람을 불러왔습니다. 벌써부터 생명을 장난감처럼 다루시다뇨! 이대로 두면 훗날 필시 나라에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반드시 본보기를 보이셔야 합니다.”
“으레 취미로 즐기는 사냥이 아닙니까. 아직 어린 나이십니다. 조치라면 그저 아카데미에 잠깐 보내시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가르솔 후작을 비롯해 황자를 지지하던 대신들과 팽팽히 맞서 대립했다.
황제는 몇 년 내로 황위를 이을 후계를 정할 듯 보였기에 여론은 더욱 들끓었다.
“약제 시험 감독관을 매수한 일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황자님의 교육 방법에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노이슈반은 고심하다가 황자의 처우를 발표했다.
“레이놀드 황자는 레트라논 신전 수도원에서 5년 동안, 신의 뜻에 따라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바른 품성을 익혀 돌아오도록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레이놀드는 황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자리를 떠났다.
* * *
“루시엘 님, 지난번 맡기신 핑크 다이아몬드를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도 쉽지 않네요. 아, 대신 마력 수치는 가장 높더라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점점 더 강한 마력의 보석을 주시네요?”
루시엘이 아기 영지의 연구소 건물로 들어서자 짧은 꽁지 머리에 커다란 안경을 낀 에리카가 다가와 보고했다.
루시엘도 예상한 바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일단 모양부터 범상치 않았고 과정도 그랬으니까요. 일반적인 원소의 힘이 담겨 있을 것 같진 않아요. 조금 천천히 알아내도 좋아요. 일단은 그게 연구할 마지막 보석이니까요.”
루시엘이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핑크 다이아몬드 뒤로는 아직 새로운 보석을 만들지 않았다. 또 다른 보석을 새로 만들지 미지수였지만 일단 남은 것은 핑크 다이아몬드뿐이었으니 마지막 연구인 셈이었다.
“……이번이 마지막 보석이라니 흑, 아쉬워요. 루시엘 님과 헤어지기 싫은걸요.”
에리카가 울먹이면서 루시엘의 어깨에 기댔다.
“헤어지지 않아요.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몰라요.”
“정말요?”
루시엘은 이제 그녀에게도 제 비밀을 알려 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에리카가 많은 보석을 연구해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또 그녀는 자신의 보석을 결코 탐내지 않고 순수한 열정으로 연구해 주었으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에리카 언니. 할 말이 있어요. 언니가 그동안 연구해 준 보석들 어디서 났는지 궁금했지요?”
루시엘은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면서 마나를 끌어모았다.
또롱, 하고 토파즈를 만들어 냈다.
“……어어? 아니? 이게, 꿈인가?”
에리카가 안경을 벗고는 몇 번 눈을 비비고 보석을 다시 보았다.
“꿈이 아니에요. 내가 만들었어요. 저는 감정으로 보석을 만들어 내는 크리스털 페어리예요. 그동안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건, 우리 벨슈타인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비밀 지켜 주세요.”
루시엘이 당부하듯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어, 아니…… 우와, 루시엘 님. 얼굴만 요정이 아니라 진짜 요정이셨구나…….”
“네. 보석을 만드는 힘이 저주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요. 내가 얼마나 강하고 빛나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 줘서 고마워요.”
순간 에리카의 머릿속에 이 힘 때문에 루시엘을 노렸을 나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많은 일을 겪으셨을 게 틀림없어. 이렇게 귀하고 강한 보석을 만들어 냈으니까…….’
“죽을 때까지 말 안 할게요. 맹세해요. 비밀을 알려 주셔서…… 흑, 고마워요.”
“잠깐만요, 에리카 언니. 왜 우는 거예요.”
루시엘의 자그만 손이 에리카의 어깨를 토닥토닥 쓰다듬었다. 울음을 그친 에리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근데 어떤 원리로 보석을 창조하는 거예요? 마법이랑 유사해 보이긴 하지만 루시엘 님의 능력은 너무 신기하잖아요.”
“……풋, 이제부터 다 알려 줄게요.”
그녀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이 귀여워서 루시엘은 웃음을 터트리곤, 천천히 보석을 만드는 것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어떤 감정으로 만들어 내는지도 전부…….
설명을 전부 들은 에리카가 정리하듯 내용을 되짚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일반 다이아몬드는 희생이었고 성수를 부으니 치유력과 생명력이 발동되었어요. 핑크 다이아몬드는 자신감, 열정에 의한 감정으로 만들어 낸 보석이라고 하셨죠? 으으, 이번엔 성수는 효과가 없었는데. 좋아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연구를 시작해 보겠어요.”
에리카가 활기차게 소매를 걷어붙이자, 루시엘도 든든해졌다.
“기대할게요.”
앞으로 어떤 보석을 만들어 내든, 에리카와 함께라면 다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