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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48)화 (148/282)

<148화>

땅거미 진 시간에 길을 나섰는데 살롱이 열리는 야외 정원에 다다랐을 때는 어둠이 주변에 차곡차곡 쌓인 한밤이었다.

아름답게 꾸며진 야외 정원을 반딧불과 색색의 나비들이 노닐었다. 영상구를 통해 본 것보다 몇 배는 더 몽환적이었다.

쏴아아.

인공 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미리 앉아 있는 황성의 오케스트라 악단도 악기를 점검하거나, 손질하고 있었다.

“아가 마님, 긴장하지 마시고 하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아시죠?”

“응, 알고 있어요.”

루시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는 엘링턴이야말로 긴장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사실 공작을 제외한 가족들에게는 공예품이 무엇인지 비밀로 한 상태였다.

엘링턴은 유리 공예품을 조심스레 든 채, 루시엘의 뒤를 따랐다.

여린 살구색 드레스를 입은 루시엘이 사부작대며 걸을 때마다 꽃잎이 펼쳐지듯 드레스 자락이 움직였다.

반짝이는 은발은 양쪽으로 둥글게 묶어 올려서 뒤통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났고, 앞머리도 오늘은 전부 올려서 동그랗고 예쁜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레이스로 여러 겹 덧대어진 목에는 살구꽃이 달린 리본을 매었다.

무지개 이슬 톡톡 렌즈로 바꾼 오늘 눈동자 색은 연한 레몬색이었다.

앙증맞은 모습에 입가가 풀어진 솔리아페와 공작이 뒤따랐다.

“그 드레스를 입으니 꽃에서 태어난 요정 같구나, 루시엘.”

“……우리 새아가의 귀여움이 하늘을 뚫겠군.”

그 옆에서 키제프는 그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가족들은 오늘 화이트로 의상 색을 맞추어 깔끔해 보였다.

야외 정원에는 이미 다른 가문 사람들이 도착해 마련된 하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 뒤로 물건이 잔뜩 쌓여 있어, 다들 무언가를 준비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카르한 공자인 아흰 곁에는 덩치가 몹시 큰 보좌관이 둘이나 함께 있었는데, 만찬장에서는 혼자 들어와 외로워 보였던 터라 다행이었다.

이내 이사벨 황후와 클로디아 황녀가 우아한 하늘색 드레스를 입고 마도사의 소환진에서 빛을 발하며 나타났다.

마법 연출에 귀족들이 박수를 쳤다.

“와, 여신님! 두 분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 날 것 같아요.”

루시엘도 다람쥐처럼 눈이 동그래지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두 사람도 웃고 말았다.

“고맙구나, 공자비도 엄지손가락만 한 요정 같기도 하지.”

“그야말로 압도적으로 아름다우십니다!”

뒤늦게 가르솔 후작 부인도 서둘러 황후의 기분을 맞추려 칭찬했다. 저마다 아까보다 더 신경 써서 차려입은 것이 틀림없었다. 모두들 자리에 착석하자 황후가 말했다.

“시작은 클로디아 황녀가 자청하였답니다. 타이라 제국 건국 시의 원서 한 구절을 낭독할 것이오.”

황후의 말에 클로디아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금빛 두루마리를 펼쳤다.

클로디아는 번역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잠시 보여 주었다.

상형 문자처럼 그림이 섞인 고대어로 적혀진 내용 그대로였다.

클로디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읽어 나갔다.

“태초에 어둠을 가르고 이 땅에 나타난 이름 없는 용사여. 검을 들어라. 그림자에 숨은 태양을 깨우고 눈앞의 적과 맞서 싸워라. 비로소 그 스스로 태양이 될지니 만인이 그 발치 아래 경배하고 여신은 그 머리 위에서 월계수를 흔들며 춤을 출 것이다. 마침내 그 끝은 제국의 광영으로 찾아오리라.”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오카리나와 하프의 선율이 더해져 신성한 분위기를 더했다.

황녀가 낭독을 마치자 지켜보던 모두의 눈동자가 커지며 이내 마랑드 후작이 그녀를 칭찬했다.

