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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52)화 (152/282)

<152화>

“황후 폐하, 벌써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꽤 지체되었습니다.”

“아, 알겠어요. 마지막은 발루크 후작가 차례군요. 그러고 보니 카빌 영애와는 무슨 인연으로 같이 오게 되었지요?”

황후가 그제야 발루크 후작 부인에게 관심을 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서로 인사와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그간의 일들을 소통했지만 발루크 후작 부인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함께 온 페넬로페가 입을 더 먼저 열고는 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발루크 후작 부인께서 저희 가문과 친분이 생겼는데, 마침 제가 문학 살롱에 가고 싶어한다고 하니 흔쾌히 데리고 와 주셨어요. 황후 폐하.”

“음, 그랬느냐?”

“예, 황후 폐하. 어쩜 그렇게 아름다우신가요? 저희 어머니보다 연세가 많으시다고 들었는데 주름 하나도 없으시고…… 혹시 성형 마법을……!”

성형 마법은 의료 목적으로 종종 행해졌지만 무척 고가인 데다 미용을 위해 불법으로 행해지는 곳이 많아 인식이 좋지 않았다.

페넬로페는 일반 귀족에게 했어도 굉장한 무례였을 언사를 무려 황후에게 내뱉은 것이었다.

그걸 지켜보던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페넬로페를 바라보았고, 카빌 후작가의 교육 수준을 짐작할 수 있었다.

‘페넬로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참 한결같네…….’

루시엘은 딱할 정도로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는 페넬로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황후의 안색은 불쾌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러니 뭔가를 보여 주기도 전에 마이너스였다.

애초에 황궁 출입이 금지된 가문의 아이였으나 발루크가 데려왔으니, 참고 받아 준 것이었다. 얌전히 있기는커녕 저런 사고나 치다니.

그러나 여기에서 화를 낸다면 성형을 인정하는 우스운 꼴로 비추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 문학 살롱은 황도는 물론 제국 전역 영상구를 설치한 곳이라면 전부 나가고 있을 터였다.

황후는 웃음기를 잃지 않은 채 페넬로페를 곱게 나무랐으나 아이를 보는 싸늘한 시선은 감출 수 없었다.

“카빌 영애는 예법을 전혀 익히지 않은 모양이구나. 차라리 말을 삼가는 게 좋겠다. 발루크 후작 부인, 다음은 그대 차례로군요.”

“아이의 무례함은 사과드립니다.”

발루크 후작 부인이 노려보자 페넬로페가 움찔하며 화들짝 놀랐다.

“제 딴에 황후 폐하의 미모를 칭찬한다는 것이 그만, 무례를 저지른 것을 용서해 주세요.”

“끄음…….”

황후는 불편한 기색이었으나 곧장 고개를 수그리는 어린아이를 보니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다.

그때 레이놀드가 나섰다.

“황후 폐하 앞이라 어린 영애가 긴장하였나 봅니다. 노여움을 그만 푸시죠.”

차라리 다른 귀족이 나서서 한 말이었다면, 좋은 의도로 받아들일 테지만 황자가 그리 말하니 곱게 생각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클로디아와 다른 귀족들마저도 분위기를 좋게 이어 가기 위해서 말했다.

“황후 폐하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아이의 판단력이 흐려졌나 봅니다. 부디 용서하세요.”

황후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기사 앞에서는 칭찬을 퍼붓고 뒤에서는 험담을 늘어놓는 가식적인 인간들도 많이 보아 왔으니 페넬로페의 말실수는 차라리 귀여운 편이었다.

하지만 개념 없는 아이라는 낙인은 오래갈 것이다.

“알았다. 용서하마.”

황후가 마지못해 용서하자 페넬로페의 얼굴이 밝아지며 고개를 들었다.

페넬로페는 황후에게 밉보였음에도 조금 전 황자가 제 편을 들어 주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무척 좋았다.

그러곤 괜히 어깨를 으쓱하면서 루시엘을 쏘아보다가 마주친 벨슈타인 가문 세 사람의 위압적인 눈빛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공작부터 시작해서 공작 부인, 그리고 벨슈타인 공자까지 페넬로페를 향해 서슬 퍼런 눈빛을 보냈다.

‘뭐, 뭐야. 죽일 듯이 쳐다보잖아.’

댕―댕―댕―!

장내가 어수선한 가운데.

때마침 열두 시를 알리는 종탑의 종소리가 멀리서 울려 퍼졌다.

황후가 아직도 유리공예품을 끌어안고 있자, 가르솔 후작이 크흠 기침을 내뱉었다.

발루크 부인이 일어나더니 주변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잠깐 모든 조명을 꺼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요청에 야외 정원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던 빛들도 모두 꺼졌다.

어느새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여름인데도 싸늘한 기운이 주변을 감도는 것만 같았다.

‘뭘 보여 주려는 걸까? 왠지 추운걸.’

루시엘이 몸을 살짝 움츠리며 떨고 있자, 큼지막한 재킷이 그녀의 어깨에 걸쳐졌다. 키제프였다.

“앗, 고마워. 아까 플라이 마법 써 준 것도.”

“……고맙긴.”

키제프는 루시엘의 환한 미소에 볼이 붉어져서는 괜히 머쓱한지 고개를 슥 돌렸다.

사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했던 행동이었으니까.

