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무려 몇 달 만에 듣는 피닉스의 목소리였다. 며칠 전 살펴볼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말없이 잠잠했는데…….
‘어떻게 된 걸까?’
루시엘은 온실 정원과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면서도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윽고 둥그런 온실 정원에 다다랐을 때였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일렁거리는 빛이 밖에서도 비쳐 보였다.
그러나 온실 앞에는 루시엘보다 먼저 누군가 도착해 있었다.
보라색 긴 로브를 입은 길리아트였다. 루시엘이 반갑게 그를 불렀다.
“할아버지!”
“루시엘,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고 이벨린이 알려 주어서 이곳에 와 보았더니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구나.”
“아…… 그건 아마도 피닉스 때문일 거예요. 방금 저를 불렀거든요.”
“허, 너를 불렀다고?”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 그동안 잠들었던 피닉스의 장미가 저를 부른 이유가 있겠지요?”
“오, 드디어 시간이 된 모양이군. 어서 들어가 보렴.”
루시엘이 피닉스의 부활을 기다린다는 걸 알고 있는 그가 말했다.
“같이 들어가요, 할아버지.”
루시엘이 그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지만 길리아트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저 온실 정원의 문을 열어 보려고 했는데 열리지 않았단다. 어쩌면 피닉스는 네가 오기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지.”
“앗, 그러셨어요?”
“그러니 너 혼자 다녀오거라, 루시엘. 나는 여기서 기다리마. 혹시 무슨 일이 생기거든 크게 소리쳐라.”
피닉스가 루시엘에게 해를 끼칠 일은 없을 테지만, 길리아트는 걱정이 되어 단단히 일러주었다.
“네, 할아버지. 저 다녀올게요.”
루시엘은 그에게 팔을 벌려 작은 품으로 안아 준 다음, 긴장한 숨을 삼키고 나서 온실 정원의 문을 힘껏 밀었다.
평소보다 문이 무겁게 열렸다.
쿠우웅.
“열렸어요, 할아버지.”
루시엘이 뒤돌아보며 말하자, 길리아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역시 루시엘, 너만이 열 수 있었던 모양이구나.’
길리아트를 뒤로한 채 루시엘이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 정원은 루시엘이 알던 평소의 그 공간이 아니었다.
“……여긴 어디지?”
푹신한 잔디밭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자, 그 뒤로는 끝없이 펼쳐진 붉은색 물결들이 보였다.
폐부 깊숙이 싱그러운 생장미 내음이 가득 밀려왔다.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장미 향을 맡으며, 아름다운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맞아, 나 여기 왔었어.”
불의 제단에서 피닉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피닉스의 장미를 내어주면서 데려가 주었던 그 화사한 정원이었다.
어쩐지 평범한 꽃잎이 아니라, 금가루가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에 날린 꽃잎들이 사르르 바닥에 잔뜩 깔려 꽃길을 이루었다.
마치 벨벳처럼 깔린 꽃길을 따라가니 그 끝에 타오를 듯 빛나는 주홍빛 머리카락을 땋아 길게 늘어뜨린 미녀가 서 있었다.
금빛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마치 여신처럼 몸과 얼굴에서 환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가 웃으면서 루시엘을 맞이했다.
“어서 와.”
“……호, 혹시 당신이 피닉스인가요? 너무 아름다워요.”
루시엘이 홀린 듯 피닉스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 경이로움에 페리도트가 또롱, 또로롱 만들어졌다.
그런 루시엘을 귀엽다는 듯 내려다보던 피닉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보석 덕분에 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 이렇게 부활했지.”
“아……. 정말 부활하신 거지요? 기다렸는데.”
“그래. 고맙구나, 루시엘. 그래도 이것도 많이 앞당겨진 것이란다. 네가 준 보석에 찰랑찰랑 샘솟던 마나 덕분이지.”
피닉스가 금빛 속눈썹을 늘어뜨리면서 루시엘의 뺨을 매만졌다.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촉감에 피닉스의 눈이 휘어졌다.