“고대어를 언제 익히셨습니까?”

“고대어 수업은 시작한 지 이제 한 달이 되었는데 익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클로디아가 대답했다.

고대어는 학식 깊은 학자들도 터득하기 어려워, 통상은 번역 마법이 사용된 해석본을 읽었다.

“한 달 만에 해석본이 아닌 원서를 읽을 줄 아신다니 믿기지 않습니다.”

탐탁지 않았지만 가르솔 후작도 어쩔 수 없이 황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구를 통해 지켜보던 황제도 수염을 매만지며 대신들을 향해 자랑스러운 얼굴을 했다.

“황녀가 최근 보여 주는 행보가 인상 깊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구나.”

“수재에 가까우신 듯합니다!”

문학 살롱 내의 다른 귀족들도 클로디아를 영민하다고 칭찬의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이 발표는 확정된 것이 아니었지만 클로디아가 고대어 수업을 듣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루시엘이 꼭 발표했음 좋겠다고 제안했다.

클로디아가 아까 루시엘을 찾아왔을 때, 단어 몇 개의 해석이 헷갈린다고 해 루시엘이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었다.

“그런 재능을 날려 버리기엔 아까워요, 모두에게 황녀님을 한 번 더 각인시킬 기회예요!”

이전 생의 루시엘이 황성의 유리관에 갇혀 있을 때였다.

보석을 만드는 것만이 일이었던 루시엘은 황태자에게 읽을 만한 것을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때 황태자는 일부러 루시엘이 읽을 수 없게 괴롭힐 요량으로 고대어 원서를 던져 주었다.

그러나 루시엘은 그것이라도 들여다보았다. 매일 매일 알 수 없는 문자를 보는 것은 퍽 지루한 일이었지만, 그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벼랑 끝에 선 루시엘의 상태를 나아지게 만들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리고 만들어 낸 옵시디언 하나를 몰래 숨겨 두었다가, 어린 시녀에게 주면서 고대어에 대한 책을 빌려 달라고 했다. 고대어도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타이라 제국의 고대어로.

그렇게 어렵사리 고대어를 익힐 수 있었고, 그걸 써먹을 때가 없었는데 지금이나마 클로디아 황녀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루시엘이 클로디아에게 잘했다는 응원의 눈빛을 보냈다.

클로디아 황녀의 낭독을 시작으로 가르솔 후작 부인이 경매소에서 구입한 유명한 그림을 펼쳐 놓고는 감상문을 발표했다.

여인의 누운 옆모습을 선으로 가볍고 장난스럽게 표현한 그림이었다.

“이 그림은 <누워 있는 여인의 초상>인데 처음 보자마자 놀랍도록 강렬한 필치는 화가가 의도해 가장 신경 써서 섬세하게 그린 것 같아 마음에 꼭 들었다. 여백에서 주는 풍요로움이 편안하다. 이상입니다. 제가 깊은 감명을 받은 이 그림은 황후 폐하와 이 문학 살롱을 기념하여 기부하겠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루시엘이 솔리아페에게 속삭였다.

“저 그림, 어딘가에서 본 것 같지 않아요? 공작성에 길리아트 할아버지께서 소장하신 그림이요.”

“어머, 그런 것 같구나. 그럼 저 그림은 어떻게 된 거지…….”

황후도 의구심이 드는 그림과 감상문이었는지 표정이 미묘해졌으나 이내 말했다.

“감상문 발표는 처음이군요, 잘 들었습니다. 누구 가르솔 후작 부인의 글에 대해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 말은 황후 자신은 할 말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루시엘이 살짝 손을 들었다.

“저…… 사실 저 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화가의 연작인가요?”

“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 그림 하나만 팔고 있어서…….”

잠자코 있던 키제프가 조용히 캔버스를 보며 말했다.

“잠시 가까이에서 그림을 살펴봐도 될까요?”

“그러세요, 벨슈타인 공자.”

키제프가 캔버스를 가져가서 하단과 재질을 살펴보았다.

