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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47)화 (147/282)

<147화>

황성이 그대로 조각된 멜론 한 통, 다이아몬드가 박힌 유리잔에 든 망고 셔벗, 눈처럼 새하얀 생크림과 식용 금박이 함께 말린 롤케이크까지.

특별 만찬의 마지막 디저트 접시가 식탁 위로 올라왔다.

노이슈반 황제는 기다린 것처럼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넉살 좋게 말했다.

“오늘 밤은 황후의 말이 곧 짐의 뜻이니, 부디 즐거운 시간 갖기를 바라겠소. 영상구를 통해 지켜볼 터이니.”

황후가 주관하는 행사이니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치열한 싸움에 끼어들지 않고 뒤에서만 지켜보겠다는 심산일까.

겉으로는 허허 웃는 황제였기에 루시엘은 그 속내가 궁금해졌다.

‘황제가 특별히 어느 자식을 더 총애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황제는 그리 말하고 사라졌다.

황제의 말이 신호탄이 되었던 탓일까. 이번에는 사교계의 실질적인 입김이 들어갔을 부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어떤 놀라운 것을 준비하셨는지요, 세리안 백작 부인? 의상을 보아하니 이번엔 캉고 댄스라도 선보이시나요?”

후작과 이십 년의 나이 차 때문에 그의 딸처럼 보이는 가르솔 후작 부인이 라리에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무희들이 추는 경박한 춤을 준비하냐고 비꼬는 말이었다.

늘 자신을 험담한다고 라리에트가 솔리아페에게 털어놓았었다.

“캉고를 가르솔 후작께서도 좋아하시나 봐요. 절 계속 쳐다보시더라고요. 그나저나 평소 안 가시던 경매소에 다녀오셨다던데 좋은 물건을 찾았던가요? 아…… 워낙 소비에 검소하다고 들었지요.”

옆에 앉은 남편 세리안 백작은 최근 사업으로 승승장구해, 가르솔 영지 수입의 두 배를 벌어들이고 있었다. 라리에트가 활짝 웃으니 주변이 온통 밝아졌다.

가르솔 후작은 졸지에 한눈판 사람으로 얼굴이 벌겋게 되었고, 후작 부인이 표정 관리를 못 하고 파르르 손을 떨며 꼬리를 내렸다.

“그, 그냥 구경차 다녀온 것이었답니다. 흠흠. 두 공작가에서 어떤 어마어마한 걸 보여 주실지 고대하고 있지요.”

가르솔은 레이놀드 황자의 편에 서 있는 대신들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지금껏 문학 살롱에 참석한 적도, 황후에게 잘 보이려 한 적도 없는 가르솔이 여길 기웃거린다는 건, 그만큼 다급해졌다는 뜻일지도…….

가르솔 후작 부인의 말을 들은 솔리아페가 여유로운 미소로 답했다.

“우리 가문은 황후 폐하의 깊은 뜻을 이해하고, 문학의 낭만을 즐기러 왔을 뿐입니다.”

“벨슈타인의 문화 수준이 참으로 높더군요. 기대됩니다.”

레이놀드의 자못 건방지게 들리는 말에 루이비드가 여유롭게 받아쳤다.

“황자는 체력 관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던데. 벨슈타인에선 내내 궁에 있질 않았나. 그리 허약해서야……. 걱정되더군.”

이에 황후와 나머지 귀족들도 레이놀드 황자에 주목했다.

“황자, 그게 사실인가요? 이런, 주치의를 당장 불러야…….”

“아뇨, 아픈 곳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어떤 수업을 받고 있지요? 이 어미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하였어요.”

이사벨 황후는 제 배로 낳은 자식은 아니니, 황자에게 존칭을 썼다. 황후의 물음에 레이놀드는 솟구치는 분노를 감추며 대답했다.

“……수업은 잠시 쉬는 중입니다.”

가르솔 후작이 냉큼 대답했다.

“황자 전하의 새로운 스승들은 능력 있는 자들로 수소문 중입니다. 그간 황자께서 유학을 비롯해 오랜 교육을 받으셨으니 잠시 쉰다 하여 실력이 녹슬지 않으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후 폐하.”

