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아흰이 하늘색 눈동자를 빛내면서 호의를 표하자 루시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카르한 공자의 소설도 너무 멋졌어요. 바이올린 연주도 열정적이라 깜짝 놀랐고요.”
루시엘이 방긋 웃어 주자 아흰의 엉덩이에서 또 꼬리가 쑥 올라왔다. 오렌지빛이 도는 갈색의 풍성한 꼬리였다. 그것이 살랑살랑 흔들리는 걸 보자니 솔직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저기요, 공자.”
“네?”
“죄송하지만 뒤에 꼬리가 나오신 것 같아서…….”
루시엘은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에게 알려 주었다. 평소엔 숨기고 다니니까 비밀인지도 몰랐다.
“우왓……. 죄, 죄송. 아니, 고맙습니다.”
얼굴이 잔뜩 빨개진 아흰이 재빨리 꼬리를 감추었지만 이내 그의 머릿속에서 뾰족한 세모꼴의 귀까지 봉긋 솟았다.
그야말로 시선 강탈.
“귀도 나왔어요.”
“……읏, 들켜 버렸네요. 다른 분들에게는 비밀로 해 주세요. 가문의 기밀이거든요.”
귀를 얼른 숨긴 아흰이 루시엘에게 조그맣게 말했다. 루시엘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사람에게도 비밀이 있구나. 나처럼.’
“그럴게요, 공자. 조심해요.”
루시엘의 말에 안도한 듯 아흰이 숨을 내쉬었다.
카르한 공작가가 수인족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 그동안 인간 가문들과 쌓아 온 신뢰가 무너질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아흰은 눈앞의 말랑말랑한 소녀에게 순수한 호감이 생겼다.
수인족은 친밀함을 느끼거나 호감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귀와 꼬리가 튀어나온다. 그동안은 한 번도 남 앞에서 그런 적이 없었는데.
이 아이에게는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특유의 맑은 기운이 있었다. 벨슈타인답지 않게.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친구가 되고 싶단 뜻인가요? 지금은 곤란해요. 남편이 신경을 많이 쓰니까. 8년 뒤부턴 가능할지도.”
루시엘이 그렇게 방긋 웃으면서 총총 걸음을 옮겼다. 그 말에 아흰이 제대로 차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친구도 곤란하다니…… 8년이라.”
루시엘은 그대로 어수선한 야외정원에서 벗어나 홀로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발루크 후작 부인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불안감은 도사리고 있다.
완벽하게 확신하고 돌아간 것 같지는 않아도 루시엘이 크리스털 페어리라는 의심은 품은 듯했다.
곧 완전히 들키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 발루크 후작 부인과 황자가 검을 완성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검을 완성하기 위해서 그녀가 열두 명의 제물을 모으고 있다면, 지금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도 몰라. 과거에는 혹시 단서가 없었을까?’
루시엘은 곰곰이 과거를 되짚어 보며 황자가 제 어머니에 대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분은 아직 내겐 살아 계신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살아 계신 것이나 다름없다…….
혹시 검이 완성되면 황비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나 과거에 열두 개의 보석을 박아 검이 완성되었어도, 황비의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그때 솔리아페가 주변을 돌아보면서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키제프는 어디 갔지?”
“아…… 아까 제가 클로디아 황녀님과 이야기 나눌 때 나가는 거 같았어요.”
루시엘이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며 키제프를 찾았다. 그러고 보니 레이놀드 황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따로 이야기를 나눌 만큼의 친분은 없을 텐데, 무슨 일일까?
그때쯤 키제프가 자리로 돌아왔다.
“키제프, 어디 다녀왔어?”
“세수하러.”
어쩐지 그의 얼굴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키제프의 핏빛 눈이 살짝 구르며 물었다.
“나 없는 동안 웬 놈이 말 걸거나 그러진 않았지?”
“어어? 무, 물론이지.”
카르한 공자가 말 걸은 걸 알려 주었다가는 다 듣지도 않고 주먹을 날릴 기세라 루시엘은 괜스레 앞장서면서 가족들에게 말했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가요.”
