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연회장으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루시엘과 가족들은 알현을 마치고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커튼으로 가려진 입구를 통해 나갔다.
그러자 경쾌한 바이올린 연주와 함께 화려한 연회장이 보였다. 벨슈타인 공작가 일원의 등장에 파티를 즐기던 귀족들도 주목했다.
“벨슈타인 공작가……!”
“그제 시내에서 공작 부인을 봤었는데…….”
“검은색으로 가족 모두 의상을 맞췄네요. 세련되기도 하셔라.”
“그 소문 들었어요? 베아트리체 의상실에서……!”
“벨슈타인 공작님은 오늘도 세상을 혼자 사시는군요.”
여기저기서 소곤거리는 대화 소리가 활기차게 들려왔다. 시종장이 지정 테이블로 안내하려고 했으나 사람들 때문에 좀처럼 움직이기 어려웠다.
벨슈타인과 친분이 있든 없든 줄을 대고 싶은 귀족들이 서둘러 인사하기 위해 분주히 다가왔다.
“벨슈타인 공작가에 인사드립니다! 헤르만 백작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지난번 서신을 드렸는데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인사를 미처 다 받기도 어려울 정도로 줄줄이 다가오는 귀족들에게 공작이 피곤함을 내비치며 적당히 선을 그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고, 인사는 천천히 나누겠소.”
그의 말에 사람들이 옆으로 갈라져 길을 터 주었다. 그제야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가족들은 지정된 원형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체구가 작은 루시엘을 배려해 공작이 친히 높은 의자에 앉히는 모습을 보고는 귀부인과 영애들이 한차례 신음을 흘렸다.
벨슈타인을 향한 귀족들의 인사 세례가 잦아들자 루시엘도 그제야 주변을 가늠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다른 참석 가문들도 왔나? 읏, 안 보여.’
의자 등받이가 루시엘의 앉은키보다 높아서 시야가 가로막힌 터였다.
턱을 괴던 키제프가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여 귓속말로 속삭였다.
“루시엘, 뭘 찾고 있어?”
“아, 일곱 가문이 다 왔나 궁금해서…….”
키제프는 살짝 주변을 훑어보더니 말했다.
“아직 다 오진 않았어. 일부만 온 것 같은데…… 루시엘, 네 친구 저기 있다.”
“아……!”
미리 알아 둔 명단에서도 익숙한 가문의 이름이 있었다.
마랑드 후작가, 피로연에서 친구가 되었던 다나의 가문이었다. 잠시 후 마랑드 후작 부부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벨슈타인 공작 각하와 공작 부인, 피로연 이후로 또 뵙습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부부에게는 공작도 까칠하게 굴지 않았다. 어른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다나가 키제프에게 눈인사를 하곤 루시엘을 향해 눈을 빛냈다.
“……보고 싶었어요, 루시엘! 살롱에서 보게 될 줄이야. 시내에서 공자비를 보았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진짜 왔었구나.”
“응. 미리 연락하지 못해서 미안, 다나. 좀 바빴어요. 그래도 이렇게 보게 되어서 너무 좋아요.”
두 소녀가 서로의 손을 맞잡으며 반가움을 표했다.
“살롱이 끝나면 같이 놀아요. 마샤도 불러서.”
“응, 좋아요.”
낯선 황성에서 친구를 만나니 루시엘도 긴장이 살짝 풀리는 듯했다.
“다나도 글을 발표하나요?”
“아뇨. 부모님이 하실 거예요. 저는 그런 거 몰라서. 헤헤. 설마……루시엘은 발표해요?”
“그렇게 됐어요.”
“꺅, 응원할게요!”
이윽고 힐스 후작가와 가르솔 후작가, 세리안 백작가까지 다른 가문들이 속속 도착해 테이블을 채웠다. 황자와 황녀도 테이블을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이어서 따로 인사할 시간도 없이 황제와 황후의 등장을 알리는 시종장의 목소리와 함께 웅장한 연주가 울려 퍼졌다.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드십니다!”
모두 기립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테이블마다 황성의 시종들이 돌면서 어른들에게는 화이트 와인을, 아이들에게는 어린이용 무알콜 샴페인을 채워 주었다.
연한 갈색 머리를 곱게 올린 황후가 낭랑한 음성으로 좌중을 보며 축사를 시작했다.
“문학 살롱은 내가 애정을 깊이 가진 행사랍니다. 초청받은 가문도, 이곳에 자리한 가문도 모두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면 합니다. 제국의 광영과 여신의 가호가 닿기를.”
이어 모두가 잔을 높이 들어 건배를 외쳤다.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연회장 무대 위로 오른 청년 시인이 하프를 튕기면서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아, 갈망하는 이여! 계절의 끝에서 나에게 오라.”
‘한여름 밤의 꿈’을 주제로 여흥을 돋우는 오페라 공연까지 보고 나자, 어느새 연회장에 설치되어 있던 커다란 영상구들이 하나둘 켜졌다.
영상구는 로맨틱하게 꾸며진 야외 정원의 풍경을 비추었다. 인공 폭포와 굽이진 나무들 사이 떠다니는 반딧불. 그 주위로 라일락과 장미, 수국, 라벤더 꽃들이 나비들과 어우러진 곳이었다. 마치 요정이 나오는 숲속 같았다.
