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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가문의 새아가 (141)화 (141/282)

<141화>

“하필이면……! 야! 뭐야, 갑자기 왜 혼자서 주저앉는 건데?”

페넬로페가 눈을 부라리며 루시엘에게 따져 물었다. 서둘러 달려온 로즈가 루시엘의 몸을 살폈다.

“세상에 아가 마님, 괜찮으세요? 어디 안 다치셨어요?”

루시엘은 소매로 눈을 가려 우는 척하며 어깨도 살짝 들썩였다.

“카빌 영애가 구석으로 밀치는 바람에 놀라서…….”

“내가 밀쳐서 넘어지기는 무슨. 순 거짓말이에요, 저거!”

페넬로페의 눈이 커다랗게 굴러갔다.

약간의 과장을 보탰지만 사실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페넬로페가 거칠게 몰아붙이는 바람에 루시엘의 원피스 어깨 부분이 조금 뜯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옷이 이렇게 되었는데…….”

루시엘은 어깨가 터진 부분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로즈와 점원들도 놀라서 페넬로페를 쳐다보았다.

“……아, 아니야. 난 아니라고!”

페넬로페가 아니라며 바락바락 악다구니를 썼다. 상대는 최상위 고객인 벨슈타인 공작가였기에 점원은 점점 난감한 표정이 되어 갔다.

“겁도 없이 누가 우리 새아길 울렸지?”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솔리아페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루시엘과 페넬로페의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솔리아페는 루시엘을 포근하게 안아 주며 물었다.

“정말 괜찮니? 솔직하게 말해 보렴.”

“괜찮아요, 그저 옷이 조금 뜯어졌을 뿐이에요.”

“옷이 뜯길 정도로 루시엘에게 손을 대다니…….”

루시엘이 솔리아페의 품에 안겨 페넬로페를 흘낏 보았다.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쥐가 되자 페넬로페가 외쳤다.

“그. 그건 저도 모르는 일이라고요!”

“다른 건 다 참겠지만 우리 루시엘을 건드리는 건 용서가 안 되는데 어쩌지?”

“……!”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아이를 마주했다. 루시엘보다 체구가 크고, 약삭빠른 인상을 가진 아이였다.

솔리아페가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아이야, 넌 누구지?”

형용할 수 없는 차가운 감각에 페넬로페가 움찔했다. 자그만 머릿속이 데굴데굴 굴렀다. 왠지 높은 신분의 여성 같았지만 알 게 뭔가 싶었다.

과거 벨슈타인 공작가에 무례를 저지르고 혼쭐이 났던 것도 잊고, 어차피 황족이 아닐 바에야 다 비슷한 귀족이라고 단순히 치부하는 페넬로페였다.

늘상 다른 귀족을 무시하는 카빌 후작의 태도에서 보고 배운 것이기도 했다.

실은 어른들의 일에는 관심이 없어 공작 부인의 얼굴까지는 자세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 그걸 제가 왜 밝혀야 해요? 아줌마는 누구신데요? 저 애가 먼저 내가 쇼핑하는데 쓸데없이 참견했는걸요.”

“아줌마라니, 이분은 벨슈타인 공작 부인이시란다. 진짜 물불 안 가리는 애구나. 너.”

보다 못한 라리에트도 인상을 찌푸렸다.

루시엘도 멍청함을 뽐내는 페넬로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음, 정말 천지 분간을 모르는 애로구나.”

솔리아페가 나직이 말하며 다시금 페넬로페를 보았다.

참으로 당돌한 아이였다. 무엇보다 어른을 향해 번뜩이는 초록 눈동자는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부모가 누군지 참으로 걱정될 만큼 불손함을 함께 담고 있었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한다면 그 부모가 문제겠지.

그때 루시엘이 말했다.

“피로연에서 쫓겨난 카빌 후작가의 딸이에요.”

“아…… 기억나는구나. 그때도 초대받지 못한 주제에 소란을 피우고 돌아갔던. 카빌은 여기 들어오지 못할 텐데?”