“보는 것보다 더 말랑말랑 폭신하구나. 자, 루시엘. 내 부활을 도와줬으니 이제 네 소원을 들어줄 차례인데.”
“……사실 정말 빌고 싶은 소원이 있었는데 그건 해결됐어요.”
“네 시어머니의 건강 말이지?”
루시엘이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피닉스 앞에 와서 간절히 빌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것 말고 다른 소원을 빌어 봐. 내 힘은 그것 말고도 많단다.”
화르륵!
피닉스가 권태롭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끝에 불을 소환했다.
“앗, 그거 저도 할 수 있어요.”
루시엘도 이내 지팡이를 꺼내서는 커다란 불을 소환해 냈다.
“음…… 불 속성 마법을 할 줄 안다니 놀랍구나. 하지만 난 더 강력한 불 마법도 가능해. 여길 불바다로 만들 수도 있지. 아픈 사람도 낫게 할 수도 있고, 누군가 죽으면 내 깃털로 부활도 가능하지. 영생은 내 심장이 필요하니 그건 좀 들어주기 힘들겠구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걸 보면, 피닉스도 루시엘의 곁에 있고 싶은 듯했다.
물론 그녀의 강력한 힘을 사용할 수 있다면 루시엘에게도 더없이 좋은 일이었다.
루시엘은 눈을 초롱이며 솔직히 말했다.
“피닉스, 당신의 힘을 빌리고 싶어요.”
“그걸 다른 말로 이렇게 부르지. 권속. 네가 나를 거느리게 된다는 뜻이란다. 그리하면 언제든 네가 원할 때 나의 힘을 빌릴 수 있어.”
루시엘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더 강해지라고. 더 강한 힘을 얻으라고 말이다.
“좋아요. 피닉스, 제 권속이 되어 주세요. 그게 저의 소원이에요.”
“좋아, 권속의 계약을 시작해 볼까.”
피닉스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면서 제자리에서 춤을 추듯 핑그르르 돌았다.
그녀의 발밑으로 금빛의 마법진이 반짝이며 생성되었다.
그러곤 루시엘과 손을 마주 대었다.
뜨거운 불의 감각이 루시엘의 마나와 맞닿아 이어졌다.
파아아!
순식간에 빛이 퍼지며, 피닉스가 물었다.
“네 물건 중 불의 성질을 가진 것이 있니?”
“음…… 제 지팡이에 세공한 루비에 불의 힘이 들어 있어요. 하지만 다른 원소들의 힘도 같이 있어요.”
“그래? 상관없어. 그럼 네 지팡이에 박힌 루비에 깃들어도 될까?”
“나중에 못 바꾸는 거예요?”
“그건 아니야. 임시로 들어가 있을 거니까.”
“그러면 일단 루비로.”
피닉스는 루시엘의 대답에 끄덕이며 손을 뻗었다. 그녀가 뿜어낸 금색 빛줄기가 사방으로 튀면서 곧 지팡이에 세공된 루비 속으로 스르륵 들어가 버렸다.
“어때?”
지팡이를 똑같이 잡고 있었는데, 피닉스가 깃들자 따뜻한 기운이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불의 힘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강력한 원소의 힘을 느껴 보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만 마나를 모아도 엄청난 불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듯했다.
루시엘은 놀라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엄청나게 강한 불의 힘이 느껴져요.”
“이제 네 것이야, 루시엘. 난 항상 곁에 있을 테니 언제든 날 부르면 된단다.”
“네, 잘 부탁해요. 피닉스.”
루시엘이 대답을 마치고 온실 정원을 나갔다. 어느새 뒤를 돌아보니, 평소의 온실로 돌아와 있었다.
길리아트와 함께 있던 이벨린이 입구로 나온 루시엘에게 물었다.
“루시엘, 피닉스를 만났니?”
“네, 제 권속이 되어서 지팡이의 루비 속에 깃들었어요.”
