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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42)화 (142/282)

<142화>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루시엘은 솔리아페의 무릎에 누워 까무룩 잠들었다.

루시엘은 마차를 타면 잠드는 버릇이 있다고 루이비드가 누누이 말했지만, 직접 품에 파고드는 아이를 보니 솔리아페는 입가에 절로 지어지는 미소를 억누를 수 없었다.

새근대며 잠든 조그만 온기를 가진 아이. 이토록 소중한 아이에게 함부로 하는 것들은 결코, 가만두지 않으리라.

그녀가 카빌 후작에게 보낸 서신은 경고였다.

어느새 마차는 벨슈타인 타운하우스의 대문을 통과했다. 라리에트와는 출발할 때 마차를 달리 탔기에 이미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솔리아페는 루시엘의 말랑한 분홍빛 뺨에 뽀뽀해 주며 나긋한 목소리로 조심스레 속삭였다.

“이제 집에 왔단다. 루시엘.”

루시엘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잠이 덜 깬 눈망울이 두 번 깜빡이더니 솔리아페의 얼굴을 담았다.

엄마, 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몰랐다.

이전 생에서 다른 건 하나도 부럽지 않았지만, 딱 한 가지가 부러웠다. 페넬로페를 따뜻한 품으로 안아 주는 후작 부인이 있다는 것 말이다.

‘페넬로페, 우리 딸. 우리 아기. 누가 우리 딸을 울린 게야?’

“루시엘, 우리 아가. 안아서 옮겨 줄까?”

“……아니에요, 엄마.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루시엘이 갑자기 목을 끌어안자, 솔리아페는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아이를 폭 안아 주었다.

얼마나 부드럽고 포근하던지 진짜 엄마 같아서 루시엘은 그녀의 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은은한 꽃향기가 섞인 특유의 아늑한 엄마 내음이 가슴을 깊이 도닥인다.

루시엘은 감동에 차올랐지만, 지금은 보석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있었다.

어느새 고단함은 훌쩍 날아갔다. 페넬로페와의 기 싸움에서 소진되었던 기운도 다시 차오른 느낌.

벨슈타인의 타운하우스는 웅장한 공작성에 비하면 아담했지만, 황도의 어떤 저택보다도 으리으리한 곳이었다.

루시엘은 어두운 갈색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이 어쩐지 커다란 초콜릿 같다고 생각했다.

“저는 잠깐 집 구경 더 하고 들어갈래요.”

“그러렴, 루시엘.”

루시엘이 종종걸음으로 주변을 살폈다. 조약돌이 쌓인 분수와 너른 잔디밭, 조경이 아름다운 작은 정원도 있어서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뒤뜰에는 키제프가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길 나누고 있었다.

“……키제프랑 레이븐?”

“루시엘, 시내는 잘 다녀왔…….”

키제프가 루시엘을 보다가 말을 멈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바라본 붉은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굽슬굽슬하게 풍성한 은발을 풀어놓은 루시엘은 길을 헤매다 찾아온 요정 왕국의 공주 같았다.

“……응. 다녀왔어. 일이 좀 있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렇게…… 예뻐지는데?”

“……어어? 아니, 그런 가게가 있었어. 이것저것 관리도 받고 머리도 하고, 여자들의 천국!”

얼빠진 얼굴로 칭찬하는 키제프에게 루시엘이 농담하지 말라며 서둘러 라리에트가 하던 말을 덧붙였다.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갑자기 황성 가는 게 몹시 불안한데.”

“……으잉?”

영문을 모르겠는 루시엘은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근데 방금 누구랑 이야기하지 않았어? ……레이븐이지?”

루시엘의 말에 레이븐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모습을 드러냈다.

“……이크. 들켰다.”

“레이븐, 직무유기야. 정보원 해 주기로 했잖아?”

그러자 키제프가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건 무슨 이야기지? 너 이 자식, 루시엘에게 접근하지 마.”

키제프가 다소 살벌해진 눈빛으로 루시엘을 제 쪽으로 보호했다.

“……그런 오해는 접어 두자, 계약자야. 네가 바빠서 네 부인이 나에게 정보원 노릇을 해 달라고 부탁한 거야. 그리고 아가 마님, 나 방금 왔거든요. 어차피 알아서 잘하던걸? 페넬로페에게 물 먹이는 것도 다 봤지.”

레이븐의 입장 표명에 키제프도 루시엘을 쳐다보았다.

“응. 내가 부탁한 거야, 키제프.”

“그렇군, 그럼 맘껏 부려 먹어도 돼. 루시엘.”

“응, 키제프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키제프의 허락이 떨어지자 루시엘이 방긋 웃었고 레이븐은 안 그래도 창백한 얼굴이 더 안 좋아졌다.

“……부부가 아주 쌍으로 나를 이용하네. 루시엘, 그래도 이런저런 정보 물어 왔어.”

“……뭔데?”

순간 달라진 루시엘의 눈빛에 레이븐이 말했다.

“막시무스 자식은 아카데미에서 폭력 문제로 퇴학당했고, 페넬로페는 외출 금지령이래.”

그러나 루시엘은 실망한 얼굴이었다.

“……음, 그건 며칠 후면 소문이 다 돌 만한 거잖아. 남들 다 아는 거 말고 고급 정보 없어?”

“…….”

“없구나, 그럼 다시 가.”

“네.”

레이븐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조용히 사라졌다. 키제프는 자신이 아는 그 레이븐이 맞나 싶어 말했다.

“저렇게 고분고분한 레이븐은 처음 보는데…….”

“너무 쉽던데. 초콜릿 좋아하잖아.”

루시엘이 아무것도 아닌 양 말했다. 키제프가 말했다.

