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뭐야. 시클라인 레니트, 그동안 안 보이더니 배합 레시피를 감추려고 밤에만 몰래 연구한 거였나? 잘됐군. 아무도 없는 지금이야말로 빼앗을 기회겠어.’
연구실의 문 틈새로 내부를 살펴보던 피터가 음흉하게 웃었다. 연구실은 기숙사나 관리실과는 따로 떨어져 있으니, 사람이 없는 이 시간에는 작은 소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누군가 그녀를 도우러 오지 못할 터였다.
피터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클라인은 마침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다.
‘손 안 대고 코 풀겠군.’
그녀의 책상에는 레시피와 함께 여러 가지 약초들이 늘어져 있었다. 즙을 낸 다음 가열한 듯 보였다.
시클라인은 완전히 곯아떨어져 있는 채였다.
피터는 레시피를 얼른 옮겨 적은 다음, 연구실을 다시 조용히 빠져나갔다.
시클라인은 피터가 나가는 기척을 느끼고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어떤 약으로 응시하는지 최종 제출하는 건 오늘까지. 내일이면 바로 실기였다.
‘피터는 욕심이 많고 치밀해. 아마 배합법을 얻었다는 걸 남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할 거야.’
그러니 연구실에 나오지 않을 터였다. 방에도 룸메이트가 있어서 연구를 더 진행해 보지 않을 테고. 더욱이 시간이 부족한 상황. 대체 불가능한 약인 만큼 미완성 레시피라도 쓰려고 할 터였다.
그 조합법이 가짜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실기를 치를 거라는 이야기였다.
시클라인은 이미 약의 효과를 확인했다. 아가 마님이 알려 준 훈증이라는 방법을 통해 약초를 개발한 결과, 이번에는 마나 영양제의 효능이 제대로 나타났다.
‘이제 가뿐한 마음으로 실기만 기다리면 되겠어.’
시클라인은 루시엘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미소 지었다.
* * *
7. 피터 린킨스 – <여신의 마나 샘 : 마나 회복 및 증대에 강력한 효능>
34. 시클라인 레니트 - <마나 영양제 : 마나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만들어 주고 마나량 증가에 효능>
약제사 시험 내부 감독관은 비슷하게 마나에 효과가 있는 약을 제출한 두 명의 응시자 이름을 보다가 한 장은 슥 챙겨 두었다.
최근까지 시클라인 레니트는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았지만, 피터 린킨스는 뛰어난 약제사 집안답게 이미 여러 가지 약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번 실기 시험 통과자는 보나 마나 피터 린킨스, 이자겠군.’
그는 이미 하만 자작에게 가장 먼저 마나 영양제를 개발한 인재에 대한 정보를 주고 거금을 받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감독관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만 자작인 팔로스에게 달려갔고, 이 소식은 황자 레이놀드에게까지 곧장 전해졌다.
레이놀드의 탁한 자안이 가늘어졌다.
“확실한 것이지요?”
“물론입니다, 황자 전하.”
“좋습니다. 그자를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당장.”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일 실기를 치르고 합격한 후에 데려오시는 것이 순서가 맞지 않을는지.”
“지금 먼저 점찍어 두어야 합니다. 그런 효능을 가진 약을 개발한 인재가 널리 알려지면, 여기저기서 데려가려고 할 겁니다. 그리되면 내 밑에 두기 어려워질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괜히 인재를 빼돌렸다고 말이 나올까 무섭습니다, 전하.”
팔로스가 황자의 심기를 건드릴까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나는 이 나라의 황자고, 장차 황위를 이을 겁니다. 그리 입을 놀리는 것들은 기억해 두어야지요. 그리고 이건 피터 린킨스만을 따로 불러 내정만 해 둘 것이니 모두가 알게 되는 건 합격자 발표 후가 되겠군요.”
“전하의 말씀이 과연 지당하십니다.”
레이놀드가 비릿하게 웃자 팔로스도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아, 그리고 적당한 스승을 몇 골라 두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거 좋지요.”
그때였다. 황자궁 밖에 있던 시종이 달려와 고했다.
“황자 전하, 황후 폐하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그 여자가?”
레이놀드가 미간을 찌푸렸고 황자는 갑작스러우니 시종에게 잠시 기다리라 답했다. 팔로스도 얼른 황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물러가려고 할 때였다.
“하만 자작, 가지 말고 함께 이야기하지. 가르솔 후작에게 자네가 황자의 스승을 구했다는 소식을 접했네.”
웃어른으로서 먼저 들어온 황후가 팔로스에게 그리 말한 다음, 퍽 자애로운 미소로 레이놀드를 바라보았다.
“황자, 그간 내 신경을 쓰지 못해 미안하군요. 황자의 스승들은 나도 같이 면접을 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다고 결론 내렸어요.”
“예? 제 스승입니다. 제가 보고 결정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황후 폐하께서는 다른 일로 바쁘신 줄 압니다만.”
‘제발 내 일에 신경 끄시지.’
레이놀드가 그리 선을 그었지만 황후도 물러나지 않았다.
“아닙니다. 요즘 클로디아 황녀가 여러 부분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요. 황자도 그걸 신경 쓸 때가 되지 않았나 싶군요. 그리고 스승을 같이 보라는 건 나만의 결정이 아니에요.”
황후가 그리 말을 마칠 무렵, 노이슈반 황제가 황자궁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레이놀드. 요즘 너에 대한 소문이 날로 무성해지더구나.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일과를 듣자꾸나.”
“……폐, 폐하. 왜 갑자기…….”
“어허, 갑자기라니. 아비가 아들의 교육이 어찌 돌아가는지 궁금한 건 당연하지 않느냐. 스승 없이 독학한 지 꽤 오래되었으니, 그 실력을 한번 점검해 보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
차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꾹 다문 레이놀드를 보며, 황제가 말했다.