“오호, 피닉스를 부활시킨 것도 놀라운데 권속으로 두었느냐? 대단하구나. 루시엘.”
길리아트는 루시엘이 신통방통하다는 얼굴이었다. 요 자그만 아이가 해내는 일들이 너무도 커다랬다.
이벨린도 제 일처럼 기뻐했다.
“우리 손주 며느리, 아주 장하구나. 피닉스를 권속으로 두었으니, 이제 너보다 화염 마법을 잘하는 인간은 없을지도 모른단다.”
“그럴까요? 믿기지 않아요.”
“자고로 돈은 많을수록, 힘은 강할수록 좋은 법 아니겠니. 후후. 장차 벨슈타인을 이끌어 가려면 명심하렴.”
이벨린이 나긋하게 말하며 루시엘의 보드라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 말씀, 명심할게요.”
루시엘이 보조개가 패는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벨슈타인을 이끌어 가라는 말에는 살짝 마음이 이상해졌다.
‘장차 벨슈타인을 이끌 사람은 제가 아니게 될 거예요, 할머니.’
8년 후에는 키제프와 약속한 계약 기간이 모두 끝나고 부부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래도 벨슈타인과 가족으로 계속 남을 수는 있…… 겠지?
‘우리 루시엘, 우리 아가.’
‘루시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루시엘, 그냥 아빠 딸 할까?’
‘우리 손주 며늘아기가 최고지.’
‘뉴나랑 잘래.’
벨슈타인의 모두가 루시엘을 진심으로 가족으로 사랑하고 아껴 주었고, 자신 역시 그러했다.
이 믿음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가족과 남녀 사이는 엄연히 다르다고 들었다.
믿는다고 믿어지는 것도, 영원히 가리라는 보장도 없다.
지금은 키제프도 자신에게 상냥하게 굴지만,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마음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것 하나만큼은 빌고 싶다.
‘벨슈타인의 모두가 지금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
“제발…….”
루시엘은 저도 모르게 간절함을 담아 중얼거렸다.
“루시엘, 무슨 고민이라도 있느냐?”
할아버지의 물음에 루시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가 맑게 웃었다.
“가족들 모두 이대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뜬금없구나, 루시엘. 우리가 함께 있는데 행복한 건 당연한 일이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그러하냐?”
루시엘이 선선히 고개를 주억이자, 이벨린이 다가왔다.
“이 할미가 보기에는 루시엘은 아직도 한참 힘을 키울 것 같으니, 지금은 걱정 대신 기대를 하렴.”
“그래, 할머니 말씀이 백번 옳다. 루시엘에게도 고민을 대신 해 주는 인형이 필요하겠군. 자, 오랜만에 할아버지 품에 와라. 이제 더 크면 안아 주지도 못해요.”
“더 커져도 안아 주세요, 할아버지.”
“허허, 알았다. 녀석.”
커다랗고 따뜻한 할아버지의 품으로 루시엘이 강아지처럼 폭 안겼다.
“우리 루시엘은 여기서 더 자라도 마냥 작을 것 같아 걱정이지. 오늘은 날이 제법 화창하니 야외 정원에서 식사하는 것도 좋겠어요. 어때요, 여보?”
이벨린의 한마디에 길리아트가 루시엘을 왼팔에 안은 채, 끄덕였다.
“간만에 가족끼리 야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겠군. 이런 걸 뭐라고 하던가……?”
“글쎄요, 마실인가?”
뭉게구름 하나만 유유히 떠 가는 새파란 가을 하늘을 보자, 루시엘은 문득 생각이 났다.
“피크닉은요, 할머니?”
“오, 그래. 가을 피크닉이 딱이구나. 호수에 배도 띄우고, 맛있는 것도 먹자꾸나.”
“우와, 너무 좋아요!”
“잠깐, 이러고 있을 틈이 없구나. 피크닉 준비를 어서 해야……!”
이벨린이 먼저 분주하게 걸음을 옮기며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