솔리아페의 말에 페넬로페가 루시엘을 노려보고 나서 분하다는 듯 제 말을 이어 갔다.

“……벨슈타인이 이 거리 전체를 사기라도 했나요? 피로연에서 망신당한 덕분에 우린 아주아주 힘들다구요.”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루시엘은 페넬로페를 보며 속으로 한숨지었다. 벨슈타인은 그럴 만한 재력이 있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상권을 독점한다는 말이 나오겠지.

“……못 사는 게 아니라 안 사는 거란다. 그나저나 네 부모님은 어디 계시지?”

“지금은 닐즈 백작가의 자격으로 온 거니까 부모님은 상관없잖아요.”

“이 아이 보호자는 어디 있죠?”

가게 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이내 수치심에 얼굴이 벌게진 중년 부인이 시녀와 함께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와서는 머리를 숙였다.

“아이구,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벨슈타인 공작 부인, 부디 노여움을 푸시지요. 세리안 백작 부인께서도요. 어린아이가 무얼 모르고 한 행동이랍니다, 호호호.”

“외숙모!”

닐즈 백작 부인이 달려와 사죄하면서 시녀에게 페넬로페를 데려가게 했다.

그러나 이어진 라리에트의 말에 그녀는 웃음기를 딱 멈추고 말았다.

“닐즈 백작가라면, 황후 폐하를 모시는 시녀장 라라 부인과 최근 가깝게 지내신다던데. 황성에 작은 자리라도 노리는 모양인데 지금 보니 그 꿈은 접으시는 게 좋겠어요.”

“예? 그, 그걸 어떻게 알았……. 저, 저는 그저 부탁받았을 뿐이에요. 카빌 후작가를 옹호할 생각은 없답니다.”

눈치를 살살 보며 앓는 소리를 하는 닐즈 백작 부인의 저자세에 솔리아페는 침묵했고, 페넬로페는 배신감을 느꼈다.

“……외숙모! 아버지에게 다 이를 거예요.”

페넬로페의 분노에 그녀가 귓속말을 전했다.

“페넬로페, 너도 지금은 얌전히 있는 게 좋아! 정말 황성 문학 살롱에 못 가고 싶니?”

“그, 그건…….”

“벨슈타인 공작가는 아주 고위 귀족이란다. 게다가 공작 부인 옆은 또 누구니, 사교계 제일의 세리안 백작 부인이잖아. 어서 싹싹 빌어라!”

그 말에는 페넬로페도 덜컥 겁이 나는지 불안한 눈초리로 사방을 둘러보다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자신이 화를 참지 못하고 얼마나 커다란 짓을 저지르고 말았는지 뒤늦게 깨달은 터였다.

‘아, 짜증 나. 진짜…… 저 계집애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아이가 잘못을 깨닫고 사과를 한다네요. 부디 용서를…….”

페넬로페가 인형처럼 뻣뻣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마음에 차는 사과는 아니었으나 루시엘은 페넬로페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저 아이는 아마 이번에도 전혀 반성하지 않겠지.

루시엘은 씁쓸한 얼굴로 수치심에 달아오른 페넬로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차곡차곡 업보를 쌓게 놔둘까 싶기도 했다.

‘……페넬로페를 용서하는 일 따위 없도록 말이야.’

“사과도 받았으니 됐어요, 엄마, 이모. 오늘은 일찍 타운하우스로 돌아가요.”

“우리 루시엘…… 천사 같은 마음씨 좀 봐.”

라리에트가 루시엘을 감쌌고, 솔리아페는 어린이용 드레스를 둘러보며 말했다.

“하지만 드레스는 아직 고르지 않았잖니?”

“그건 내일도 있으니까요.”

“아니야. 여기부터 저기까지 구입할 테니, 아이 사이즈에 맞게 보내주게.”

“예, 알겠습니다.”

“우리는 이만 돌아가자. 후속 조치는 부탁하네.”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점원이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다른 직원을 불렀다.