“으음, 그래. 보고 기다리겠소.”

그 말은 차후 황자의 일정이나 수업에 대해 관여를 하겠다는 뜻이었기에 레이놀드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이리되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가 없게 된다.’

가식적인 대화를 듣던 루시엘은 셔벗을 한 입 푹 떠먹었다.

슬슬 아까와는 공기가 달랐다.

한가롭게 풀어졌던 분위기가 서로를 살짝 경계하는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당겨졌다.

누가 당장 싸워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

잠자코 있던 황후의 외가이자, 고모인 힐스 가문의 대부인이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저는 이 모임이 다른 색으로 물들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문학 이야기만 했으면 해요.”

“저도 그러길 바라고 있지요.”

황후가 웃으며 그리 대답했지만, 그건 대부인만의 욕심인 듯했다. 이미 이사벨 황후부터 클로디아의 든든한 뒷배를 모아 줄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만찬은 이만 마치고 약속 장소에서 뵙겠소.”

황후가 너그러운 미소를 지었고 만찬 자리가 파했다.

레이놀드가 서둘러 움직이는 것을 루시엘이 주시했다.

‘……레이놀드가 그동안 사냥만 하면서 놀고 있었던 이유가 뭐지?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어쨌거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 모양이었다. 공작의 말대로 결국, 발루크와 페넬로페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가족들과 만찬장을 빠져나와 회랑을 지나가는데 누군가 루시엘을 슬그머니 따라왔다. 클로디아였다.

“공자비, 잠깐 시간 되나요?”

“벨슈타인 가문의 객실로 가서 이야기해요.”

소곤거린 루시엘이 클로디아의 손을 잡았다. 가는 길에 황실 근위대 수십 명이 백색의 제복을 입고 도열해 있었다.

‘보석 노예 계집…… 얼굴은 꽤 반반하단 말이지.’

황자 직속의 기사들과 마도사들의 추근거림. 과거의 기억이 다시 루시엘의 머릿속을 헤집어 불쾌해질 무렵, 에나멜 구두를 신은 발걸음이 느려졌다.

근위대가 있는 쪽을 보면서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던 클로디아가 루시엘에게 물었다.

“……루시엘?”

“무슨 일이지?”

서늘한 기색을 흘리며 키제프도 루시엘에게 다가왔다. 앞장서서 가던 공작과 솔리아페도 걸음을 멈췄다.

이내 근위대의 가장 선두에 있던 청년이 척척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 무슨 일이지?’

반짝이는 갑옷 위로 황실 근위병을 뜻하는 붉은 망토가 휘날렸다.

“황실근위대장 유리스 폰 랜버트, 벨슈타인 공작가의 황성 호위로 배정받았습니다. 계시는 동안 안전히 모시겠습니다.”

“……유리스?!”

투구를 벗자 청년의 깔끔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날카로운 푸른 눈동자와 짙은 보라색 머리칼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무뚝뚝해 보여서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

슬쩍 나오는 웃음기를 접어 두고 유리스가 절도 있게 인사를 마쳤다.

“랜버트 경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깜짝 놀랐잖니.”

“처남…… 오랜만이군.”

“예.”

공작 부부와 가볍게 인사를 마쳤다. 그는 솔리아페의 남동생으로 랜버트 후작가의 핏줄 중 유일하게 황실에 근무 중이었다.

갑자기 근위대가 다가와 놀랐던지라 루시엘은 자그만 가슴을 쓸었는데 다행이었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째서 호위도 없이 여기에……. 바로 호위 기사를 배치하겠습니다.”

“자, 잠깐 모른 척해 주세요. 잠시 후에 랜버트 경이 데려다주시면 되잖아요.”

“무슨 이유가 있으십니까?”

“아, 아뇨. 친구를 만나러 온 거예요.”

‘어쩐지 클로디아 황녀님, 랜버트 경과 눈을 못 마주치는 것 같은데…….’

루시엘이 살짝 웃고 있는데 어느새 유리스의 눈동자가 사뭇 휘둥그레지며 물었다.

“솔리아페 누님, 저 모르게 아이가 있었습니까?”

“……뭐라고?”

