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58)화 (158/282)

<158화>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고민을 해 보겠습니다. 지금 황녀님과 진행하는 일정만으로도 너무 벅찹니다.”

“좋아요. 오늘은 돌아갈게요. 조금 더 고민해 보시고, 벨슈타인가로 연락 주세요.”

제르다의 대답을 들은 루시엘은 오히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보통은 흔쾌히 수락했을 텐데. 보석이 탐이 나서라도 말이야.’

그랬더라면 자신 쪽에서 그에게 실망하고 도리어 마음을 바꾸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를 믿게 된 건 과거 제국신문에서 읽은 기사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거리의 인형사 제xx 씨.

아이들을 위해 최고급의 마법 인형을 제작하다가 수억 틸링 빚더미에 앉아 파산.

가게 수익금도 고아원에 기부.

“값비싼 마정석 때문에 운영할수록 적자였지만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니 관둘 수 없었습니다.”」

돈이나 보석을 욕심내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위해 파산하면서까지 마법 장난감을 만들지 않았을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무엇보다 루시엘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발루크 후작 부인은 가짜 얼굴로 자신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자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도 나의 분신을 만들어 두어야겠어.’

그 꿈과 같은 계획을 실현시키려면 난쟁이 류프델의 솜씨와 제르다의 마법 인형을 만드는 재능이 필요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마법으로도 분신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그건 지속 시간이 길지 않다고 들었다.

잠깐 눈속임 정도가 아니라 모두가 루시엘이라고 깜빡 속을 정도로 살아 움직이는 인형이 필요했다.

‘가짜 루시엘이 나 대신에 많은 걸 해줄 거야.’

자신을 노리는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미끼로 쓸 수 있을 터였다.

루시엘은 그런 생각을 접으며 클로디아와 함께 다시 마차에 올랐다. 검은 날개도 호위 행렬에 동참했기에 키제프는 그들이 가져온 공작가의 흑마에 직접 올라타며 말했다.

“나는 밖에서 호위할게, 루시엘. 안에서 황녀님이랑 이야기 나누도록 해.”

“으응, 고마워.”

클로디아와 편히 이야기하라는 배려인 듯했다.

말에 훌쩍 올라탄 키제프는 제 나이로 보이지 않을 만큼 의젓해 보였다.

‘꼭 기사님 같아!’

루시엘이 마차의 창문을 통해 바라보자 키제프가 물었다.

“……루시엘, 왜?”

“그냥. 멋있어서 봤어.”

루시엘이 눈을 곱게 휘며 말했다.

루시엘이 사르르 웃어 주면서 칭찬까지 하니, 키제프는 정신이 혼미해질 것 같았다.

“……그, 그런 말을 이런 데서 하면.”

호위 기사들도 귀여우시다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계속 봤다가는 키제프의 얼굴이 화르륵 불탈 지경이라, 루시엘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옆에 앉은 클로디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일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종이가 빽빽한 걸 보니 아주 바빠 보였다. 전담 시녀가 챙겨 줄 텐데도 꼼꼼히 확인하느라 열심이었다.

“황녀님, 무척 바빠 보이시네요.”

“네, 듣고 있는 수업이 많아졌고 덕분에 관심 분야도 넓어지고 있어요. 하지만 공자비에 비하면 난 바쁜 것도 아닐걸요? 아 참, 제국신문에 황실 측의 발표로 루시엘의 기사가 짧게 나갈 거예요.”

루시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벨슈타인 공작이 쓸데없는 기사나 소문을 내는 자들에게는 각오하라는 선전포고를 해 둔 터라, 쉬이 기사를 쓰는 자는 없었다.

“저보다는 유리공예가 주목받았으면 좋겠어요.”

“걱정 마세요. 어머니께서 유리공예가 무척 마음에 드신 모양이에요. 곧 해당 공방에 추가로 의뢰를 하시려나 봐요. 그 일로 아마 나중에 부르실지 몰라요.”

그 말에 루시엘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인가요? 막스 씨가 기뻐할 거예요.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어디서 그런 인재를 알게 된 거지요?”

“어쩌다 보니요.”

루시엘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너무 제 일에만 기뻐한 듯해서 루시엘은 클로디아의 일도 물었다.

“황녀님의 일도 잘되어 가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전부 루시엘 덕분이에요. 많은 것들이 달라졌어요. 가장 많이 바뀐 것은 바로 나고요.”

클로디아가 환히 웃으며 말하자, 루시엘은 조심스레 그녀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다.

“어떻게 달라지셨는데요?”

“이 나라에 내가 미치는 영향이 아주 적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곧 결혼해서 이 나라를 떠날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노력하면 얻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어요. 내가 여자라고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도 만들어 보려고요.”

그리 말하는 클로디아는 정말 깨달은 것이 많아 보였다.

클로디아의 말에 루시엘도 깊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를 뒷받침해 줄 힘이 되어 주리라, 다짐하며.

“그 뒤에 벨슈타인이 있을 거예요. 저도 황녀님을 도울게요. 황녀님은 그 기회를 손에 거머쥐시게 될 테니까요.”

루시엘은 클로디아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다는 걸 확실히 알았다.

“그러기 위해선…… 싸우게 되실 거예요.”

레이놀드 황자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클로디아도 눈치챘다.

“알고 있어요. 레이놀드는 그 자리가 확실히 제 것이라고 여기면서 방만하게 지내고 있어요.”