“그런가.”

어쩐지 저 아닌 존재를 루시엘이 길들였다고 생각하니, 또 질투심이 차오르는 꼴이 우스워 키제프가 자조적으로 입매를 틀었다.

“……그만 들어가자.”

“응.”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응접실에는 타운하우스의 노집사가 그들을 맞이했다.

짧게 자른 백발. 가지런하고 깔끔한 차림과 올곧은 자세가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그리고 아, 이분이 바로 아가 마님이시군요.”

“안녕하세요, 루시엘이에요.”

그는 무릎을 굽히고, 루시엘과 눈을 마주쳤다.

“아주 귀엽고 총명한 어린 숙녀님이라고 에바 집사장에겐 들었습니다만.”

“앗, 에바를 아세요?”

“제 딸입니다. 저는 집사 던컨이라고 합니다. 머무시는 동안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뒤에서 느릿느릿 공작이 편안한 차림으로 층계를 내려왔다.

“던컨만큼 제격인 사람이 없어서 믿고 저택을 다시 맡겼지.”

“감사할 따름입니다, 각하.”

공작의 에바에 대한 믿음은, 던컨을 향한 신임에서부터 내려온 것이 눈으로 보였다.

“루시엘, ……카빌가의 아이와 무슨 일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티 내지 않으려 했지만, 분노를 억누르며 그가 말했다. 이미 의자 손잡이 하나는 망가뜨리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 별일 없었어요. 엄마께서 그 아일 혼내 주셔서 저는 괜찮아요. 다친 곳도 없고, 마음도 다치지 않았어요.”

“착해 빠져선. 이리 와.”

“네, 아빠.”

루시엘이 폴짝 달려가 안겼다. 공작이 커다란 품에 안아 주고 나서 말했다.

“버러지 같은 카빌이 또 널 건드린다면 벨슈타인이 뭔지 보여 주어야겠군. 키제프, 너도 착실히 힘을 키워야 한다.”

“……네, 아버지.”

“은혜는 넘치게, 복수는 차갑게. 알겠지?”

“예.”

제 아버지의 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나자 키제프의 그것도 함께 진해졌다. 마치 범 두 마리를 보는 듯, 무서운 기세였다.

“…….”

루시엘은 언젠가 이 두 사람이 그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루시엘이 곤란함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어느덧 저녁 시간이었다. 향긋한 음식 냄새가 주방으로부터 솔솔 풍겼다.

두 남자의 살기를 느끼고도 던컨 집사나 다른 사용인들은 아무 내색이 없었지만, 루시엘은 두 사람이 체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아빠, 오늘은 진정하세요. 키제프도. ……응?”

루시엘이 눈을 초롱이며 당장에라도 카빌가를 쳐들어갈 듯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말렸다.

루시엘이 허리에 손을 얹고 말했다.

“얌전히 식사하는 사람에게는 뽀뽀해 줄게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평온하고 느른한 얼굴이 되어서 초식동물처럼 식당으로 내려갔다.

“배가 몹시 고파지는군.”

“저도요.”

루시엘은 두 사람을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면서 바라보았다. 본성의 세스 주방장만큼은 아니지만, 이곳의 주방장도 훌륭한 솜씨였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치고 루시엘은 두 사람의 볼에 사이좋게 입을 맞춰 주었다. 공작의 헤벌쭉하게 벌린 입가는 그날 다물어지지 않았고, 키제프는 몸이 바짝 굳은 채 귓불을 붉혔다. 루시엘은 키제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복도에서 헤어졌다.

“잘 자, 루시엘.”

타운하우스에서는 루시엘과 키제프의 방이 각자 배정되었다. 따로라는 사실을 알고, 키제프는 내심 기대했던 모양인지 아쉬운 표정이었다.

옷을 갈아입은 루시엘은 거울 속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맑은 하늘색의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라리에트가 최신 유행이라면서 베아트리체에 가기 전에 데려가 준 뷰티 상점.

그곳에서 루시엘은 원하는 물건을 발견했다.

무지개 이슬 톡톡 렌즈.

바로 눈동자 색을 랜덤으로 바꾸는 액체형 렌즈였는데 그러면 마법으로 눈 색을 바꾸는 스타일 체인지 마법을 걸지 않아도 자유롭게 눈동자를 바꿀 수 있었다.

‘이거면 보석안을 들키지 않겠어.’

게다가 황성 살롱에 가면 외부 활동 시간이 길어지니, 만일을 대비해서 준비한 것이 또 있었다.

이벨린 할머니가 주신 드래곤 마나를 정제한 목걸이 부적.

루시엘이 감정을 느껴도 보석을 만들어 내지 않은 것이 이것 덕분이었다. 루시엘은 목걸이를 매만지면서 이벨린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루시엘, 황성에 그냥 갈 수는 없다. 이걸 가져가거라. 조금쯤은 도움이 될 거란다.’

드래곤 마나는 향을 피우면 마법의 흔적을 덮을 수도 있지만, 보다 짙게 정제한 이 부적은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해, 일부 능력을 감추어 주었다.

따라서 루시엘의 감정에 감응한 크리스털 페어리의 힘을 감출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유효 시간은 24시간으로 짧은 편이었다. 그러니 평소에 너무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좋았다.

“외출이 끝났으니, 이제 이 목걸이는 그만 풀어도 되겠지.”

목걸이를 풀자마자 루시엘은 또로롱, 행복과 감동에 찬 토파즈를 만들어 냈다.

루시엘은 침대로 퐁당 올라가서는 라리에트가 알려 준 문학 살롱에 참가하는 가문들과 그 정보를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어느 정도는 숙지해 두고 가는 게 좋겠어.”

루시엘이 눈을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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