“……우리 애는 맞지만 오해가 있군.”

루이비드가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고, 곧 키제프가 오해를 풀어 주었다.

“루시엘은 제 아내입니다.”

“소식은 들었는데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구나.”

유리스의 시선이 부드러워지며 잠시 루시엘에게 살포시 와닿아서 꾸벅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루시엘이라고 해요.”

“그래, 반갑구나.”

황성의 갑옷을 입은 근위대라도 이분은 무섭지 않을 것 같았다. 인사를 마치고 다시 걸어가는데 키제프가 루시엘을 보며 이상한 말을 해 댔다.

“……루시엘, 그거 알아? 고대 언령 마법 중에는 ‘각인’이라는 게 있다더군. ……그걸 배울까.”

“왜?”

“자꾸 사람들이 묻잖아. 일일이 대답해야 하니, 알아서들 잘 보라는 거지.”

“……각인? 그럼 어떻게 돼?”

“영원한 반려가 된다더군.”

“…….”

키제프가 싱그레 웃으며 말했지만, 왠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루시엘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다.

클로디아가 얼굴이 붉어져선 루시엘에게 놀리듯 공자비는 앞으로 큰일 났다, 위험하다며 속닥였다.

* * *

만찬장을 빠져나간 레이놀드는 호위 기사의 호위도 무르고, 팔로스와 자주 만나는 후원으로 향했다.

심기가 불편해진 레이놀드 앞으로 팔로스가 구해 온 것을 내밀었다.

“황자 전하께 도움 되는 소식이 있습니다. 약제 시험 응시자 중에 마나 영양제를 개발 중인 자가 있다고 합니다.”

“마나 영양제라니? 효능이 있어야 진짜지요. 사기꾼이나 가짜는 필요 없어요.”

레이놀드의 말에 팔로스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면서 대답했다.

“아직 최종 실기 시험에 합격한 것은 아니니 더 확인해 봐야겠지만 실기 시험 내부 감독관이 흘린 정보이니 확실하다고 봅니다. 대신 누군지는 절대 밝히지 않더군요.”

“확실히 효능이 있는 약을 개발했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내 앞으로 데려오세요.”

“예, 또 다른 내부 정보를 보니 유명한 약제사 집안인 린킨스 자작가의 자제도 응시했다고 합니다. 그자일 확률이 9할입니다.”

아직 황위를 받기 전이라, 담당 약제사로 지정할 수는 없지만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할 인재였다.

그 검을 쓰려면 마도사만큼이나 마나를 많이 소모해야 한다 했으니까, 미약한 마나를 강화할 필요성이 있었다.

훈련을 통하는 방법도 있었으나, 마나를 담는 그의 신체 그릇은 타고나기를 유독 약하게 태어났다.

‘빌어먹을…….’

“내 스승을 구하는 일 말입니다. 가르솔 후작은 일 처리가 너무 꼼꼼해 오래 걸리니, 숙부께서 아무나 데려오세요. 황후가 이제 어미 노릇까지 하려 든단 말입니다. 어떻게든 해 보세요.”

“……찾고는 있습니다, 전하.”

“이만 쉬고 싶으니, 살롱에는 못 간다 전해 주시고요.”

“낯빛이 영 창백하시니 그게 좋겠습니다.”

그때였다. 팔로스가 기운을 느끼자, 주변으로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다각거리며 붉은 마차가 인근에 멈추더니 문이 열렸다.

초록빛 공단 드레스를 차려입은 빨간 머리의 예쁘장한 소녀가 내렸다. 대담하게도 아이는 황자를 보고서 씩 웃으며 눈을 빛냈다.

앳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빨간 입술이 인형처럼 도드라졌다.

“제국의 별이신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넌 누구냐?”

“제 이름은 페넬로페예요. 마차 타시래요, 황자 전하.”

“……새로운 종인가.”

레이놀드가 페넬로페를 보고 중얼거리면서 마차에 오르자, 순식간에 뿌옇게 낀 안개와 함께 마차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황자의 부관 팔로스는 마치 아무것도 보지 못한 양, 그대로 총총 걸어 지나갔고 페넬로페만이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빙그레 웃었다.

“드디어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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