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오후에는 다나와 마샤가 타운하우스에 방문하기로 했다.
루시엘의 친구들이 집에 찾아오는 건 처음이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들뜨고 설레는 건 사실이었다.
공작과 엘링턴은 사업 미팅을 나갔고, 솔리아페도 라리에트와 함께 사교 모임에 나가 어른들까지 없으니 묘한 해방감까지 있었다.
“집사장님, 곧 제 친구들이 오기로 했는데 가벼운 티타임을 했으면 좋겠어요.”
루시엘이 볼을 발갛게 물들이며 던컨 집사장에게 살짝 말했다.
“아가 마님의 첫 손님맞이 다과로군요. 주방장에게 티타임을 제대로 준비하라고 일러두겠습니다.”
“앗,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에요.”
“소소하게 즐기실 수 있게 신경 쓰겠습니다. 걱정하지 말고 쉬고 계십시오.”
“네.”
던컨 집사장이 가볍게 미소 지으며 루시엘을 소파로 안내했다. 그는 정중함과 배려심이 몸에 깊게 밴 사람이었다.
그때 로즈가 층계를 내려오며 말했다.
“아가 마님. 친구분들이 오시니 옷은 갈아입으실래요?”
“아…… 응.”
루시엘은 로즈를 따라서 전용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침실보다도 더 큰 드레스룸은 고급스러운 민트색 가구들로 꾸며져 있었다.
‘여자아이 물건은 예쁘고 아기자기한 것이 너무 많단 말이지.’
솔리아페가 시내에 나갔다 올 때면 루시엘의 물건을 마차 가득히 사 오는 바람에 그녀보다도 더 넓은 곳을 차지하게 되고 말았다.
그녀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아서 루시엘은 그저 감사하단 말을 했다.
보통 여자애였다면 버릇이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루시엘은 옷장을 열어 둔 채 무얼 고를까 고민했다. 친구들이 놀러 온다고 하니 왠지 조금 더 신경 써야 할 것 같았다.
로즈가 눈치 빠르게도 드레스를 착착 고르며 말했다.
“꾸민 듯 안 꾸민 싱그러운 녹색 체크 드레스랑 우아함을 살려 줄 러플이 달린 베이지색 드레스. 어떠세요?”
“녹색 체크가 귀여워.”
“그걸 입은 아가 마님이야말로 더 귀여우시죠.”
드레스 위로 하얀 에이프런을 두르고, 머리를 옆으로 땋아 내렸다. 그 위에 큼지막한 진주가 달린 머리끈으로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검은색 리본도 카라 부분에 달았다.
루시엘이 평소에 매던 분홍 가방을 메자, 로즈가 다른 상자에 있는 가방을 꺼내 왔다.
“잠깐만 계셔 보세요. 오늘은 갈색 가죽 가방이 더 어울리겠는걸요.”
“고마워.”
“마님께서 수제 가죽 가게에서 맞춰 오신 거래요.”
자세히 보니 루시엘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고, 가죽 냄새도 좋았다.
단장을 마칠 무렵, 타운하우스에 마랑드 후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루시엘은 밝게 웃으면서 친구들을 맞이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다나, 마샤.”
“루시엘, 공작성도 근사하지만 타운하우스도 그림 같은 대저택이네요!”
다나가 눈을 반짝였고, 마샤는 수줍게 데이지꽃 한 다발을 내밀었다.
“……루시엘, 영상구를 통해서 발표 잘 봤어요. 너무 멋졌어요!”
평소에 말이 많지 않던 마샤가 루시엘을 동경 어린 눈으로 보면서 칭찬했다.
“고마워요, 마샤.”
“루시엘, 지금 난리가 났어요.”
“왜요?”
“왜긴요, 루시엘이 문학 살롱에서 보여 준 멋진 모습 때문이죠. 지금 소녀들이 다들 마샤 같은 상태라고요. 루시엘에게 푹 빠졌어요.”
마샤가 자랑스럽게 말했지만 루시엘은 그저 머쓱해했다.
“놀리지 말아요. 얼른 안으로 들어와요. 같이 차 마셔요.”
“그 전에 집 구경부터 시켜 줘요!”
세 사람은 다람쥐처럼 쪼르르 같이 다니면서 집구경도 하고, 루시엘의 화장대와 옷장을 점령하며 웃고 떠들었다.
“아가 마님, 다과가 준비되었습니다.”
5단 크리스털 트레이에 준비된 애프터 눈 티 세트를 본 루시엘과 친구들도 황홀하게 중얼거렸다.
“우와, 너무 예뻐요.”
크랜베리 스콘부터 시작해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메뉴가 화려해졌다.
생딸기를 넣은 마카롱, 망고슈, 파인애플 타르트, 커스터드 푸딩과 복숭아 시럽이 들어간 젤리까지. 가장 상단에는 분홍색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달콤하고 진하게 우려낸 밀크티가 투명한 크리스털 포트에 담겨 나왔다.
“루시엘은 설마 매일 이렇게 먹나요?”
“그럴 리가요. 흑, 이거 너무 맛있어요.”
달콤한 타르트를 한 입 먹으면서 루시엘은 힐링을 만끽했다. 공작의 바람대로 아무 생각 없이 아이처럼 실컷 놀았던 것 같았다.
“루시엘,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또 만나요.”
“응, 잘 가요.”
다나와 마샤가 마차가 떠나는 걸 보면서 손을 흔들어 주고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다각다각.
가문의 휘장이나 황도의 일반 마차 표시도 없는 낯선 마차 하나가 타운하우스 앞으로 멈췄다. 그 뒤로 말을 타고 따르는 호위 기사까지 있었다.
마차는 멈췄지만 안에서는 아직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누구…… 지? 지금은 집에 어른이 안 계시는데…….”