“클로디아는 스스로 먼저 시험을 자청하였으니, 이번 기회에 레이놀드도 함께 그 실력을 가늠해 보는 것이 좋겠다.”
“…….”
‘이게 다 클로디아 때문이었군, 망할……!’
레이놀드가 이를 꽉 물며 낯을 잿빛으로 물들이고 말았다.
* * *
황도의 타운하우스에서 공작성으로 급하게 돌아온 지도 어느새 두 달이란 시간이 훌쩍 흘렀다.
루시엘은 하나둘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면서 메이플 차와 함께 쿠키를 먹었다.
메이플 쿠키만 보면 류프델이 생각나곤 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 끝에 찾아온 제르다와 비밀 유지 계약을 재차 맺고 류프델과 만나게 해 주기로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하지만 제르다는 아직 클로디아 황녀의 곰 인형을 만드는 중이었다. 당장 루시엘과 함께 일을 도모하기에는 어려웠다.
‘아차, 쿠키 먹기 전에 그것부터 먹어야 하는데…….’
루시엘은 보름 전부터 시클라인이 매일 정성스레 만들어 주는 마나 영양제를 꾸준히 마시는 중이었다.
솔리아페를 비롯해 가족들에게도 권하는 중인데, 맛이 조금 아니 많이 없어서 특히 레오니는 질색을 하고 도망갔다.
‘아가 마님, 저, 저 약제사 시험에 합격했어요! 마나 영양제의 효능은 인정받았으니, 앞으로 안정성까지 통과되면 황실과 약제사 협회의 특허까지 모두 받을 수 있다고 해요.’
시클라인의 약제사 합격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그녀가 루시엘의 아기 영지에 차린 약제원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수많은 스카웃 제의를 거절하고 벨슈타인 공작성의 약제사가 되는 걸 선택했다.
이브나크에는 문을 닫았던 유리 공방이 하나둘 다시 문을 열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최근 황후 폐하께서 직접 하멜 공방에 방문해 공예품들을 구입해 가신 이후론,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듯 보였다.
도리어 막스 쪽에서 지금은 주문이 너무 밀려드니, 황후 폐하를 위한 작품은 차후에 제대로 신경 써서 만들자고 할 정도였다.
“다들 너무 잘됐어.”
루시엘이 배시시 맑게 웃었다.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았지만, 중간 결산을 해도 좋을 정도로 잘되어 가고 있었다.
클로디아 황녀의 말로는 레이놀드 황자는 기본적인 평가 시험에서도 부족한 실력을 보였고, 아마도 아카데미행이 확정될 듯 보였다.
‘아예 수도원에 보내 버리는 게 깔끔한데. 어쩔 수 없지.’
적어도 아카데미 내에서는 큰 사고를 일으키지 못할 테니까.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인 걸까.
또한 그사이 발루크 후작가의 일에도 변화가 생긴 참이었다.
‘검은 날개의 추적망을 벗어나다니. 그야말로 유령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더군.’
공작의 명령으로 자르가와 검은 날개 기사단이 여러 번 발루크 후작 부인의 행적을 조사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했다.
발루크 후작 부인에 이어, 그녀가 데려간 페넬로페마저도 행방이 묘연해졌다.
페넬로페가 지내고 있던 발루크 후작저는 어느 날 갑자기 텅 비어 버렸고, 위치를 나타내 주던 다이아몬드 브로치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했다.
불안해하는 루시엘에게 공작과 길리아트가 안심시켜 주었다.
‘널 건드리진 못할 거다. 내가 옆에 있으마.’
‘이 할애비도 있다. 아마 숨는 이유가 있겠지. 너무 걱정 말아라, 루시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은 반드시 지켜 줄게.’
키제프도 그리 다짐하듯 말했다. 가족들 덕분에 루시엘은 불안감을 조금 지웠다.
어차피 걱정만 하고 있어 봤자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 시간에 다음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게 맞았다.
그 일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계획했던 많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걸 지켜보자니 기쁘기도 하고, 뿌듯함이 차올랐다.
그럼에도 아직 해야 할 일은 수없이 많았다.
머릿속이 수많은 일로 복잡해지면서도 동시에 명확해졌다.
‘이만큼 달려왔지만, 다시 더 많은 길을 달려가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야.’
아직 다 알아내지 못한 보석의 힘도, 만나지 못한 사람도 있겠지. 꼭 해야만 하는 일들도.
루시엘은 마나 방울을 소환해 톡 터트렸다.
자신의 마법도 성장이 한참 남았다는 걸 루시엘은 알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직 힘을 더 키워야만 해. 더 치밀하게, 더 영리하고 더 강하게.’
그래서 최종에는 벨슈타인의 검은 장벽을 보강하고, 카빌 가문과 레이놀드 황자, 발루크까지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멈추지 마. 계속.”
벨슈타인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 나아갈 날들이 아득하면서도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루시엘의 자그만 심장이 쿵쿵 울리면서 파아아, 한결 안정적으로 모아진 마나가 커다란 핑크색 다이아몬드를 만들었다.
갈수록 커지는 보석의 크기에 루시엘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이 힘은 절대 감출 수 없어. 점점 강해지고 있어.’
보석을 바라보던 루시엘의 귓가에 곧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엘. 날 완전히 잊은 건 아니겠지? 이제 때가 된 것 같구나. 어서 와서 나에게 마나를 나누어 주렴. 보석을 줘도 좋고.
그 상냥한 목소리에 루시엘은 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피닉스가 부활하기를 그녀가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이제야 부르다니.
총총총.
루시엘은 급하게 온실 정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