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가문의 새아가 (151)화 (151/282)

<151화>

“어머, 언니. 형부가 저런 말도 하실 줄 알아?”

라리에트가 놀라서 솔리아페에게 입 모양으로 살짝 말하려는데, 뒤이어 솔리아페가 일어나 감격에 젖은 눈으로 박수를 쳤다.

“신이 내린 필력이 틀림없구나, 루시엘.”

“……첫 사인은 나에게 줘.”

솔리아페에 이어서 눈시울이 붉어진 키제프까지 기립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어, 언니? 키제프는 설마 우는 거야?”

라리에트는 생소한 그들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이내 그녀도 동참해 열렬히 박수를 쳤다.

가족들의 애정 행각 덕분에 루시엘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낭송이 끝나면 꽃이 피어나듯 불을 피워 올리려고 했는데 그만 마법 연출을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긴장했나 봐.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무사히…… 발표를 마쳤어.’

루시엘은 아직도 세찬 박동을 하는 심장을 손으로 매만졌다.

아까의 그 편지는 지난 생을 살았고 현재를 살고 있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안부와 격려, 위로였다.

그와 동시에 먼저 세상을 떠난 또 한 송이의 꽃, 일시아 언니를 위한 글이기도 했다.

물론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 수는 없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함께였다.

루시엘은 눈물을 참지 않았다.

‘이제는 슬프지 않으니까, 기쁘고 행복해. 그러니까 언니, 이건 눈물 아냐.’

이윽고 사람들이 어둠이라 말하는 벨슈타인. 제게는 더없이 다정하고 소중한 가족들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어. 안녕, 나의 꽃.’

루시엘을 향한 박수가 끊임없이 계속되자, 멀리서 지켜보던 엘링턴도 코끝이 찡해지는 걸 느꼈다. 황후도 같이 기립해 박수 치고는 말했다.

“어린 공자비가 어찌 이렇게 진솔하고 깊이 있는 글을 썼을까요. 그저 감탄하면서 들었답니다.”

황후의 극찬에 루시엘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우아하게 인사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황후 폐하.”

곳곳에 설치된 영상구를 통해서 그 모습이 그대로 흘러나왔다. 루시엘이 보여 준 아름다운 유리공예품과 글에 매료된 사람들이 눈을 빛냈다.

모두 루시엘이 테이블에서 꽃 랜턴을 가져가는 걸 보면서 여전히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건 아름다운 예술품에 관심이 깊은 황후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황후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가와서 루시엘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공자비, 그 랜턴을 자세히 좀 볼 수 있을까? 무엇으로 만들었기에 그리 투명하고 아름다운 색을 가졌는지 보고 싶구나.”

드디어 기다린 대로 반응이 오자 속으로 웃음이 포실포실 나왔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를 터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서 루시엘은 침착하게 대답하며 랜턴을 황후가 잘 볼 수 있게 조심스럽게 전달했다.

이내 그것이 단단하고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음을 알아챈 황후가 물었다.

“공자비, 이건 유리공예품인가?”

“맞습니다, 폐하. 벨슈타인의 작은 마을 이브나크의 유리 공방 장인이 정성을 다해서 만든 거예요.”

“오호라. 벨슈타인의 유리가 유명하다는 건 들은 적이 있긴 한데. 이렇게 빛깔이 투명하고 영롱한 건 처음 보는구나.”

황후의 표정이 지금껏 보던 중 가장 즐겁고도 화사해 보였다.

“빛깔이 청명하고 아름다운 유리를 제작하는 특수 비법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

황후의 말에 잠자코 있던 가르솔 후작 부인도 말을 보탰다.

“벨슈타인의 유리 공방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다던데 아직 명맥을 유지하고 있군요.”

얄미운 발언이지만 사실이었기에 루시엘은 그녀를 탓하지는 않았다.

공작도 그 원인을 제공한 발루크 상단을 상기하면서 발루크 후작 부인에게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는 베일 너머로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루시엘도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할까? 조금 자극해 봐도 아무 반응이 없을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런 말이 있지요. 숙련된 장인의 기술과 그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은 언젠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가진 똑같은 모양의 유리잔 하나보다, 장인의 고민과 손길이 닿은 특별하고 독창적인 유리공예품 하나가 저는 더 마음이 갈 것 같아요.”

공방 장인을 데려다가 저렴하고 모양이 똑같은 물건을 만들어 시장을 독점해 버린 발루크 상단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발루크 후작 부인이 루시엘을 유심히 살펴보며, 붉은 입술로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왠지 소름 끼치는 듯했다.

그녀는 루시엘에게 말하는 대신 황후에게 말했다.

“다음 순서는 우리 발루크인가요, 황후 폐하?”

빨리 다음 순서로 넘어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이 살롱의 주최자는 다름 아닌 황후였다.

“잠깐만 기다려 주시지요, 발루크 부인. 공자비의 유리공예품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어요.”

황후가 대놓고 루시엘의 유리공예품에 깊은 관심을 내보이자 몇 명의 낯빛이 좋지 않아졌다.

