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레이놀드는 가라앉은 얼굴로 소파에 앉아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가뜩이나 쓸데없는 행사 때문에 피로감이 누적되었는데 건방진 벨슈타인의 공자가 자존심을 살살 긁었다.
레이놀드는 분한 얼굴로 씨근덕거리면서 어제 붉은색 마차에 오르던 때를 떠올렸다.
실로 오랜만의 재회였다.
그녀에게 꼭 맞는 쓸 만한 껍데기를 찾는 건 드문 일이었으니까.
“어머니.”
“소중한 내 아드님, 어서 오세요.”
레이놀드를 안아 주며 발루크 후작 부인의 껍데기를 쓴 그녀가 말했다.
“아직도 크리스털 페어리를 찾지 못한 건 수치스러운 일이에요, 황자. 좀 더 공을 들여야겠어요. 생각해 보면 보석안은 마법 따위로 꼭꼭 감추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레이놀드가 답답한 심정으로 물었다.
발루크 상단의 상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제국 곳곳에서 암암리에 이종족 노예와 평민에 이르기까지 전부 살피고 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이제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요. 요정은 맑은 마나를 가졌다던데. 신분이 낮은 아이라면 쉬이 찾을 수 있지만 귀족일 경우는…… 추적이 까다로워요.”
“그럼 오늘 같은 연회가 기회가 되겠군요?”
“그렇지요. 역시 똑똑한 내 아드님. 마도사를 풀어 연회장에 모인 여자아이들을 모두 살펴보도록 하세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렇게 살롱 연회장 내에 있는 귀족 영애들, 특히 입양된 전적이 있는 이들을 면밀하게 살폈고, 맑고 투명한 마나를 가진 소녀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아이가 입양된 과거가 맞는지 확실히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크리스털 페어리라면 진짜 그 가문의 핏줄일 리 없을 테니까.
다만 지난번부터 계속 제 관심을 끌던 조그만 짐승 같던 아이가 떠올랐다.
벨슈타인의 공자비.
알아보니 오르비아 백작가 출신이었다. 그자가 행방불명되고 가문도 망한 듯해서 다른 정보는 찾을 수 없었지만.
문학 살롱이 파한 후, 레이놀드는 그녀의 추론대로 그 자그만 것에게 다가가 마나를 측정하는 마도구로 확인해 볼 요량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다.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상관없이.
그런데 그의 앞길을 누군가 막아선 것이다.
“황자 전하께서 무슨 일입니까.”
“공자의 아내에게 용건이 있어서.”
“제게 말씀하시죠. 대신 전달하겠습니다.”
화염처럼 붉은 핏빛 눈동자. 곱상한 얼굴과는 딴판으로 살벌한 눈빛과 기세가 제법 무시무시한 소년이었다.
그 누구도 제게 저딴 식으로 날 선 눈빛을 보내는 이는 없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피로연으로 벨슈타인에 방문했을 때도 공자는 살기 가득한 눈을 하고 있었다.
감히 이 나라의 황자에게 적대적인 기운을 내뿜다니.
하여, 레이놀드는 키제프를 훑어보며 겁이라도 주려 외딴곳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런데. 빌어먹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공자는 플라이 마법으로 자신을 허공에 매달은 다음, 도리어 저에게 경고했다.
“……그 애에게 접근하지 마.”
스스스.
그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무언가가 제 목을 옥죄었다.
‘이게 듣기만 하던 어둠의 마법?’
“끄흑…… 윽.”
압도적인 적대감과 살기에 짓눌려 숨이 막혔다가 풀렸다.
“미…… 미쳤나. 황족에게 공격 마법은 중죄다. 넌 이제 끝……!”
그러나 키제프의 붉은 눈이 낮게 굴렀다.
“마법 아닙니다. 내가 한 짓도 아니고.”
“……뭐, 뭐라고? 너밖에 없는데 네가 아니면 누가 했단 거지?”
아직도 잔뜩 졸렸던 목이 갑갑해 그 부근을 매만지며 레이놀드가 묻자, 키제프가 허공을 슥 보며 말했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겁니다.”
“건방진 자식!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지.”
분에 찬 레이놀드가 재빨리 허리춤에 있던 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슥 뒤돌아본 키제프가 말했다.
“결투 신청은 나중에 정식으로 받겠습니다, 황자 전하.”
키제프가 그리 말하자 시커먼 것이 레이놀드의 손을 묶어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는 야외에 설치된 분수대로 가서 세수를 하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시 멀어졌다.
레이놀드는 굴욕감에 괴성을 지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네 놈만은 반드시 살려 두지 않겠다!”
어머니와 힘을 합쳐 검을 완성하기만 한다면, 벨슈타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공자비든, 공작성이든 네 것은 전부 빼앗고 짓밟아 줄 것이다.’
* * *
루시엘은 식사를 마치고 두 가지 소식을 접했다.
첫 번째 소식은 공작의 통신구를 통한 길리아트로부터였다.
추적 마도구인 다이아몬드 브로치의 위치 기록이 멈춘 곳은 뜬금없게도 그동안 비워 두었던 동남부 이스턴 영지에 있는 후작저였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페넬로페가 다이아몬드 브로치를 손에서 떼지 않는다는 거였다.
덕분에 후작저 내부를 들락거리는 몇몇 고용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발루크 후작 부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같이 통신을 듣고 나서 공작이 말했다.
“아직 하루뿐이니 소득을 기대하는 건 무리지.”