“……어떻길래요?”

“제대로 된 수업도 받지 않고, 종일 사냥만 하고 있다더군요.”

“황제 폐하께서는 그 사실을 아시나요?”

“아마도요. 아버지는 워낙 레이놀드를 후하게 평가하시니까. 메이너드에 유학을 갔을 때도 놀러 다니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솔직히 그 자리가 욕심난다기보다는 걱정이 더 커요.”

“잘된 일이에요. 그럴수록 황녀님께서 더 열심히 하신다면 확실하게 비교가 되겠어요.”

곰곰이 생각하던 루시엘이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계시다고 하셨죠.”

“네. 레이놀드의 스승을 구하라고 하셨으니까요.”

“황녀님의 스승님들께 시험을 자청해 보세요. 그 평가는 폐하께 보고될 거예요. 그러면 황제 폐하께서도 황자님의 실력이 자연스럽게 궁금해지시겠죠?”

“음, 좋아요. 시험은 자신 있으니까. 그런데 레이놀드의 자질이 부족함을 밝힌 뒤엔 어떻게 하죠?”

“음…… 최종적으로는 외부와 차단된 신전의 학술원이나 폴리체 아카데미에 보내 버리는 결말이 좋겠어요.”

그리하면 황자라는 신분보다는 학생 신분이 우선시 된다. 특히 신전의 학술원은 철저하게 폐쇄적인 교육기관이라고 들었기에, 아카데미보다 더 자유가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아카데미는 몰라도 신전의 학술원에 보내려면 꼬투리 잡을 만한 문제가 필요하긴 했다.

“……정말 좋은 생각이긴 하군요! 하지만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신전의 학술원까진 무리일 거예요.”

“그렇겠지요. 그건 같이 고민해 봐요.”

클로디아는 루시엘이 내민 손을 잡으면서, 자그만 아이의 치밀함을 면면이 알게 되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신전의 학술원은 인성에 큰 문제가 있거나, 사고 친 황족들이 죄를 뉘우치라고 유폐시키는 곳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거기 들어가면 문제아 낙인이 찍히는 것이니 황위와는 멀어진다고 봐야겠지.’

“루, 루시엘. 우리 무덤 끝까지 같은 편인 거죠? 친하게 지내도록 해요.”

“응? 물론이지요.”

루시엘이 해맑게 웃어 보였다.

‘벨슈타인도 벨슈타인이지만, 루시엘과는 적으로 지내면 절대로 안 돼…….’

그리 다짐하는 클로디아였다.

* * *

제르다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장난감 재료들을 손으로 쓱 치웠다. 그는 곧 식탁 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고는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면서 오후에 다녀간 벨슈타인 공자비의 제안을 떠올렸다.

‘저랑 같이 일해 보실 생각 없으세요? 제르다 씨의 인형을 만드는 재능이 필요해요. 제가 드리는 마정석이 있으면, 황녀님의 의뢰는 금방 끝내게 되실 거예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돌아간 열 살짜리 소녀의 눈동자에는 성인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담겨 있었다.

제르다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 애는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게 틀림없어.’

장난감 상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많이 보아 온 그는 처음 보는 아이일지라도 눈동자를 보면 그 속마음을 빤히 알 수 있었다.

대개 이곳을 들르는 아이들의 호기심은 신기한 장난감에 머물렀지, 그 장난감을 만드는 사람인 제게 머무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에게 관심을 가진 듯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형을 만드는 자신의 재능에 관심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성인 이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 보였으니까.

자신의 손길도 꼼꼼히 보았고, 인형이 제작되는 과정의 일부까지 보고 갔다.

이건 마치…….

‘고용인이나 함께 일하는 동업자를 살피는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클로디아 황녀에게 ‘고민하는 곰 인형’을 이용해 우울증 치료사 양성 사업을 제안한 것도 어린 공자비였다고 들었다.

세간의 소문에는 어두운 그였지만, 벨슈타인 가문의 아이들이 천재라는 것쯤은 알았다. 하지만 저 애는 천재라기보다는 머리 꼭대기에 올라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샌드위치 하나를 뚝딱 해치운 제르다가 공방의 창고를 살폈다. 여분의 마정석이 몇 개 남지 않았지만, 두 개를 꺼내 들었다.

하나는 장난감 상점의 마법 벽난로에 넣어 두었고, 하나는 제작을 위해 공방에 놔두었다. 벽난로를 통해서 장난감들에게 마나를 전해 주어야 그들은 더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마정석이 얼마 없지만 아낄 수는 없어.”

값비싼 장난감들을 팔고 있다고는 해도, 사실 그의 손에 쥐는 돈은 많지 않았다.

인형들을 제작하는 데 필요한 재료들은 언제나 최상급을 썼고, 마정석의 가격 하나가 자그마치 가게의 열흘 수입과 맞먹을 만큼 어마어마했으니까.

마정석을 구매하기 위해 가게를 나서는데 한 소년이 신문을 휙 던져 놓고 가 버렸다.

“얘야. 나는 신문 안 보는데…….”

별수 없이 신문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그의 눈에 단연 가장 커다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벨슈타인 공작가의 어린 공자비가 선보인 이브나크 유리공예의 아름다움. 스테인드글라스!」

“나 엄청 특별한 아이를 만난 것 같은데…….”

제르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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