“이 그림은 사본입니다.”

“무, 무슨 말씀이신가요?”

“화가의 서명이 없고, 캔버스의 질도 무척 저급의 것입니다. 그리고 화가의 의도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저건, 그가 왼손으로 눈을 감고 장난스럽게 그린 그림입니다.”

“예? 그럴 리가 없는데……. 90만 틸링이나 주고 구매를.”

“저 화가의 그림 한 점 시세는 기본적으로 500만 틸링이 넘습니다. 어디에서 구입하셨습니까?”

“읏, 기, 기억이 안 나네요…….”

평소에 그림을 그리더니 작품에 대한 관심도 높은 모양이었다.

키제프의 말에 가르솔 후작 부인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그림을 돌려받고는, 공자를 쏘아보았다. 잘난 척하려던 것이 오히려 창피로 돌아가자 황후는 딱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이어서 라리에트가 정신이 쏙 빠질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서 황후의 극찬을 받았다.

“세리안 백작 부인은 미모만큼 재주가 많은 사람이에요.”

다음으로 준비된 사람은 카르한 공작가의 아흰인 모양이었다. 그는 웃을 때마다 눈매가 고양이처럼 올라가는 새침한 인상이었다.

연회 홀에서는 벌써 공자의 팬이 생겼는지 일부 영애들이 귀엽다고 소리를 꺅 질렀다.

“저는 추리 소설을 좋아합니다. 연주를 시작하면 같이 읽어 주세요.”

아흰이 수줍게 말을 마치고 자신이 썼다는 추리 소설을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곤 등 뒤에 매달린 커다란 붉은 바이올린을 꺼내고 악보를 거치대에 올리며 집중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바이올린의 활을 살짝 점검하는 동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황후도 그의 철저한 준비성에 감탄하면서 기대하는 눈치였다.

루시엘도 그의 소설과 연주가 궁금해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손수건을 흔들어 주었다.

응원을 보았는지 아흰이 해맑게 웃었다가 키제프를 보곤 웃음기를 뚝 멈추었다.

이어서 바이올린을 어깨에 걸친 아흰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표정이 바뀌어, 신이 들린 듯 활을 켜기 시작했다.

마치 달리는 말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스산한 분위기가 주변을 감쌌다. 홀로 길을 걷던 남자가 날카로운 물건을 들고, 마차의 짐칸에 몰래 올라탔다.

꺄아아악. 순식간이었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과 함께 피가 마차 바닥에 낭자해졌다. 다음 날 피가 전부 빠져나간 시체가 강변에서 발견되었다…….」

“끼야아악!”

섬뜩한 내용 때문일까.

어디선가 들려온 비명이 연출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으나 일순 모두가 등골이 서늘해져 있었다.

곧 연주가 끝나며 싸늘한 정적이 감돌았고, 황후가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 내며 아흰을 칭찬했다.

“더위를 가시게 해 주어서 고마웠어요, 공자.”

아흰이 꾸벅 인사를 마치고 돌아올 때쯤이었다.

“드디어 빈자리가 채워지겠군요. 어서 오세요, 발루크 가문인가요?”

발루크 가문은 두 번 정도 초청했는데 늘 참석하는 대신, 낱장으로 된 글과 함께 조각상을 하나씩 보내곤 했었다.

원래 황후는 이번에는 그들을 배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이 흥미진진해 다음을 궁금하게 만들었고, 이상하게 가문을 빼려 할 때마다 자꾸 마음이 쏠려 즉흥적으로 초청을 결정하게 되었다.

오늘은 드디어 그 발루크 가문의 일원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베일을 쓰고 자줏빛 드레스를 입은 귀부인과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소녀.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레이놀드 황자의 모습까지 보였다.

“많이 늦었습니다.”

느릿한 어조로 여자가 말했다.

루시엘은 순간 주머니 속의 물건을 꼭 쥐었다가 놓았다. 베일 너머 여자의 얼굴이 자신이 알던 사람과 꼭 닮았던 터였다.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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