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매년 열리는 문학 살롱이었지만 황후는 이맘때쯤 되면, 소녀처럼 홍조 가득한 뺨을 감싸며 설레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올해는 유독 기대가 되는구나.”
“저도요, 어머니. 저 정원을 살짝 둘러보고 올까 봐요.”
“다녀오렴, 클로디아.”
테라스 건너편에는 야외 정원을 손질하는 정원사들의 마지막 마무리가 한창이었다.
황후는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고는 다시 시집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들뜬 마음 때문인지 쉬이 집중되진 않았다.
한 나라의 안주인으로 주관하는 여러 행사 중, 예술이나 문학은 가장 관심 분야였다.
더욱이 남편인 노이슈반은 그쪽으로는 완전히 문외한이었기에 모든 의사 결정을 그녀가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초청하는 가문도 그녀의 입맛대로 어느 정도는 지정할 수 있었다.
아무리 사교 행사라고는 해도, 황실의 행사이니만큼 권력과 맞닿아있는 것은 자명한 일.
황후는 이 행사에서 보이는 모습을 통해 대귀족들의 복잡한 속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었다.
누구는 황성과의 교류를 위해서.
누구는 불러 주니 명목상으로.
가문의 명예, 정치, 사교계의 주목, 경쟁자의 제거, 사업의 일환 등.
그 목적들은 셀 수도 없이 많았지만, 한 가지는 구분이 가능했다. 주요 가문들이 모이는 만큼, 황실의 누구 편에 설지 한눈에 가려진다는 점이었다.
‘작년 같았으면 적당히 교류하고 싶은 가문이나 교양이 높은 가문을 선정했지만 올해부터는 달라.’
클로디아.
이 아이가 어쩌면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지도 모른다. 지난 국무회의에서 발언으로 황녀가 일으킨 반향은 커졌으니.
그간 외가라고 외면받았던 제 가문도 면을 세울 기회가 생길 터.
‘기왕이면 아주 든든한 조력 가문이 뒷받침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그건 단기간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국에서 황녀가 황위를 이은 적은 없었으니 애초에 권력이 큰 귀족들은 황녀의 뒤에 서는 걸 당연스럽게 배제했었다.
이번 살롱에서 황후는 클로디아를 도와줄 힘이 있는 가문을 눈여겨볼 심산이었다.
어느새 다시 테이블로 돌아온 클로디아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어머니. 정원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것 같아서 설레요.”
클로디아도 이번 문학 살롱에서 루시엘을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니 기뻤다.
“이번에는 벨슈타인가에서 네 사람이나 참석한다더구나. 클로디아, 공자비에게도 따로 초청장을 보냈다고?”
황후의 말에 클로디아는 살짝 웃어 보였다.
“네, 그 아이가 꼭 와 주었으면 해서요. 제게 도움을 주었으니까요.”
“그래, 나도 그 공자비를 꼭 만나 보고 싶구나. 어떤 아이인지.”
“분명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소문에는 천하의 얼음장 같은 벨슈타인 공작도 그 아이를 아주 애지중지한다던데, 너까지 그리 말하다니. 점점 궁금한걸.”
모녀는 닮은 미소를 지으면서 마주 보았다.
* * *
“이번에 선정된 일곱 가문이 어디인가요?”
“그야 제국에 둘뿐인 공작가가 참석하는 건 당연지사겠죠?”
“북부의 벨슈타인과 남부의 카르한 공작가 말이지요.”
“그 외에는 지난번과 같은 가문이 아닐까 싶군요. 작년에는 새로운 얼굴들이 없었지만 그래도 세리안 백작 부인의 활약이 대단했지요?”
“저는 마랑드 후작 부부의 시와 노래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는데 올해는 무슨 볼거리가 있을까요.”
황도 시내 곳곳이 황성 문학 살롱을 앞두고 들썩이는 가운데, 시클라인은 잠시 시험에서 만난 다른 응시자들과 함께 카페에 나와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필기는 무사히 합격했지만 실기가 역시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아가 마님이 알려 준 마나 영양제의 조제 레시피대로 약을 배합해 보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완성한 약은 그 효능이 미미했다.
“피터가 개발한 발모제는 대박이야! 이틀 전에 바르고 잤는데 털이 이만큼 자랐어.”
“이러다가 수석으로 합격하는 것 아닌가? 벌써 실력 있는 약제사는 눈여겨보는 거 같던데.”
“학술원으로 진학하겠지?”
“……아직 속단하긴 이르지.”
이미 같은 조의 다른 응시자는 뛰어난 효능이 있는 약을 순조롭게 개발한 모양이었다.
시클라인은 무거운 마음으로 조바심과 초조함에 눈동자만 데룩데룩 굴린 채 앉아 있었다.
그때 피터라는 청년이 혼자 다른 곳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시클라인에게 다가왔다.
“……저, 레니트 양.”
“네? 저요?”
“네. 레니트 양이 개발 중이라는 영양제는 레시피가 뭐라고 했었죠? 도움을 주고 싶어서…….”
“아, 아뇨. 괜찮아요. 저는…….”
피터 린킨스.
그는 응시자들 사이에서 가장 합격률이 높은 사람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효능을 보이는 발모제 말고도 다른 약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실제로 린킨스 가문 사람 대부분이 황성에서 고위 약제사를 하거나, 학술원에서 한 가닥 하고 있다고 들었다.
약초학계 쪽에서는 알아주는 집안인 모양이었다.
레니트의 아버지 역시 생전에 황성 약제사였지만, 그리 높은 자리는 아니었다.