“맞아요. 그래도 저택 내부를 볼 수 있으니 다행이에요. 이후 행보도 추적이 가능할 테고.”
“저택 인근에도 일부 감시 인력을 배치해 두었다.”
“발루크 상단에도 첩자를 심어 두시면 어떨까요? 발루크 후작 부인의 움직임과 목표를 더 세밀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루시엘의 제안에 공작이 턱가를 문질렀다.
“음, 좋은 생각이지만 워낙 외부인을 새로 뽑지 않아 내부로 파고들기는 꽤 어렵더구나. 매수도 쉽지 않고.”
“발루크 후작 부인이 사람들을 조종해 자신이 부리기 좋게 만들었는지도 몰라요. 그럴 힘이 충분히 있는 여자니까요.”
루시엘의 추측에 공작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로군.”
“소울이터를 위해서 누군가를 희생시키고 있을 것만 같아서, 저는 그게 제일 불안해요.”
“나도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힘써 보겠다. 들었지, 엘링턴?”
“예, 각하.”
“감사해요, 아빠.”
발루크의 음모를 파헤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그들은 검을 완성해 낼 수 없을 테니까. 나와 벨슈타인이 있는 한.’
루시엘이 속으로 되새기는 동안, 공작의 느른한 시선이 다른 쪽으로 옮겨졌다. 보고할 차례를 기다리는 갈색 머리 청년이 보였다.
“이제 엘링턴의 보고를 들어 볼까. 저 녀석, 아까부터 계속 쳐다보고 있군.”
공작이 루시엘의 보슬보슬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말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자 엘링턴이 말했다.
“아가 마님, 유리 공방 말인데요. 문학 살롱의 발표 여파로 벌써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남아 있는 이브나크의 공방 중 H 이니셜이 들어가는 세 곳 모두 의뢰 문의가 폭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중엔 하멜 공방이 가장 많고요.”
“앗, 정말이에요?”
“네. 막스 씨가 기뻐서 엉엉 울었다고 하네요.”
“근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소식을 들었어요? 통신구도, 영상구도 없을 텐데.”
“아이, 공작님께서 우리 미래의 유리공예 장인께 투자하는 마음으로 지원해 드렸습니다.”
“앗, 아빠가요?”
“갈리우스 백작이랑 반반씩 부담했지. 굳이 자신도 같이 낸다고 하더군. 그 제안도 갈리우스 백작이 청한 거였고.”
“와, 너무 잘됐어요.”
좋은 소식에 루시엘의 얼굴도 활짝 피었고 공작도 입꼬릴 올렸다.
“내가 보기에도 유리공예가 제법 훌륭하더군. 스테인드글라스라고 했던가. 나중에 나도 하나 구입하도록 하지.”
“지금 빨리 사셔야 해요. 이제는 구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르니까요.”
“……맞습니다. 이거 잘하면 황후 폐하의 탄신일을 위한 유리공예품까지 만들지 않더라도 이브나크의 유리공예가 살아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의 설레발에 루시엘도 감회가 새로웠다. 하지만 벌써 기뻐하기에는 이른 것 같은데.
“……이브나크의 유리공예가 살아날 수 있을지는 더 두고 봐야겠죠?”
루시엘이 웃으며 눈을 빛냈다. 요 자그만 아이의 머릿속이 어떻게 회전하고 있는지 가끔은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 별에서 온 건지. 복덩어리가 따로 없군.”
공작이 루시엘의 볼을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를 올려다보며 루시엘이 물었다.
“아빠, 황도에는 얼마나 더 머물게 되나요?”
“왜, 더 있고 싶으냐? 원한다면 며칠 더 머물러도 좋다. 하지만 나는 내일이라도 떠나고 싶군.”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였다가 이내 저었다.
“아뇨, 저도 해야 할 일만 마치면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요. 황도도 즐겁지만 집이 더 좋아요. 할아버지, 할머니, 레오니랑 베시, 에바도 보고 싶고요.”
“기쁜 말이군. 벨슈타인 공작성이 돌아가고 싶은 네 집이라는 뜻이니까.”
“내 집, 우리 집…….”
“……루시엘, 손 좀 볼까.”
공작이 커다란 손바닥을 펼쳤고, 루시엘이 자그만 손바닥을 마주 댔다.
그의 크고 기다란 손의 절반도 미치지 못하는 앙증맞은 크기의 단풍잎 손이 닿았다.
공작의 붉은 눈이 곱게 접혔다.
“네 손이 아빠 검지의 두 번째 마디에 닿을 때면 너도 어른이 되어 있겠지. 지금도 우리 루시엘은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다만, 너무 바쁘게 지내는군. 아이의 시간은 인생에서 짧고 어른의 시간은 아주 기니까 후회하지 않게 더 놀거라.”
“……아빠.”
루시엘이 그의 너른 품에 안겼다. 그의 말대로 아이의 시간은 짧고 어른의 시간은 너무나도 길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했다.
루시엘이 몇 번의 생을 다시 살아도 지금이 가장 행복할 거라고.
루시엘은 감동으로 만들어 낸 보석들을 마구 쏟아 냈다.
“사랑해요, 아빠!”
“……나도 사랑한다.”
사르르 녹아내릴 듯 웃고 난 그의 미간이 셔츠의 포켓에 꽂힌 펜을 확인하더니 좁혀졌다.
“이런, 펜의 녹음 기능을 꺼 뒀다. 한 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