그만큼 너무나 완벽하게 아름다운 유리공예품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더 잘 볼 수 있게 플라이 마법으로 띄운 거였다.

그러면서도 키제프는 속으로 생각했다.

‘더 빛나게 해 주고 싶었어.’

물론 자신의 마법이 아니더라도 루시엘은 혼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하지만 루시엘이 얼마나 공들여 준비한 것인지 알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루시엘의 얼굴이 또렷한 윤곽을 드러냈다.

계란형의 작고 둥근 얼굴, 큼지막하고 커다란 눈동자 아래 오밀조밀하게 자리한 작은 코와 달콤한 딸기 시럽이라도 바른 듯한 입술.

아니, 어쩌면 키제프의 눈에만 그렇게 잘 보이는지도 몰랐다.

잠들 때 항상 스케치를 따라서 덧그리곤 했으니까.

삐그덕.

그때 들려온 기묘한 소리에 키제프의 아늑한 생각이 무너졌고, 루시엘도 어둠 속에서 귀를 종긋 세우며 본능적으로 키제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삐그덕.

마치 오래된 나무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루크 부인은 가져온 갈색의 나무로 된 상자를 꺼내 중앙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마치 커다란 짐가방 같기도 한 그것을, 어둠 속에서도 그녀는 부산스럽게 펼치고 물건들을 움직여 무언가 하고 있었다.

“……부인?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텐데.”

황후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발루크 후작 부인이 계속 나무의 마찰음을 내더니 말했다.

“거의 다 됐습니다.”

이내 그녀는 부싯돌을 딱딱 부딪쳐 불씨를 만든 다음, 유황이 묻은 나뭇가지에 붙였다.

치지직, 불길이 나뭇가지로 옮겨붙으며 붉게 일렁였고 그것을 다시 테이블에 양쪽 끝에 놓아둔 은색 촛대로 옮겨 붙였다.

‘꼭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것 같아…….’

일렁이는 노란 불빛에 주변이 조금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발루크 후작 부인이 만들어 낸 건 여러 가지 잡동사니 물건들이 있는 인형극 무대였다.

태엽을 감자 덜그럭거리면서 회전목마가 돌기 시작하며 오르골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서커스를 연상시키는 알록달록한 천막과 공, 그리고 가느다란 줄이 연결된 목각 인형, 마리오네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이 자아내는 건 조금 더 오싹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가까웠다.

“어머나, 마리오네트 인형극이네요.”

거리의 공연을 떠올리던 라리에트가 재밌겠다는 듯 말하자, 발루크 후작 부인이 조용히 입술에 손을 가져다 댔다.

“…….”

정말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분위기에 정적이 짙고 무겁게 내려왔다.

벨슈타인 공작의 눈초리도 가늘어졌다.

‘보면 볼수록 기괴한 여자로군.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무엇보다 피부에 찝찝하게 달라붙는 이 불쾌하고 탁한, 진한 향수 내음에 두통이 일어날 듯했다.

발루크 후작 부인이 이내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신에 페넬로페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발표할게요.”

인형극 무대로 이동하는 페넬로페의 움직임이 퍽 부자연스러웠고,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가 무척 차분했다. 눈동자는 반짝임 없이 공허했다.

‘페넬로페, 갑자기 좀 이상해졌어…….’

발루크 후작 부인이 유도하듯 먼저 손뼉을 부딪치자, 이내 사람들이 따라서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무 인형극 무대 앞에 선 페넬로페는 빈 의자 위로 올라가서 마리오네트 인형의 막대를 들었다.

그 소녀 인형은 페넬로페가 입은 옷과 똑같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페넬로페는 인형을 조종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공허함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익살맞은 표정과 목소리였다.

“제 이름은 페넬로페. 여러분에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죠.”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페넬로페는 능숙한 솜씨로 다른 금발 머리 여자 인형과 왕관을 쓴 남자 인형까지 집어 들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왕국에 아름다운 여자가 살았답니다. 왕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해서 청혼했죠. 두 사람은 행복에 겨웠고 곧 아기를 가졌어요.”

시작은 제법 흥미로웠다. 페넬로페가 이런 재주를 언제 익혔는지는 몰라도…….

그러나 이야기의 중반부터 좀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오, 하지만 가엾게도 아름다운 왕비는 아기를 낳고 그만 죽고 말았답니다. 왕비는 죽어서도 아기를 두고 떠날 수 없었어요. 결국 그 마음에 깊은 원념이 깃들더니 그녀에게 힘을 주었지요. 왕비는 제 아기 옆에 머무르며 새로운 꿈을 꾸었답니다. 그녀는 아주 특별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 물건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열두 명의 제…… 자가 필요했어요.”

페넬로페가 슬쩍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소녀 마리오네트를 잔뜩 집어 들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화려한 옷을 입은 마리오네트들은 섬세한 생김새였지만 하나같이 다들 입술이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발루크 후작 부인을 흉내 내는 듯한 지금의 페넬로페처럼.

“그리고 제자들을 하나, 둘, 셋…… 열둘을 모아서 죽였대요.”

소름 끼치는 내용을 말하던 페넬로페가 인형의 줄들을 싹둑 가위로 자르자 인형들이 테이블과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추리나 스릴러를 좋아하는 카르한 공자도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악해도 열 살짜리 소녀가 저렇게 섬뜩하게 인형극을 연기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순간 페넬로페야말로 진짜 마리오네트가 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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