“그러자꾸나.”
다른 귀족들은 연회장으로 가서 파티를 더 즐길 모양이었지만, 벨슈타인 가족들은 서둘러 야외정원을 빠져나가기 위해 준비된 마차에 올랐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공작이 루시엘에게 물었다.
“루시엘, 네게 걸어 준 실드 마법이 효력을 다했더군. 혹시 루시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앗…… 알고 계셨어요? 그럼 역시 그게 꿈은 아니었네요. 발루크 후작 부인이 저에게 환상을 걸었던 것 같아요.”
“환상?”
루시엘은 꿈을 꾸었던 일과 내용에 대해서 털어놓았다. 듣고 있던 공작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솔리아페와 키제프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우리 모두가 있는 곳에서 그런 짓을 했다고?”
주먹을 쥔 공작이 으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아빠의 실드가 절 지켜 주었어요. 할머니의 마나 부적도요. 가족들과 모두 함께였고 황성이었기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을 거예요.”
루시엘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솔리아페도 말했다.
“하지만 그 여자, 정말 소름 끼치는구나.”
“어쩌면 황자와 관계가 있는지 몰라요. 접촉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요.”
“황성에도 세작을 더 심을 것이니 황자를 계속 주시해야겠군.”
공작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루시엘이 말했다.
“가장 관건은 발루크의 진짜 본거지를 찾는 것이 되겠어요. 페넬로페를 데려갔으니 두고 봐야겠지만요.”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키제프가 루시엘의 손을 꼭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
“응. 고마워.”
어쨌든 부담감도 제법 컸던 문학 살롱이었지만 마무리가 되었다.
막스의 유리 공예품도 황후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어 놓았고, 영상석을 통해 널리 알릴 수도 있었다.
이제 결과가 오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려나?
왠지 두근거렸다. 동시에 또다시 잠이 사르륵 왔다.
‘아 참, 까맣게 잊고 있었네.’
그보다 먼저 풀어야 할 고민이 있었다. 시클라인의 마나 영양제가 제대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하품을 쏟아 내면서 잠을 참던 루시엘은 분홍색 딸기 가방을 뒤적였다. 마나 영양제 제작 방법이 적힌 종이를 꺼내려던 것이었지만 긴장이 풀려서인지 손을 가방에 넣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야악…… 배합법 찾아야 하는데에…… 으응.”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결국, 루시엘이 눈을 떴을 땐 다음 날 아침 포근한 침대 위였다. 이불을 걷어 내면서 루시엘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떡해, 자 버렸어!”
마나 영양제의 해답을 고민하고 잤어야 했는데 잠을 이겨 내지 못했다. 루시엘은 뽀송한 슬리퍼를 신고는 방을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서성거렸다.
루시엘의 뽀시락 대는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똑똑 노크가 들려왔다.
“……로즈?”
“나야, 루시엘. 방에 들어가도 돼?”
들려온 건 키제프의 목소리였다. 루시엘이 걸어가선 달칵 문을 열어 주었다.
키제프는 밤새 뭘 했는지 눈에 다크서클도 내려와 있고,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이었다.
한숨도 못 잔 사람처럼.
키제프가 비척비척 다가오더니, 루시엘의 손에 종이 하나를 쥐여 주었다.
“이거 받아. 그리고 식당에 내려가서 밥부터 먹고.”
“……잠깐만, 혹시 안 잤어?”
키제프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주억거렸다.
“헉, 왜 안 잤어? 얼른 가서 자.”
“그냥. 잠이, 안 와서.”
루시엘은 키가 한참 더 큰 키제프의 팔을 끌고, 그의 방으로 가려고 했다.
근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윽…… 무슨 열세 살이 이렇게 힘이 센 걸까?’
루시엘 세 명이 와서 당겨도 절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키제프를 밀어도 보고, 끌어도 봤지만 안 움직이자 루시엘은 휴, 하고 포기했다.