루시엘은 아직 안주인이 아니니 다른 손님을 맞이하기가 곤란했다.
그보다 아무 예고도 없이 이렇게 불쑥 손님이 오실 줄은 더더욱 몰랐다.
그때 던컨 집사장도 낯선 마차가 도착한 걸 보고는 냉큼 밖으로 나왔다.
“아가 마님.”
곧이어 창문이 열리더니 루시엘의 방에서 자다 일어난 키제프도 풀쩍 뛰어내렸다.
타닷.
“루시엘……. 누가 왔어?”
“앗…… 으응. 키제프.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어떡해?”
“이 층 정도는 문제없어. ……누가 온다고 했던가?”
키제프의 시선이 수상한 마차로 다시금 향하면서 던컨에게 물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도련님.”
“확인을 부탁해.”
“예.”
아무리 타운하우스라도 가주가 없을 때는 차기 가주가 주인 역할을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실례합니다만 가문과 성함을 밝혀 주십시오.”
던컨이 조심스레 마차 문에 노크하자, 곧이어 문이 열리더니 로브를 푹 뒤집어쓴 클로디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 미안해요. 전 루시엘 공자비의 친구예요.”
“앗…… 황녀님?!”
“루시엘, 쉿. 황녀 신분으로 다니려면 절차가 좀 복잡해서. 몰래 나왔어요. 얼른 마차에 타요. 제르다 상점으로 갈 거예요. 논의할 건이 있거든요.”
클로디아가 발랄하게 말했다. 루시엘이 놀라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도 만나기로 했다는 걸 떠올렸다.
“소식이 없어서 못 오시는 줄 알았는데……. 친구들은 이미 다녀갔거든요.”
“음…… 사실 그 친구들 보내고 오려고 한 거예요. 아무튼 어서 타요, 공자비.”
클로디아의 말에 루시엘이 키제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키제프, 나 다녀올게. 저 다녀올게요, 던컨 집사장님.”
“예, 주인님과 마님께서 돌아오시면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시엘이 클로디아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자, 키제프도 망설임 없이 마차에 오르며 클로디아에게 말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목적지는 어딥니까?”
“어머, 공자도요? 아, 제르다의 마법 장난감 상점이에요.”
그녀의 말을 들은 키제프가 던컨에게 명령했다.
“그쪽으로 호위를 꾸려서 보내 주도록. 적어도 둘 이상으로.”
“예, 도련님.”
루시엘과 단란한 데이트를 생각한 클로디아는 마차 안에서 나란히 앉은 어린 부부를 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루시엘은 든든한 남편이 있어 좋겠어요.”
클로디아 황녀와는 차후의 일을 논의하기로 했기에 루시엘도 따로 보고 싶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그녀가 키제프 앞이라 일 이야기를 하기 조심스러워하는 것을 눈치챘다.
“황녀님, 키제프도 다 알고 있으니 편하게 이야기하셔도 좋아요.”
“음, 그렇군요. 알겠어요. 공자의 새로운 면모를 많이 보게 되네요.”
클로디아가 웃으며 말했지만 키제프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
루시엘을 혼자 보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난번 레이놀드 황자와의 일과 발루크 후작 부인 일도 있었고.
클로디아 황녀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가장 안심이 되는 사람은 벨슈타인 가문 사람뿐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같이 와 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깼지?”
루시엘이 소곤거리며 묻자 귀가 간지러웠다. 키제프는 슬쩍 볼이 붉어져선 말했다.
“널 혼자 보낼 리 없잖아. ……푹 잤어. 침대가 너무 푹신해서.”
사실 그것보다는 방 안 가득히 묻어 있는 루시엘의 내음이 몹시 포근하고 편안해서 금방 자 버렸던 것 같았다.
잠자리가 바뀌면 잘 못 자는 예민한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디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어머, 잠깐만요. 두 사람 같은 침대 쓴 거예요?”
“……네에? 아니에요! 키제프가 잠깐 피곤해서 제 침대에서 잠들었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붕붕 저으면서 황급히 발뺌했고, 키제프는 차갑게 대꾸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부부잖습니까.”
그러면서도 그의 귀는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 * *
달력을 넘겨 보던 시클라인은 우울하게 말했다.
“이제 모레면 실기 시험인데…….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야.”
기숙사 방을 옮기고 나서부터는 연구실이 아닌 방 안에서 혼자 약을 배합 중이었지만 여전히 해답은 풀리지 않았다.
시간만 째깍째깍 흘러가고, 마음은 타들어만 갔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기숙사 방문을 두드렸다.
“34번 응시자, 시클라인 레니트 맞습니까? 서신입니다.”
“……서신? 올 곳이 없는데.”
시클라인은 그를 경계했다가 이내 혹시 루시엘인가 싶어, 얼른 문을 열었다.
그리고 꾸욱 찍혀 있는 귀여운 토끼 도장을 발견했다.
“루시엘 아가 마님……?”
서둘러 서신을 열어 본 시클라인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법이었다.
불을 피워서 그 연기로 약초를 찌는 훈증이라니…….
그동안 약초학을 공부하면서 여러 방법을 다루어 보았지만 훈증은 생소했다.
“세상에, 신기한 방법이야. 이게 정말 효과가 있을까? 시간이 없는데. 그래도 가만히 있는 것보다 시도를 해 보는 게 좋겠지?”
하지만 이건 연구실로 가서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피터가 다른 응시자를 매수해서 자신을 감시하고 레시피를 뺏을 생각을 여전히 하고 있을 터였다.
“아무도 없는 심야 시간대에 가서 해야겠어. 오늘 밤에…….”
그리고 루시엘이 적어 준 당부를 다시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접근하던 사람에게 거짓으로 배합 레시피를 흘려서 따돌려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