가드처럼 보이는 남자 직원이 오더니 닐즈 백작 부인과 페넬로페에게 조용히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분위기를 해치셔서 그만 퇴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만에 가득 찬 입술이 잔뜩 튀어나와 있던 페넬로페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난 공자비와 친해지려던 건데,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잖아. 그리고 나, 네 비밀을 알고 있어! 내 아버지께 전할 거야.”

저렇게 어린아이의 눈에 탐욕이 일렁인다. 루시엘이 짧게 대꾸했다.

“너 같은 친구를 둔 적도, 두고 싶지도 않아. 내 비밀이라면 뭘 말하는지 알아. 마음대로 밝혀도 상관없어.”

페넬로페가 말하는 것은 루시엘의 눈동자 색일 터였다. 루시엘은 웃으면서 하늘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솔리아페가 페넬로페의 어깨를 붙잡고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를 그만 괴롭히렴,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세상에는 용납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단다. 언젠가 그걸 깨닫는 일이 오기를 바란다.”

겉으론 상냥하게 웃는 얼굴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오한이 드는 페넬로페였다.

“그리고 부모님께 이 서신을 꼭 좀 전해 주렴.”

솔리아페는 한껏 우아하게 부채를 펼쳐 들고는 페넬로페에게 서신을 건넸다.

페넬로페가 받지 않자 닐즈 백작 부인이 대신 챙기고는 아이를 데리고 가게를 나서 얼른 마차를 잡아탔다. 낯이 부끄러워 얼굴이 타는 것만 같았다.

소란이 일어난 통에 이미 오트쿠튀르 안에 있던 많은 귀족이 목격했고, 사교계에서는 알아주는 세리안 백작 부인까지 있었으니 이제 소문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카빌이야 이미 눈 밖에 났겠지만 닐즈가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닐즈 백작 부인은 마차 안에서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는 아이에게 말했다.

“페넬로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고 했잖니.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데려오지 않았을 거다.”

“외숙모야말로 정말 실망이에요.”

“아이고, 머리야. 널 어쩌면 좋니…….”

닐즈 백작 부인이 머리를 거머쥐었다. 페넬로페는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고 속이 뒤집혔다.

고작 부자 시댁에 시집간 것 하나로 루시엘은 최고의 대우를 받고 모두의 찬사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다.

반짝이는 보석과 최고급 드레스, 황녀와 견줄 만큼의 부와 사치.

‘나도…… 나도 그렇게 될 거야. 아니, 그 애가 가진 거 다 빼앗아 줄 거야. 내가 어디가 모자라서?’

과거에 플로린 부티크에서부터 시작된 악연이었다.

‘내가 멍청하게 또 당할 거라고 생각해? 이번 일은 두 배로 갚아 주겠어.’

페넬로페는 오늘 똑똑히 본 루시엘의 눈동자 색을 떠올렸다.

‘그 계집애, 오늘은 맑은 하늘색 눈동자를 하고 있었어. 지난번에는 갈색이었던 것 같은데…… 뭐지? 어느 게 진짜야?’

제 아비인 카빌 후작에게 고하려고 했는데 페넬로페는 순간 아리송해진 탓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닐즈 백작 부인을 따라서 황성 살롱에 가려고 했던 계획이 틀어지려나?

하지만 자신의 아비가 누구인가.

안 되는 것도 되게 하는 카빌 후작이었다.

‘어떻게든 해 주실 거야. 어차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못 가니까.’

다시 태평해졌다가도 아까 당한 일이 떠올라서 혼자서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페넬로페였다.

그러나 솔리아페의 서신을 받아 보게 된 카빌 후작이 기함하면서 페넬로페에게 막시무스와 똑같이 외출 금지령을 내렸다.

「하다못해 짐승도 배변은 가릴 줄 압니다. 사람이 그걸 못 하면 짐승이나 다를 바 없겠지요. 아이의 경거망동을 그대로 두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벨슈타인을 자극하기 위함인가요?」

그건 모욕이나 다름없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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