옆에서 뽀짝대는 그녀가 귀여우면서도 피곤함과 나른함이 잔뜩 몰려온 키제프는 눈이 풀린 채였다.
그러더니 루시엘의 침대에 푹 쓰러졌다. 아늑하고 포근한 향기에 잠이 솔솔 쏟아졌다.
그리고……. 삼 초 만에 잠들었다.
“……뭐야, 왜 여기서 자?”
루시엘이 그렇게 꿍얼거리면서 그제야 키제프가 쥐여 준 종이를 펴 보았다.
거기엔 루시엘이 원하는 것이 적혀져 있었다. 마나 영양제를 배합하기 위해 시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알아보니 대륙의 바다 건너 약초학이 발달한 이국에는 불을 피워 그 연기로 약초를 찌거나 익히는 훈증이라는 방법이 있대.
오늘 아침에 주방장이 해 준 이국식 훈증 요리를 먹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아보았어.」
‘맞아, 이게 있었어.’
이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훈증이 제국에 전해졌던 건 가온이라는 작은 나라의 약초학 저서가 도착한 후였는데, 그때가 아마 시클라인이 황성 약제사가 된 이후였다.
그럼 그때의 시클라인은 훈증을 알고 그 방법으로 약을 개발했던 거였나. 루시엘은 그걸 놓치고 있던 거였고.
키제프가 대신 고민하고 찾아 줘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나저나 키제프, 내가 이걸 고민하는 걸 어떻게 알았지? 아…….’
아마도 어제 종이를 들여다보면서 잠든 걸 키제프가 보았던 모양이었다.
그것 때문에 밤새 잠들지 않고 고민해 주었다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키제프…….’
진홍빛 눈망울이 댕그랗게 커지며 허공에 보석이 또롱 맺혔다.
토파즈와 에메랄드.
그리고 스피넬까지.
‘나 때문에 안 잔 거였어? 고마워, 키제프. 잘 자.’
루시엘은 금세 곯아떨어진 키제프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서둘러 시클라인에게 서신을 작성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로즈가 다가와 말했다.
“아가 마님, 클로디아 황녀님께서 오후에 방문하신다고 하네요. 마랑드 후작가의 다나 영애와 튜렌 백작가의 마샤 영애도요.”
“아…… 응. 알겠어. 그보다는 로즈, 나 부탁이 있는데. 서신 하나만 전해 줄 수 있을까?”
“네, 물론이에요. 어디로 보낼까요?”
“황성의 약제사 시험 실기를 준비 중인 시클라인 레니트 앞으로.”
“알겠어요, 맡겨 주세요. 급한 일인 거지요?”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시간 내로 전달이 가능하도록 빠른 마차를 불러서 직접 보내는 게 좋겠어요.”
“맞아, 최대한 빨리 보내면 좋겠어.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렇게 마차를 통해 서신을 전달하고 나자 루시엘은 그제야 안심하며 소파에 앉았다.
‘키제프 덕분에 방법은 찾았지만, 이제 남은 건 시클라인 그녀의 몫이야. 끝까지 잘해 주길 바라요!’
루시엘이 한숨 돌리고 있자 던컨 집사가 말했다.
“아가 마님, 이제 일어나셨습니까. 오늘은 특식으로 이국의 찜 요리가 준비되어 있으니 주방으로 모실까요?”
“좋아요!”
루시엘이 세차게 고개를 주억였다. 곧장 던컨 집사를 따라서 식당으로 가려는데 엘링턴이 그녀를 불렀다.
“아가 마님, 보고드릴 말씀이…….”
그와 동시에 루이비드도 응접실로 내려오며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다. 하지만 배고플 테니 식사부터 먼저 하고 와.”
“네.”
“아뇨, 5분이면 되는데…….”
“어허, 우리 새아가가 밥 먹을 땐 건드리지 마라.”
“……예. 아가 마님, 식사 드시고 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엘링턴은 빨리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루시엘을 보내 주지 않으면 공작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아 꾹 참았다.
“식사 후에도 내가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