레이놀드와 가르솔 후작 내외, 그리고 페넬로페였다.

“나 역시 유리공예는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색유리를 조각조각 작업한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이건 마치…….”

황후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그때 키제프가 대답했다.

“건축 기법으로 쓰이는 스테인드글라스와 닮은 것 같습니다.”

“오, 공자의 말대로 스테인드글라스가 맞구나! 성당에서 본 적이 있는 듯해.”

“어쩐지, 그래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나 했지요. 성당에 자주 가거든요.”

힐스 대부인이 황후의 말에 맞장구치듯 고개를 주억이며 성당의 웅장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렸다.

사업적인 안목이 깊은 세리안 백작도 탐이 나는지 눈을 빛냈다.

“오, 건축 기법을 유리공예로 접목하다니 신선한 발상입니다.”

예측한 반응이 나오니 루시엘도 약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앗, 맞아요. 스테인드글라스는 건축 기법으로 유명해요. 그래서 사실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한 건축가 갈리우스 백작님의 기술을 전수받아 제작된 공예품이랍니다.”

“아니, 갈리우스 백작이라면 그 유명한 천재 건축가?”

“네, 황성의 황금 거울궁과 대신전을 건축한 그분이요.”

“그는 아무에게나 기술을 전수하지 않는다던데…… 도대체 어떻게.”

세리안 백작이 루시엘을 보며 놀라워하자, 공작이 얼른 대변해 주었다.

“갈리우스 백작은 이제 우리 벨슈타인의 후원을 받고 있지.”

이에 발루크 후작 부인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또다시 입매를 틀었다.

루시엘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유리공예품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사용한 사람은 그 장인이 처음일 거예요.”

“그 대단한 장인이 누구인가요?”

유리공예품에 별 관심이 없던 라리에트마저 물었다. 루시엘이 밝게 웃으면서 답했다.

“이브나크 장인들 중 한 명이에요. 발루크 상단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이요.”

루시엘이 의미심장하게 마지막 말을 내뱉자 다들 그 공방 장인이 누구일지 궁금해 죽을 지경인 듯했다.

“H 공방이라는 것만 밝혀 둘게요. 이제 제 순서는 마치도록 할게요. 마지막으로…….”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루시엘은 또 한 번 엘링턴에게 시선을 보냈다.

“엘링턴, 그거 지금 나누어 드릴까 봐요.”

루시엘의 말에 엘링턴이 바로 알아듣고는, 랜턴이 들어 있던 상자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어머, 무언가 또 준비했어요? 귀여운 공자비, 우릴 얼마나 더 놀래키려고…… 험험.”

클로디아가 잠시 황녀로서의 무게감을 잊고, 루시엘에게 친근하게 말하다가 그만 느껴지는 시선에 헛기침을 했다.

“문학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딸랑딸랑.

흔들면 꽃잎이 움직이는 작은 분홍색 유리공예 책갈피였다.

“예뻐라.”

“정말 고마워요.”

책갈피를 나눠 받은 귀족들이 모두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이 늙은이가 책을 읽을 한 가지 이유가 더 생겼군요.”

“좋아해 주셔서 기뻐요.”

힐스 대부인도 루시엘의 자그만 손을 어루만지며 그리 말해 주었다. 솔리아페는 그런 루시엘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루시엘, 오늘 그야말로 활짝 핀 꽃처럼 빛나는구나. 저 스테인드글라스는 네 의견이지?”

루시엘은 수줍게 웃으면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의견은 제 거지만, 하멜 공방 장인과 그에게 기술을 전수한 갈리우스 백작님의 노력이었어요.”

“그래도 사람을 알아본 우리 새아기가 대단한 건 변함없지.”

솔리아페는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분명 그들이 주목받겠구나. 우리 벨슈타인도 함께.’

속 깊은 루시엘은 언제부터 어디까지 내다보고 이 일을 준비했을까. 솔리아페는 내심 감탄했다.

‘알면 알수록 놀라운 아이야.’

루시엘은 꽃 랜턴을 다시 상자에 담아서 황후에게 건넸다.

“꽃이 여기 피었으니, 살롱과 황후 폐하께 드릴게요. 부디 받아 주세요.”

그러자 황후의 입이 함박만 해지더니 눈을 빛내면서 유리공예품을 소중히 받았다.

그러고는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자비의 글 발표도, 공예품도 내 마음에 아주 쏙 드는구나. 이것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던 한여름 밤의 꿈 같구나. 고맙다.”

우열을 가리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 벌써 황후의 마음이 누구에게 기울었는지는 자명하게 보였다.

모두들 루시엘의 발표를 인정하고 축복하는 가운데.

한편 페넬로페는 속이 뒤틀리는 것만 같아, 엘링턴이 나누어 준 꽃잎 책갈피를 거세게 움켜쥐며 생각했다.

‘……칫, 본인이 만든 것도 아닌데. 루시엘이 왜 저렇게 칭찬받는 건데? 두고 보라지. 내가 한 수 위라는 걸 톡톡히 알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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