“레니트 선생님은 소신껏 약을 개발하던 분이라 들었습니다.”
“제 아버지를…… 아시나요?”
“물론이지요. 레니트 선생님 같은 분이야말로 약을 위해 힘쓰셨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겁니다.”
피터가 말하면서 시클라인의 옆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였다.
“미안하지만 그녀의 옆자리는 제 몫인데요.”
새하얀 밀짚모자, 분홍색 색안경을 살짝 올리면서 루시엘이 접힌 양산의 끝으로 의자를 톡 건드렸다.
반짝이는 은발, 민소매 레몬색 드레스가 깜찍하면서도 발랄해 보였다.
대귀족의 자제임에 틀림없는 모습에 카페에 있는 모두가 바라보았다.
“저 아이는 누구지요?”
“저 드레스는…… 베아트리체 의상실의 단 한 벌뿐인 퍼퓸 드레스인데. 이국에서 놀러 온 왕녀가 아닐까요?”
“문학 살롱에 가려는 귀족인지도요.”
모자와 안경으로 얼굴을 가리고 벨슈타인가의 마차를 멀리 대기시켰더니 다들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은 가족들 없이 로즈만 곁에 있었다.
물론 숨는다고 숨었지만 루시엘의 눈에 띈 호위만 다섯이었고, 그중 둘은 변장한 키제프와 공작이었다.
이럴 땐 저들을 말려 줄 엘링턴이 없다는 게 다소 불편한 점이었다.
어쨌거나 루시엘의 등장에 시클라인에게 다가서던 피터는 곤란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시클라인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가 마님, 도대체 여긴 어떻게…….”
“시클라인 선생님, 필기 합격 소식은 신문으로 들었는데 진짜는 실기라고 했잖아요.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알아보니까, 오늘은 응시자들이 시내에 나갔다고 해서 이렇게 와 봤어요. 저도 황성 문학 살롱 때문에 온 거예요.”
“아…… 그러셨군요.”
“응원해 줄게요.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시클라인의 눈동자가 이내 살짝 흔들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실은 입맛도 없어요.”
시클라인이 손에 얼굴을 파묻으며 말했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요?”
“그게…….”
주변에는 다른 응시자들이 있어 시클라인은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은 그녀를 데리고 다른 음식점으로 이동했다. 자리마다 칸칸이 자그만 공간으로 되어 있어서 비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가게였다.
“실은 아가 마님께서 알려 주신 조제 레시피대로, 약을 배합해 보았는데 이상하게 효능이 아주 미미해요.”
“……미미하다고요? 그럴 리 없는데.”
루시엘이 입술을 꼭 깨물었다. 꼭 잘될 거라 믿었는데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근데 아까 그 사람은 왜 레시피를 물어봤어요?”
“아, 그는 약초학계에서 유명한 린킨스 자작가 사람인데, 실력도 좋은 것 같아요. 일찌감치 자기 약은 개발을 끝내고 다른 사람 거를 도와주려나 봐요.”
실력 있는 사람이더라도 이건 단순한 과제가 아니라 시험이었다. 개인의 능력을 선별하는 시험.
게다가 마나 영양제는 지금껏 그 누구도 개발하지 못한 약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루시엘의 머리를 스쳤다.
“음…… 절대로 알려 주지 말아요.”
“네? 네에. 그의 도움을 받을 생각은 없어요.”
“응, 그게 좋겠어요. 내일이면 문학 살롱이 열려요. 시험은 더 뒤였죠?”
“네, 삼 일가량 남았는데 그동안 얼마나 진전이 있을는지. 근데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기적이었죠.”
시클라인이 약한 소리를 하자 루시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우선은 약 배합법에 문제가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그걸 정리해서 같이 볼까요?”
“네, 그건 여기 있어요.”
시클라인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루시엘에게 내밀었다.
“사실상 제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시도를 다 해 본 것 같은데…….”
그녀가 내민 서류를 훑어보던 루시엘은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빽빽하게 수기로 적어 내려간 서류에는 햇빛에 바싹 말린 재료들을 빻기도 하고, 생으로 즙을 내기도 했다.
불을 사용하기도 하고, 물에 담그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수없이 반복하고 애쓴 것이 보였지만 그 답은 보이지 않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루시엘은 시클라인에게 우선 든든하게 음식을 먹이고 다독여 주었다.
“제가 고민해 보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전달할게요, 시클라인 선생님. 우선 오늘은 푹 쉬시면 좋겠어요.”
“네, 고마워요. 아가 마님. 항상 저에게 힘을 주셔서. 그렇지만 문학 살롱에 가시는 일이 더 중요한 거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괜찮아요. 잘 다녀오세요!”
시클라인이 웃으면서 루시엘에게 힘내라고 해 주었다. 자신이 도리어 응원을 받아 버렸다는 생각에 루시엘의 고민도 커졌다.
루시엘은 시클라인과 헤어지고는 자신의 뒤를 밟고 있는 두 부자에게로 뽀짝 걸어가서 말했다.
“……아빠, 키제프. 솜사탕 먹으러 가요. 달콤한 게 필요해요.”
“……눈치챘나.”
“모를 수가 없잖아요.”
루시엘이 배시시 웃었다.
그들은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주변 사람을 범죄자 보듯 노려보았다.
“그거야 이 흉흉한 세상에 안심이 안 되니까.”
변장한 수염을 슥 떼어 내던 공작이 말했다.
“누가 널 납치하면 큰일이야.”
키제프도 로브 자락을 슥 걷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