문학 살롱에 참석하는 가문들은 특별 만찬장으로 이동하라는 안내에, 다른 귀족들의 동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퇴장했다.
루시엘은 힐끗 빈 테이블에 시선을 주며 생각했다.
‘아직 두 가문이 오지 않았어. 발루크 후작가와 카르한 공작가.’
황성에서 마련해 준 손님용 객실로 이동해, 드레스와 머리 장식을 바꾸고 약간의 휴식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때까지도 두 가문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윽고 특별 만찬장에서 만찬이 이어졌다.
여러 고위 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식사를 하니, 무거운 분위기라 아이들은 대부분 식사를 별로 이어 가지 못했다.
하지만 루시엘은 야무지게 회전식 테이블을 돌려서 나온 요리들을 접시에 덜어 하나씩 맛보고 있었다.
그런 루시엘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루이비드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우리 새아가는 식성이 좋기도 하지.”
“어머나, 정말 어린 공자비가 기세에 눌리지도 않고 복스럽게 잘 먹는군요.”
황후도 냅킨으로 입술을 닦아 내고 한마디 거들었다.
“벨슈타인 공작께서 요즘 관심 두시는 사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수염을 문지르며 가르솔 후작이 물었고, 레이놀드 황자도 주시했다. 루이비드는 요리에 집중하며 대답했다.
“글쎄……. 관심사야 워낙 많아서.”
“공의 관심사는 늘 바뀌는 터라 한둘이 아니지. 하하하.”
노이슈반 황제가 웃으며 대신 대답해 주었다. 황실에게 소유권을 샀던 프란델 호수에 관련된 내용이 퍽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그보다 클로디아 황녀가 재미있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들었지요.”
벨슈타인 공작의 예상 못 한 언급에 클로디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루시엘과 눈이 마주치자 차분하게 말했다.
“네, 우울증 치료사 양성 사업인데…… 아직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공자비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어요.”
두 소녀가 시선을 마주치는 걸 본 루이비드가 말했다.
“언제든 조력이 필요하면 알려 주면 좋겠군.”
잠시 모두가 놀란 눈치였다.
그간 벨슈타인이 황실에 우호적으로 나왔던 기색도 없었고, 그보다 더 대놓고 ‘조력’의 뜻을 내비쳤기에 인사치레라도 벨슈타인 공작의 입술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건 벨슈타인이 클로디아 황녀를 지지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레이놀드 황자가 테이블 아래에서 쥐고 있던 냅킨을 구겼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클로디아가 뭘 믿고 그렇게 까불었는지.
화제가 넘어와서 이제는 아이들이 뭘 잘하는지 이야기가 나왔고, 키제프에 관련된 대화가 오갈 때쯤이었다.
“허, 공자가 열세 살이 아닌가? 그 나이에 벌써 오러를 발현했다니 사실인가?”
“아직 미흡합니다.”
“마법까지 타고난 데다가 검술까지 갖추었다니 그야말로 벨슈타인의 차기 가주답군.”
어른들의 칭찬에 키제프가 얼굴을 붉혔다. 공작이 루시엘의 마법 재능도 자랑하고 싶어 들썩거리던 참이었다.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서 헐레벌떡 한 소년이 만찬장에 도착했다.
목까지 내려오는 분홍 머리카락에 맑은 하늘색 눈동자.
키제프보다는 어려 보이고, 루시엘보다는 더 큰 소년이었다.
검이나 지팡이가 아닌 바이올린을 둘러맨 소년은 어린 음악가처럼 보였다.
루시엘은 제 눈이 순간 어떻게 된 건가 싶었다.
‘어? 방금 분명 꼬리를 본 것 같은데…….’
“느, 늦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가주이신 아버님과 형님을 대신하여 왔습니다. 카르한 공작가의 차남, 아흰 폰 카르한입니다.”
“어서 오도록, 고생이 많았구나. 부친께서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니고?”
“아, 바다에서 나타난 마물 때문에 급히 처치하러 가셨습니다.”
“저런.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카르한 공작가라면, 제국의 둘뿐인 공작가 중 남부 지역의 강자였다.
드넓은 카라비 해역과 사십여 개의 원주민 섬을 정복하고 해적들을 타파하여 일대를 평정한 가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거친 뱃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렸는데 나타난 소년은 전혀 그렇지 않아서 이미지가 연결되지 않았다.
소년이 한참 달그락거리면서 둘러맸던 바이올린과 악보까지 내려놓았다.
그때 카르한 공자가 루시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영애,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에요, 공자. 편히 앉으세…….”
루시엘은 방긋 웃어 주며 말하는데 키제프가 불쑥 일어나서 카르한 공자가 앉으려던 의자로 자리를 옮겨 앉더니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자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영애가 아니라 벨슈타인 공자비로 알아 두시죠.”
“아, ……그런가요. 실례했습니다. 결혼하신 레이디인 줄 몰랐습니다.”
“이제는 잘 알아 두시면 될 겁니다.”
아흰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 옆으로 자리를 잡았고, 키제프의 돌발 행동에 루시엘은 그만 얼굴이 달아올라 숨고 싶어졌다.
‘……키제프, 그만해애.’
이내 그것도 모자라서 루시엘의 접시로 부지런히 스테이크를 썰어서 옮겨 주었다.
건너로는 레이놀드 황자를, 옆으로는 아흰을 경계하는 키제프였다. 그런 공자를 두고 어른들이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좋을 때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